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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2018년 [시] 진해역 외 9편 / 정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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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319회 작성일 18-12-30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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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일이란 감동하고, 사랑하고,
희구하고 전율하며 사는 것이다
-로뎅


하마터면 로뎅을 까맣게
잊고 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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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역


철길의 벚꽃이 한꺼번에 피었다가
약속처럼 진다
기차는 앞으로만 달리고
나 혼자 흔들리며 뒤로, 뒤로 간다


마지막 완행열차가 떠난 대합실
몇 번의 봄을 기다리던 여자아이가 이윽고 떠났다
온몸으로 매달리던 창밖의 이별도
느릿느릿 늙어서
잔주름 같은 그리움이 되었다


창틀에 턱을 괸 채
아직도 차창을 두드리며 달려오는
한 소년의 맨발이
흩어져 내리는 벚꽃잎 사이로 멀어지는 것을
물끄러미 본다
완행열차는 아직도 가슴 속을 달리고 있는데
봄만 남기고 사라진 역


나는 영원히 내리지 못하네


✽진해역: 2015년 2월 1일 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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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


주차를 하고 막 내리려는 순간
발 아래
콘크리트 틈 사이 피어 있는
한 송이 민들레
내 신발 밑바닥이 청천벽력인지도 모른 채
검은 구두를 향해 온몸으로 웃고 있다
급한 나머지
한쪽 발을 든 채 비틀거리다
간신히 민들레를 피해 섰다


많은 사람들이 주차를 하는 이곳
수없이 내리고 타는 발들 속에
지금까지 용케도 살아 있는 풀꽃
아슬아슬은 위태로움이 아니라
소름 끼치도록 고요한 찰나의 평화로움
나도 아슬아슬을 끌고 여기까지 왔다


돌아보니
민들레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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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집


재개발 동네 언덕을 오르면
마주 오는 사람과 스며들어야
길이 되는 골목 끝에
눈먼 아담과 귀먼 이브가 사는 집이 있다
몇 장 고지서가 엽서처럼 꽂혀 있는
녹슨 철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른다
골목이 조용하다
다시 누른다
대문을 두드린다
더 세게 두드린다
뛰어가던 아이 몇이 나를 돌아본다
귀 먼 어머니 혼자 두고
안면 마비가 온 아버지는 더듬더듬 한의원에 가신 모양이다
휴대폰을 꺼냈다
희미하게 울리는 전화 소리를 읽으셨는지
수화기를 받으신다
-엄마, 문 좀 열어주세요.
-여보세요, 누구십니꺼?
-엄마, 나에요 큰딸
-우리집 양반 안계십니더.
_엄마, 엄마, 엄마…
-집에 아무도 안계십니더
딸깍,
낡은 녹색 칠이 벗겨진 철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다섯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온
눈앞의 친정은 너무 멀었다
철문 틈 사이로 보이는
손바닥만 한 마루 끝
읽다 만 성경책이 몇 장 바람결에 넘어가고
빨랫줄엔 오래도록 수건이 말라가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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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아메리카노


카페로 들어온 젊은 여자
한참 메뉴판을 들여다본다
오늘 드립은 뭐예요?
에스프레소는 원샷이에요? 투샷이에요?
카페모카에 생크림 올라가요?
………
………
한참을 망설이다
그냥,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젊은 시절
무수히 많은 메뉴판 같은 길을 놓고
갈팡질팡했다
마셔보지 못한 커피의 이름처럼
내가 가야 할 길의 맛이 궁금해
이것저것 기웃거리다
결국
뜨겁고 양도 많으면서 오래 마시는 잔을 골랐다
아직도 마시고 있는
다 식은 아메리카노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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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보다


보름달 유난히 밝은
추석날 저녁
시내는 차들이 막히고
거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횡단보도 앞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우연히 바라본 맥도널드 2층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과
젊은 남녀들의 웃는 모습이
네온사인으로 반짝거리는데
통유리 구석진 창가
백발의 노인 혼자 구부정하게 앉아
햄버거를 잡수시고 계신다


