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호2018년 [시] 봄을 읽다 외 3편 / 송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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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으로 무늬를 놓은 나무
잎잎에 새겨진 곡진한 사연을
읽기도 전에 드러나는
뚝 뚝 떨어지는 문맥들
부끄럽다 나의 가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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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읽다
겨울 벗은 나무들이
봉긋한 촉 내밀어 연둣빛 행간에
저마다의 얘기를 쓰고 있다
해마다 오는 봄이지만
보낸 봄들의 두께는 사뭇 다르다
돌아보지 않아도 멀어진 길
쉼표도 없이 써 내려간 연록의 시간은
어느 페이지에 적혀 있을까
행과 연도 없이
빼곡하게 기록한 날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다시 읽는 봄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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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호상
계절의 끝에서
다소곳한 장례를 치르는
나뭇잎의 소리
끝물로 야위워가는 꽃들
조문하듯 머리를 숙였다
어디 한 곳 흐트러짐 없이
정갈하게 생을 닫으니
꽃으로는 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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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처음엔
물소리 바람 소리로 오더니
풀 먹인 옷깃이
사각거림을 데려왔고
차마 안부를 묻지 못해
봉인해둔 그리움은
인연 깊은 소금강에
떠다니는 나뭇잎 소리로 왔다
귀가 얇은 탓에
말이란 말 죄다 주워들어
이석도 버거운데
푸르른 날도
한참이나 지난 지금
아직 들어야 할 세상 소리가 남아
수시로 타전하는 의문의 암호를
도무지 해독할 수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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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앞에서
오락가락 비를 뿌리며
그토록 사납던 팔월은 그렇게 가고
여름을 지독히도 울어대던
풀벌레들은 어디로 갔는지
조석으로 느끼는 서늘함이
가을 넘어온 연륜이다
내 푸르러 한창 물오른
그만큼에서 품고 싶었던
뜨거운 열정도 삭인 지 오래
애써 밀봉해둔 말들은
계절 속에 넣어 두고
긴 날을 견뎌낸
푸석한 머리칼에
생의 한 획을 묻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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