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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2018년 [시] 흔적 외 9편 / 김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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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1,233회 작성일 18-12-30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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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규칙 같은 삶을 살다
이제 다시 자유로운 것 같으나
조금은 허망한 것도 같은
세 번째의 길에 들어섰다
머피의 법칙이 더 많은 삶에
때론 샐리의 법칙도 일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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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비 그친 아침
골목길 처마 밑


빈 소주병 옆
바나나 껍질 한 개
초코파이 봉지 하나
담배꽁초 둘


어느 가난한 생이
남기고 간


절실한
그래서 더 아픈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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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술


바람 부는 길가
낮술에 취해 주저앉은 사내
가로등 기둥을 부여 안고
일어나려고
다시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쓴다


평생 발목을 잡아 온
고된 노동과
내일이 보이지 않는
버거운 삶이
바짓가랑이에 걸려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고
낡고 헤진 바지를 걸레 삼아
더러워진 세상을 닦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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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친 뒤


시나브로
종일 내리는 봄비에
이틀 동안
지구를 환히 밝히던
벚꽃등
지는 모습만 아쉬워했더니


비 그친 다음 날


세상이
더 푸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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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바위


고동 따개비 거북손 말미잘
청각 지누아리 미역 고르메


모두가 붙어산다


나이든 할머니
물질하는 해녀
바닷가 사람들도
평생 물에 불은 채


그들 곁에 붙어산다


나도
당신 등 뒤
어디쯤엔가


딱 붙어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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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널 온몸으로 받아들였는데
어떻게 안 변하니


처음엔 그냥 좋았어
시간이 지날수록
만남이 잦을수록
시나브로 빠져 버렸어


지금의 넌
헤어날 수 없는 뻘밭
아니 검은 거미의 덫이 되었지


널 볼 때마다 생각해
다시는 보지 말자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
이룰 수 없는 일이어서
어쩜 더 간절한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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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을 깁다


햇살 좋은 오후
모래기 항
물양장 그늘막 아래
그물 터는 부부


날마다 풍경화로 남는다


채우지 못한 수족관과
더딘 일손을
더욱 지치게 하는
해파리와 바다풀을 뜯어내며
소주 한잔 털어 넣고


터져버린 오늘과
새어나간 내일을
날마다
다시 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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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되풀이되는 것들과
이어지는 것들이
열차의 꼬리등처럼
터널 속으로 사라진다


점은 선으로
선은 면으로
날마다 일어서는
하루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사차원의 도형으로
매일 매일
허물어지는


오늘
또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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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우물


동네 한가운데
이제는 묻혀 버린 우물 하나
머릿속에
또렷이 살아 있습니다.


한겨울에
퍼올려진 샘물은
참으로 따스했습니다


오랜 가뭄에도
결코 마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당신도
언제나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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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젓갈


오래될수록 좋다
곰삭을수록 좋다
적당히 짭조름해야 좋다


누군가 좋아해 줘야
마침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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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生


기다릴 수 없었던 부고장과
받고 싶지 않았던 청첩장처럼


사는 일은 늘
머피의 법칙으로 끝나곤 했다


샐리의 법칙이
일어날 것 같지 않는
내 삶은
마이너스 통장의 잔고처럼
늘 아슬아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