곧 다가올 내 모습을
거울처럼 환하게
미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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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쓸데없이


지금 막 샤워를 끝냈어요
물기를 닦고 있죠
나를 크로키 해 보실래요
단순한 목각인형 같아 보여도
상당히 복잡하고 난해한 시간들을 품고 있죠


내 늑골 어디쯤 햇살이 닿으면
먹빛 시간들 후두둑 빗소리를 낼 거에요
눈을 감으세요
소나기처럼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수도 있어요
슬픔일까요
환한 대낮에도 결코 빛이 닿지 않는 곳
안에서 잠긴 문처럼
좀체 들어갈 수 없는 거기엔
자라지 않은 내가 있어요
너무 멀어 나조차도 길을 잃는 거긴
그냥 두기로 해요
이제 모든 생각의 물기만 닦으면
난 사라져요


이런, 쓸데없이
다시 옷을 입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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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ter Day!


내가 이 세상 모든 것들과
이별하는 순간이 오면
아들아
부탁이 있다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낯선 삼베 수의 말고
평소 즐겨 입던
찢어진 청바지와
검은 쫄티
빨간 킬힐을 신겨줘
그리고 좋아하는 생맥주 한 잔과
몰래 피우던 담배 한 갑
라이터와 함께 뒷주머니에 찔러다오
거기에 시집 한 권과
비틀즈의 예스터데이까지 들려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결코 나를 위해 울지마라
충분히 너를 사랑했으므로


그날 하루만 나를 추억하며
관습을 위해 곡하지 마라
생과 멸까지 유쾌하게 껴안고 가는 나에게
술잔 높이 들고 축하해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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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에서


헤어지자!
소주잔을 비우며 내가 말했다
순간 그가 내 뺨을 후려쳤다
툭,
수평선이 끊어졌다


먼 기억 속, 다시 찾은 경포에 앉아
젊은 날에 가라앉은
한 척의 청춘을 건져 올린다
표류하는 그리움은
지금도 시퍼런데
오래전의 그 말은
지독하게 널 사랑한다는
또 다른 말이었다고


저 푸른 잉크를 모두 찍어
이제야 너에게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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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끼


낚시로 잡은 돔 한 마리
도마 위에 올려놓고
단칼에 대가리부터 잘라낸다
모든 궁리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므로
자유를 숨긴 지느러미도 가차 없이 잘라낸다
날개에는 수많은 탈출이 비늘처럼 번뜩이므로
길길이 뛰던 생의 안쪽으로
한 떼의 희망이 물거품으로 솟았다 사라지는지
튀어 오른 몇 방울의 몸부림이
눈물처럼 짜다


온몸으로 유영하던 날렵한 기억들이
천천히 생을 단념한다
기억이 많다는 것은 그리움도 많다는 것이다
아픔을 덜어주듯
한순간에 이름을 토막 친다
절단된 기억으로 전생은 까마득하겠지만
이름대로 살아온 물결이
토막 난 몸을 굳게 지키고 있다


미끼가 운명을 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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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들의 식사


가끔
원하지 않는 자리에 낄 때가 있다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고
그저 눈인사 정도로만 알고 지내는
겉옷 같은 관계 속에
뜻하지 않게 함께 하게 된 식사 자리
모두 한 가닥씩 한다는 빳빳한 명함들 위에
플라스틱 가면 하나씩 쓰고
서로를 베껴 먹는 건조한 숟가락들
나도 엉성한 가면으로 얼기설기 나를 가린 채
비닐같은 미소 지으며
숨 막히는 포크질로
질긴 체면 한 점 씹을 때


벌떡 일어나
아무나 한 놈 붙잡고
윗니 아랫니로 꽉 물고 늘어져
불편을 삽질하는 가면을 물어뜯고 싶은 인간적 충동이
문득 목까지 차오를 때가 있다
너와 나의 민낯을 보고 싶은
내 야생의 짐승 한 마리 달래려
슬그머니 화장실에 들면


마음속은
어느덧 집으로 가서
찬밥에 물 말아 먹고
빈 그릇으로 누워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