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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3년 [수필-이은자]간고등어 한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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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갈뫼
댓글 0건 조회 3,286회 작성일 05-03-26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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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고등어를 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무슨 기억을 제일 먼저 떠올릴까?
간고등어는 우리들 식탁에 자주 오르지만 값이 크게 부담 주는 생선이
아니라서 만만하다. 동해안에서는 여러 종류의 생선이 잡히지만 겨울철엔
명태요 여름이면 고등어라 말하던 때가 있었다. 산간 벽지에 사는 사람도
고등어만은 다 아는 생선이다. 너무 흔해서 사뭇 홀대받기도 했다가 근자
에 와서 등 푸른 생선의 영양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접이 달라진 생선이
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하던 빈대떡이 오늘
날 인사동 같은 전통 음식점에서 비싸게 내 놓는 음식이 된 것처럼. 엄마
들이 어시장을 두세 바퀴 돌다가 그냥 갈 수 없다 싶을 때 으례 한 손 사
가는 간고등어는 얼마나 고마운 찬거리인가.
내가 어렸을 적에 맨발로 모래밭을 한참만 걸어도 발바닥이 델 지경이
고 일하는 등줄기며 사타구니에 시큼한 땀이 물같이 흐를 그 철에 고등어
는 지천으로 실려와 어판장에 부려졌다.
우리네 엄마와 누이들이 날렵한 손놀림으로 그것들의 배를 갈랐다. 아
가미부터 뱃속의 것들을 깡그리 긁어내고 대신 왕소금을 한줌 넣고는 댕
크에 던졌다. 어판장 한 쪽에 콘크리트로 만든 염장 댕크가 여러 개 있었
다. 댕크 안에서는 아버지와 아저씨들이 장화를 신고, 던져지는 고등어를
두 마리씩 짝 맞추어 포갠 다음 차곡차곡 놓고는 또 다시 삽으로 굵은 소
금을 뿌렸다. 뿌린다기 보다 소금에 묻는다.

<왜 씻지 않고 그냥 절일까?> 어렸을 적에 나는 그게 궁금했다.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날은 덥고 연한 살 깊은 생선은 물에 씻는 동안 낡아
버릴 것이다. 신선도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 겉물을 피하는 것이리라.
할복하는 품삯은 그 배속에서 나오는 애(수컷의 정액덩이)며 알을 갖는
것으로 한다. 아가미와 창자는 농사꾼들이 실어간다. 알과 애는 얼간하여
한나절 두었다가 석쇠에 얹어 구우면 훌륭한 반찬이 된다.
더러는 촌에 이고 가서 서속(黍粟)으로 바꿔 오기도 한다. 그맘때엔 촌
(산골)에서 우마차(牛馬車)가 젖은 풀과 재를 반쯤 담은 채 바닷가 마을
로 온다. 지금처럼 비닐이나 플라스틱, 알루미늄 박스가 없던 때라서 생선
내장에서 흐르는 핏물 같은 것을 풀과 잿가루에 엉기덩기 싣고 가는 것이
다. 아이들이 우마차 아저씨들을 기다린다. 오지단지 마구리를 열고 주걱
으로 퍼서 가랑잎에 담아 주는 둥글레 찜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에 담가
서 겨울을 넘기고 새 봄도 넘기며 곰삭은 그 둥굴레찜의 달고 향긋함. 둥
굴레, 도라지, 도토리, 더덕, 괴얌 그리고 이름 모를 열매와 풀뿌리…. 그것
들이 어우러져 곰삭은 맛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간고등어는 반드시 한 손이란 단위로 만 팔린다. 큰 것 하나와 작은 것
하나, 엄마와 아이 같기도 하고 부부 같기도 하고, 아무튼 한 손안에 잡는
다는 뜻이란다. 그래서 한마리씩 몫을 나눌 수가 없다.
간고등어하면 감자를 빼 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잘 어울리는 식품이다.
감자를 동굴 납작 썰어서 냄비 밑에 깔고 적당히 간을 뺀 고등어를 놓은
다음 매운맛 풋고추 홍고추를 얹어서 쪄내면 정말 밥도둑이다.
보릿고개 시절엔 올감자(이른)로 끼니를 때우려면 간 고등어와 열무김
치가 제격이었다.
간고등어를 제일로 맛있게 값나가게 먹을 줄 아는 안동사람들의 간고등
어 이야기를 유홍준선생 저서‘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제 3권 : 3∼4쪽
“니, 간고등어 머어 봤나?”를 정독해 본다.

