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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2018년 [시] 2018 청호동 외 9편 / 김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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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77회 작성일 18-12-3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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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들, 새로운 나무와 꽃들과 풍경들
살아가면서 점점 더 아름다운 만남이 계속되는데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확률적으로 적어진다는 것은 무척 쓸쓸한 일이다.
그래서 더 생명, 사람, 자연, 시간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가 보다.
사랑한다. 적어도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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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청호동


멀리서 온 사람들 청호동에 차를 세우고
낮고 현란한 간판 속으로 들어간다
아바이순대, 오징어순대, 순대국밥…
자판기 커피 컵 하나씩 들고나오면
그제서야 저마다의 언어로 들려오는
아바이 파도 소리
명태 오징어 잡으며 버티던 귀향의 꿈
그 상처 위로 덧칠되어 가는
그저 속초 관광지 아바이마을


가을동화 은서네 가게에서 기념품을 사고
왕복 사백 원 하는
5구 도선장 멍텅구리 갯배를 타면
삼분도 안 되어 떠나오는 청호동


양손에 닭강정 박스를 든 사람들 몰려나오는
속초 중앙동 시장 입구
로데오 거리 황소 동상 앞에서
이제 막 갯배로 건너온 한 사람이 묻는다
‘여기가 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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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간다


달이 간다
수많은 별들에게 스쳐 베인 상처
혼자 여미며
단 한 곳을 바라볼 뿐
제 길을 간다
여위다 여위다 사라질 즈음이면
다시 힘내어 돋아나는 살


나도 간다
붉은 상처들 싸매며
혼자 내 길을 간다
기억 없는 무릎의 흔적들처럼
잊자 잊자 하며 가다 보면
울다 웃다
꽃도 보고 나비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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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을 찍다


사진기를 들고 가까이 다가갈 때
얼굴이 더 붉어지다
저도 살짝 웃어주었다


찰칵 소리 듣고 파르르 놀라다
시침 떼고 다시 도도해지는
붉은 모란


돌아서면서
나도 얼굴이 뜨거워졌다


붉은 모란은 여전히 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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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치 바닷가 조약돌


상처 없이 다녀가는 생명이 있던가


둔전리 향산폭포 석교리 지나
땅끝 바닷가
모서리 다 떼어내고
물치천*이 내어 준 조약돌


민물과 바닷물의 경계에서
얼마나 더 부대끼어야
저 바닷속
깊이 가라앉는 모래가 되는 것일까
더 멀리 사라지는
흔적이 되는 것일까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던 세상
짙푸른 숲 바람의 향을 기억할 동안
아직은
야문 조약돌의 노래를 부를 때이다


✽ 물치천[沕淄川]: 길이 14.74km, 유역면적 37.10km2이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둔전리에 이르러 향산폭포(香山瀑布)를 이루고 다시 석교리(石橋里)를 지나서 물치 남쪽에서 동해로 흘러든다. 물치란 이름의 ‘물(沕)’은 물에 잠긴다는 뜻이고, ‘치(淄)’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송시열(宋時烈)이 이곳을 지나다 물에 잠긴 이 마을에서 길이 막혔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두산백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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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강 물고기 풍경


누구의 슬픈 눈물을 묻혀 와
어깨에 손을 닦는가


긴 강 지나온 바람 옷자락
물고기 풍경을 지나기 시작했다
평생을 꿈꾸던 물살


바람 강 물소리보다
더 슬픈 노래를 들은 적 있는가


물고기 한 마리
푸른 물살 거슬러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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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날의 낮잠


잠이 잘 오지 않아
며칠째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
마른 눈은 붉어 아프고
낮잠도 오지 않는다


단잠이 그립다


저녁 햇살이
칸칸이 지나가는 대청마루
마른 빨래 접는 엄마 옆에서
이마가 따뜻했던
어린 날의 낮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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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민들레 씨앗들 바람 타고 날아
서로 다 헤어진 어느 산 아래


언 땅 녹은 봄
저 혼자 피어나 불러 보는 말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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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야


너무 오래 돌아서 어지럽지?


그럴 땐
반대편으로 한 번 돌아봐


그럼 덜 어지럽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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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상 항아리


아직 제소리 맑다
함양 외가에서 얻어 온 오래된 항아리
만질수록 투박하고 정겹다
수없이 담고 비워 냈을 깊은 속내


흙 채워 꽃을 심을까
물 담아 거실에 들일까 하다
뚜껑 뒤집어 얹고
의자 옆에 두니 찻상으로 곱다


유자차 올려놓은 항아리 옆
햇살 의자에 앉으신 친정어머니
처녀 적 외할머니 곁이신 양
낯빛 저리 밝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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휙!


어느 별이 피고 지는지
서로 부대끼며
오늘 하루도 살아 낸 사람들


바람이 지나가며 설핏 주고 간 소리
휙!


이웃들에게
인사도 웃음도 다 나누지 못한 채
나도 지금 지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