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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2018년 [시] 단비가 되고 싶다 외 9편 / 정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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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148회 작성일 18-12-30 17:05

본문

해를 더할수록
한 편 두 편 늘어나는 시들을 엮어
첫 집을 지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내 집을 위해
아름드리 품 내어준 나무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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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가 되고 싶다


외로움의 약은 외로움이라며
고립을 자청하는 너를 위해
바다 위에 섬 하나 띄워 놓고
비가 되어 내린다.


안개비가 되었다가
가랑비가 되었다가
비바람 동반한 소나기로 울어 보지만
너에게로 스며들 길은 보이지 않고
네 마음 밖 웅덩이에 흙탕물로 고여
혼자 첨벙이다가


긴 장맛비로 내리면 네 마음 해갈될까
몇 날 며칠 먹구름 몰고 다니며
비를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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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어미 새


싱싱한 애벌레 물고 와도
입 벌리고 받아먹을 새끼가 없다.


할 일 없는 어미 새는
엉켜 드는 실타래 베고 누워
텅 빈 둥지를 지키고 있다.


둥지를 들락이는 바람은
허기를 몰고 오고
어미 새는 습관처럼 우울을 먹는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


대청소를 한다.
둥지에 난 바람구멍을 막고
유통 기한 지난 음식들을 정리하며
어미 새는 허리띠를 졸라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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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아프다


발바닥이 통증을 호소한다.
견디면 낫겠지
참아보라 타일렀더니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땅을 디딜 수 없어 들여다본 발바닥
돌이 된 삶의 이력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아득히 먼 길
돌고 돌아온 노역의 흔적을
족저근막염*이라 진단한 의사는
약물보다 휴식이 더 시급하다지만


고장 잦은 장기(臟器)들 챙기느라
가장 낮은 곳에서
나를 받들어 섬긴 너의 노고를
다독여 준 일 없는 몰인정한 주인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고
참으라고 참아 보라며
아프다 소리치는 너를 끌고
오늘을 건너가고 있다.


✽ 족저근막염 : 뒤꿈치부터 발바닥 전체를 둘러싼 단단한 섬유막에 오랜 시간 자극이 가해지면 생기는 염증. 완치가 힘들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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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떠난 그곳에


거실 문갑 위에 놓여 있는
얼굴 하나
남편에게는 진귀한 수석(壽石)이지만
풍화(風化)가 만든 깊은 주름
내 눈에는 그저 일그러진 화상이다.


어느 골짜기
바위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바람물결 속을
얼마나 오랜 시간 구르고 굴렀을지
내력이 궁금하다.


사람이든 돌이든
제 얼굴 자기가 만든다지만
누군들 미간에 내천(川) 자 새기고 싶었을까


남은 생, 더는 구르지 말고
자연의 품에 안겨 살아보라
묵정밭에 내려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와 보니


주인 떠난 그곳에 내가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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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빛 그림자


뒷걸음질 치는 바다 풍경을 지나
출근하는 길
섬 하나 나를 따라 옵니다.


건물 숲을 달리다 돌아보니
여전히 내 뒤를 따라오는 섬
일상 속에 나를 내려놓자
어느새 그림자가 된 섬이
앞서 걸어갑니다.


종일 내 곁을 맴돌던 섬이 묻네요.
어둠에 온전히 잠긴 바다를 본 일 있냐고
괴괴한 정적(靜寂)이 싫어
밤새워 바다를 휘젓고 다니는
파도 소리를 들어 보았냐고


바다에 뿌리내리지 못해
가을이면 그림자가 되어 떠돈다는 섬
밤새 출렁이던 우울을
혼자 감당하기 힘들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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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바다


동해 바다로 몰린
무게 중심이
잠시 휘청거리는 사이
붉게 타오르는 소망들
둥근 해를 밀어 올린다.


새해에는
허공을 떠도는
미아가 생기지 않게
그리하여 누군가의 눈물이
바다의 품으로 흘러드는 일 없도록
바다는, 길 잃은 소망 모두 거두어
물빛 갈매기 편에 띄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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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늪


한 겹 지우면
또 다른 얼굴로 고개 드는
나쁜 꿈
꿈이었다고 지독한 악몽이었다고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린다.


비로 내려 소복이 쌓인 어둠
출렁일 때마다
어제의 늪에 발목 잡힌 오늘이
녹슨 톱니바퀴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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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량 초과


가시 돋친 말들
가슴벽을 긁어대고
눈물을 삼킨 보랏빛 우울은
먹구름을 키운다.


감당할 수 없는 부피로
끓어오르는 화는
뿌연 증기 내뿜으며
철로 없는 길을 달린다.


용량을 알 수 없는
마음의 그릇
차고 넘칠 때마다, 되풀이되는
혼란과 무질서


차기 전에 비우라는데
너무 작아 비울 게 없는
내 마음의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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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열차가 경적을 울리고


썰물처럼 밀려가는 시간을
방관자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종착점을 알 수 없는 블랙홀에
승객을 떨구기도 한다는
생의 열차가 속도를 올립니다.
심한 현기증에 체머리 흔드는 나무들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흐르는 풍경 속에
내가 서 있네요.


그대여,
점점 더 차가워지는 나의 심장이
반기를 듭니다.
검은 사자에게 쫓기는 얼룩말처럼
쉼 없이 달려온 시간들을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고


그대는
한 해의 마감을 알리며 경적을 울려대지만
후회도 두려움도 다 벗어 놓고
심장의 울림에 귀 기울이며
풍경 속을 걸어갑니다.


아직은 낯선 풍경에 놀라
고양이 걸음으로 그대의 눈치를 보지만
불안에 떠는 나약한 배역은 이제 그만,
처진 어깨 곧게 펴고 당당하게 길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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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바람의 방향을 미리 읽은 풀들
나직이 눕는다.


밟힌 만큼 질긴 삶의 내력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고
길들여진 습관으로
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도
흘러가는 시간임을
풀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풀들
서로를 품어 주며 속삭인다.
영원히 머무는 바람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