헛제사 밥에는 간고등어가 성냥갑 반 만하게 썰어 나오는데 이것도 또한 안동
의 별미다. 본래 특산품이란 생산지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반대로 소비지가
역 창출하는 예외도 있다. 간고등어도 생산지는 별로 중요하지도 따지지도 않지
만 안동에 와서 많고, 또 안동시장에 와야 제맛 나는 것을 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안동은 내륙중의 내륙인지라 뱃길이 닿지 않아 냉동시
설이 없던 옛날에는 생선을 구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고등어에 굵은 왕소금을 잔
뜩 뿌려 절여서 가져와야 상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그렇게 만든 자반고등어는 짜
도 보통 짠 게 아니다. 그래도 이 간고등어는 안동사람들의 밑반찬으로 애용되어
반의 반 토막을 썰어 놓고 온 식구가 밥을 다 먹기도 한다.
전라도 음식으로 치자면 밥맛 돋우는 젓갈 구실도 하는 셈이다. 그 간고등어 중
에서도 뱃자반이라고 해서 배에서 금방 잡은 싱싱한 놈을 곧장 소금에 절인 것은
진짜 별미다. 대구에서는 이를 제자리간이라고 한다. 지금도 안동 장에서는 장바
구니에 뱃자반 간고등어를 한 손 사 가지고 걸음도 상쾌하게 돌아가는 할머니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 중 략 -
어려서부터 여기에 입맛을 길들인 안동 사람은 간고등어가 없으면 서운해하며
안동에만 틀어 박혀 산 아이들은, 생선은 간고등어 외엔 없는 줄로 알고 자란다.
그런 사람들은 안동 답답이 또는 안동 갑갑이 라고 한다. - 중 략 -
안동인의 기질. 체통을 아는 그 당대함과 대인다운 너그러움 그리고 절대로 기
가 죽지 않는 기개, “니, 간고등어 머어 봤나?”- 이 상 -
안동 간고등어는 이미 경쟁력 면에서 성공했다. 슈퍼마켓 진열대에 안
동 간고등어는 여느 간고등어의 두 세배 넘는 가격표를 달고 당당하게 얹
혀있다. 지금은 무엇이건 경쟁력에서 이겨야 살아 남을 수 있는데 그건 품
질의 차별화가 필수다. 안동 사람들의 뚝심이 그걸 지켜온 셈이다.
내 친구 중엔 자랑스럽고도 유별난 친구가 많다. 그 중에 별명이 돌감
자란 친구가 있다. 속초 도문에 사는 이 돌감자가 지난 겨울에 한 짓이 하

기막혔다. 눈이 펄펄 내리는 날 저녁, 서울 도림동 모 식당에 재경 속초고
교 7회 동창들이 모였다. 예순을 넘긴 남녀 고향 까마귀들은 전과 달리 술
도 약하고, 이차, 삼차는 엄두도 못 내고 현직에 있는 동창도 몇 있지만
거의가 은퇴한 처지라서 약간 시마리(힘이 빠졌다는 강원도 말)가 없다.
세상사 기죽어 가고 있다가도 이 자리에 오면 기가 살아, 떠들다 간다.
어지간히 시간이 흐르고 자리에서 하나 둘 일어설 즈음, 총무는 한 구
석에 밀쳐 놨던 박스를 무겁게 밀어오며 잠시만 기다리라 했다. 돌감자가
보낸 선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제 손에 비닐 봉지를 씌우더니 그 박스
를 열고 비린내나는 간고등어를 한 손씩 다른 비닐 봉지에 담았다. 그리
고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속초에서 돌감자가 보내온 것이라고… 동창들은
갑자기 술이 깼다.
40여년 서울 생활을 접고 나도 고향에 와서 첫 겨울을 보낸다. 고적한
내게 한 친구가 눈물이 밴 음성으로 전화해 준 내용이다.
돈으로 치자면 5천원쯤 되련만 벗님네들은 이 엄동에 길 막히는 대관령
재를 넘어온 간고등어 한 손씩 받아 들고 지하철 1∼8호선까지 흩어져 갔
을 게다. 대한민국 최고 브랜드가 즐비하게 진열된 강남역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갔을 게다. 서울 동창회 날 광경을 그려보며 나는 그 겨울이 너무
따스했었다. 간고등어 박스에 꾸부정하게 서서 한손 한손 봉지에 옮겨 담
는 총무 고선장(高船長)의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웃음이 나왔다. ‘캡틴
고, 그는 한때 원양 어선단에서 최고의 몸값으로 모셔 다니며 태평양을 누
빈 사람이다. 라스팔마스 때론 파고파고라는 스탬프가 찍힌 엽서를 보내
오던 사람이다. 그가 잡던 다랑어 참치는 보통 아이 몸집에서 때론 어른
몸집 한 생선인데 지금 그가 나누고 있는 고등어는 그 때의 낚시 한 코의
미끼에 불과하다. 그런 그가 꾸벅 꾸벅 간고등어 한 손씩 배분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며 웃음도 나고 격세지감이란 말도 생각나고. 내게 전화해
준 친구는 부연하기를, 간고등어를 담은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집에 오

면서 자꾸만 눈물이 핑 돌더라고 이튿날 구워 먹었는데 그렇게 맛난 간고
등어는 참 오랜만에 먹었노라고…
내 친구 돌감자는 대림산업 기사로 있을 때 사재를 털어 작게 나마 시
작한 장학회의 이름이 돌감자라서 붙은 이름이다. 서울시민상도 받았다.
공직을 마치고 이제는 고향 도문동에 와서 고향 마을 사람과 장학 사업만
전념하고 산다. 강원도 사람은 본래 감자바위로 불린다. 그 이름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가. 감자 중에 돌감자는 눈이 우묵우묵 들어가고 모양도 들
쑥 날쑥, 잘고 맛도 없어서 뚱딴지 감자처럼 짐승의 밥으로나 심을까?
하필 돌감자 장학회냐. 내 짐작이지만 친구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겸손의 자세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아무튼 지난 겨울에 우리의 돌감
자가 한 일이야 말로 그 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겨울이 가면 봄은 꼭 온다. 감자 꽃이 피고 지면 고등어 떼도 몰려온다.
내 친구 돌감자도 피고 지고 또 피고 지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