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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2018년 [시] 무례한 쉼표 외 9편 / 최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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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67회 작성일 18-12-30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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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더위에 지칠 무렵
누군가 창틈에다
귀뚜라미 소리와
바람 몇 잎 슬쩍 꽂아두고 갔습니다.
쓰윽 건네는 그 마음처럼
세상을 좀 더 그윽하게 바라보는 눈,
그 눈으로 읽은 시를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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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쉼표


얼마나 더 기다리면 꼬리에 피가 돌까


날은 점점 저물고 풍랑 이는데


막막한 생의 난바다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동력 잃은 어느 가장의 기약 없는 무급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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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두


김장하고 남은 파를 화분에 심었다
잘라먹어도 금방 자라는 초록 기둥
몇 번을 잘랐을까
상처를 말라 붙인 채 자람을 멈춘 파


비스듬히 누워 있는 파를 뿌리째 뽑는다
어둡고 습한 땅속에
질기디질긴 거죽만 걸친 텅 빈 속


토실토실 살 오른 자식들 곁에
자주 어지럽다 누우시던
병약한 어머니가 거기 계셨다


가진 것 다 주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내던 어머니


요양원 한편에서 주무시다가
혼자 떠난 하늘길이 내내 섭섭했는지
꿈도 아닌 세상 속에 샛길을 내고
이렇게 가끔 딸 집에 들르시곤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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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시계


쓰레기장에 버려진 벽시계 하나
사망 시간을 가슴에 적어 놓고
편안하게 누워 있다


소요를 물리고
낙관처럼 찍은 생의 끝점
어떤 죽음이 저렇게 간결할 수 있을까


제 생의 마지막을
질척하게 토해내는 물컹한 것들 곁에
꽃 피우듯 피워낸 서늘한 고요


모래시계 돌리듯 돌려놓으면
심장이 다시 뛸 것만 같아
한 걸음 다가서다 되돌아선다


그가 택한 건
죽음이 아니라 자유일 것 같아서
소리를 빠져나온
또 다른 세상의 고요일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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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보기 한 컷


할머니 한 분 건널목을 건넌다
신호는 이미 바뀌었는데 아직 길 가운데다


대기 중이던 차 안에서
천천히 건너시라고 손짓을 하자
청년 하나 달려가 할머니를 부축한다


안도의 마음으로 지켜보는데
할머니의 얼굴과
무럭무럭 늙어가는 내가 겹쳐 보인다


애써 도리질 하며
아직은 시야 밖이다, 마음 달래보지만
몇 구비 돌면 만나게 될
내 생의 미리 보기


그것은 이미 시야 안에 들어온
반사경 속의 한 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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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부처


돌 하나를 잃어버렸다
부처를 닮아 늘 가방에 넣고 다니던
믿음의 돌


수호신이 곁을 떠난 것 같아
마음 쓰이던 어느 날
집 앞 언덕을 막 내려서는데
폐지를 가득 싣고 올라오는 할아버지
그날따라 리듬 타듯 발걸음이 가벼웠다


비켜서며 돌아다보니
책가방을 멘 남학생이
땀에 젖은 채 리어카를 밀고 있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 겨?*


내 곁을 떠난 돌이 산부처 되어
할아버지 생의 가파른 언덕을
온몸으로 한 삽 한 삽 고르고 있었다


✽ 2002년 MBC <느낌표>를 통해 좋은 책으로 선정되었던 소설가 전우익의 책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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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4월


수선화가 쓰러졌다
일으켜 세워도 다시 쓰러진다


꺾인 허리를 지지대에 묶으면서
가만히 말했다
오래 누워 있으면 욕창이 생긴단다


맨몸으로 견디었을 맹골도 검은 물속
그 마음 너 모르고 난들 모르겠냐만
무시로 젓는 고갯짓
아직도 차오르는 바닷물이 보이느냐


너는 죽어간 꽃들의 또 다른 이름,
살아와서 고맙다
살아줘서 고맙다


꽃비 날리는 사월은 다시 왔지만
내 아픔으로는 아무것도 대신할 수가 없어
네 피로
네 살로
세상 향해 밝힌 노란색 조등


잊힐까
물먹은 내 눈에 꾹꾹 눌러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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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꼿꼿하게 등 세운 1월이 왔다
새해 새 달이라고 복을 비는 사람들
하지만 그에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분배할 시간 외에
줄 것이 없다
모두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징검돌
걸어가든 뛰어가든 마음대로지만
건너뛸 수는 없다
희망도 절망도 각자의 몫이다
무심히 흘러가는 게 시간 같지만
시간은 매시가 그의 한평생이다
누군가의 평생을 공짜로 쓴다는 것만큼
어렵고 두려운 일이 있겠는가
지금은 살아 있는 나의 가장 젊은 시간
정갈하게 오신 1월 앞에 마주 서서
정중하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
잘해보자, 잘 해보자
그의 평생에 나를
내 생에 그를 담대하게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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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청호동


반세기 넘게 흔들리는 반도의 땅이 있다


가리라, 가리라 몇 년이던가
망향가도 목이 쉰 아바이 마을


오징어도 명태도 고향으로 갔는지
빈 덕장엔 바람만 오가는데
가고 싶다, 고향에 가고 싶다
날마다 보채는 다섯 살 아버지를
갯배에 태워 달랬다는 칠순의 아들
실향을 울던 아버지는 고향에 잘 도착했는지


사투리를 벗어버린 청호동에서
문득 내가 섬이 되는 눅눅한 오후


눈이 먼저 읽은 낯선 풍경 뒤로하고
선착장으로 난 길을 무겁게 끌고 갈 때
어디선가 들리는 끝물 같은 망향가


바다 쪽으로 귀를 세운 작은 창 앞에 서서
취기 서린 소리 하나 비문처럼 받아 읽고
닻 내린 갯배의 쇠줄을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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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수


석 달째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자
하루 건너 급수가 시작되었다


아이들 나가고 두 사람 남았으니
사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지만
흐를 게 없다는 말이 그저 아팠다


막혀서 흐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비어서 흐르지 못한다는 말
그러나 산다는 건 비우고 채우는 일
누군들 빈 세월 건너보지 않았으랴


조급해 말자
복수초 눈 뜬 이제 봄이다
가파른 언덕
끊어진 길 찾으며 꽃들 오는 중이고
꽃 오면 그 길 달려 봄비 올 테니


하루를 자더라도 편하게 자라
열어 놓은 수도꼭지를 꼭 잠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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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력밥솥을 읽다


꼭지가 돌면
세상 보이는 게 없다지만
꼭지가 돌아야
세상이 바로 보이는 밥솥이 있다


열리려는 힘과
열리지 않으려는 힘이 빚는
상충의 공간 속에
밥으로 다시 사는 거룩한 반전


단단함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나는 잘 모른다
다만
거칠게 내뱉는 단내 나는 숨소리와
잦아드는 평온 속에
필요한 만큼만 채우고 버리는 힘


그 한 줄만 제대로 읽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