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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2018년 [시] 검은 바람 외 9편 / 권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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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89회 작성일 18-12-30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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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유월, 담양 죽녹원엘 갔다. 내 안의 서걱이고 있던 대나무들을 그곳에서 만났다. 빛의 속도로 자라던 초록 장대비들이 함성을 지르며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바람이 머리칼을 쓸고 지나갈 때 초록 피를 수혈받았다. 순간 잃어버렸던 나를 찾은듯 ‘초록빛’ 그 싱그러운 영감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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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람


펄럭, 목발 짚은 바람이
대문 안에 들어선다
쾡한 눈빛으로 아침밥 좀 달란다
넝마 위에 걸친 군용 도시락 안엔
몇 집에서 얻은 동냥밥이
삐죽이 고개를 내민다


밥이 그리워 떠돈다는, 저 검은 바람


산발한 머리는 겨울 들판
마른 꽃처럼 흔들리고
오른쪽 바짓단에 갇혀 있던 비명이
제 혼자 펄럭거리며 드나든다


총탄이 비처럼 쏟아지던 날
오른쪽 다리는 산비탈 떡갈나무 아래
두고 왔다는 저 검은 바람
겨울 아침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피비린내 나던 전쟁을
아침 햇살에 비벼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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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초호 야경, 2
- 만장(輓章)


산천을 으깨던 포성 소리
삼일 후면 돌아간다던 눈보라길
칠십 년 세월 두고 온 얼굴들
청초 호숫가
상사화로 피어나는데


나 이제 이승을 하직한다
칠성판에 누워서 듣는
상여꾼 소리 매김에 주체할 수 없는 눈물
가슴이 미어진다


요령 소리 앞세우고
꽃상여 타고 떠나는 길
어머니 손 놓고 돌아서던
고향 집 마당에서
노제라도 지내고 싶구나


내 불쌍한 영혼을 위해
한밤중, 청초호* 검은 물결 위로
오색 만장(輓章)이 펄럭이며
황천길 나를 배웅하고 있구나.


✽청초호: 함경도 실향민이 모여 사는 속초 청호동에 있는 호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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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도 상처가 있다


둥글고 환한 달을 올려다본다
거무스름한 무늬가 있다


세찬 바람, 천둥 번개가
달을 치고 지나갔다고도 하고
저희끼리 떠돌던 혹성이 달에
부딪친 자리라고도 한다


때론 달도
주변 때문에 마음 다치고
속앓이 하나 보다. 나처럼


세상을 향해 빛을 뿜어내는
수월 관음보살도
상처를 안으로 삭이고
허공에서 미소 지으며
사람들 마음을 쓰다듬고 있는데


문득
올려다본 달에도 상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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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프러스 나무 아래서


친정집 울타리는
키 큰 측백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지엄한 가문의 뿌리는 땅속 깊숙이 내리고
오래된 영혼들은
하늘로 푸르게 오르길 소망했나 보다


알함브라 궁전을 지켜온 사이프러스 나무*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삭여온
묵은 울음들이 서슬 푸른 영혼이 되어
붉은 궁전을 다스리고 있다


윗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가문의 뿌리를 위해 심어 놓았다는
친정집 앞마당
오래된 측백나무 밑동이
해마다 빛을 더 하고 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던
종족들의 오랜 울음이
우렁우렁 허공을 흔들고 있다.


✽ 사이프러스 나무 : 아시아ㆍ유럽ㆍ북아메리카의 온화한 기후대와 아열대지방에 널리 분포해 있는 측백나뭇과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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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으로 오시는 이


백자 밥사발 한 벌 준비했다
뚜껑 열자 그 안에
아버지 환히 웃고 계신다


음력 구월 보름
천천히 달빛으로 오시는 이
백자 밥그릇에 이팝 꽃 한 다발 담아
잔 올리며 절한다


갓 서른에 세상 뜨신 아버지와
오십 대 딸이 마주 본다
낯이 선 듯 말이 없다
짧았던 이승 인연 기억할지 몰라
늦은 밤 소지 올리며 바라본 하늘
보름달이 창창하다


달빛으로 오셨다가 달빛으로 가신 이


드시던 밥그릇 뚜껑 열자
이팝 꽃 눈물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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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에서 나를 잃어버렸다


초록 장대비가
머리칼을 쓸며 지나간다


내 안에 서걱이고 있던
무성한 대나무들이
죽비 되어 등을 후려친다
곧은 생을 위해 마디마다
웅성거리는 저 공명의 소리


죽녹원* 선비의 길, 운수대통 길
철학자의 길, 세 갈래 길에서
문득, 나를 잃어버렸다
카랑카랑 허공을 흔드는 바람 소리
일생의 단 한 번 꽃피움
그 황홀한 자멸을 위해
힘 빼라 가벼워져라 외치며
층층 내 앞을 막아서는 대숲들


하늘을 뚫듯 무량무량
빛의 속도로 자라는 장대비들
그 곁에서 말갛게 나를 비우며
초록 피를 수혈 받고 있다.


✽죽녹원 : 담양에 있는 대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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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발을 읽다


빈 사발 안에 잿빛 하늘이 떠가고
여울물이 몰아친다
고요가 팽창하여 실금이 간
허기진 얼굴 하나
연단 같은 가슴을 빠져나온
오래 삭힌 결 고운 바람이다
불 땡볕 밭고랑에 엎드려 있던
유적지 할머니 얼굴이다


짚불로 번지는 노을 한 자락 당기며
막 사발 안에서 자라던
들풀 같은 시간들
눈이 짓무르도록 바라보던 얼굴
이빨 빠진 종갓집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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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탑이 자란다


누군가 가슴 속 불덩이 하나씩
돌 위에 얹어 놓고 떠났다
홀로 자란 기도가 속울음 되어
연꽃으로 벙그는
초여름 산길


한때 나도 경전 같은
돌덩이 하나씩 머리에 이고
낙엽송 우거진 산길에서
오체투지, 웅크린 새가 되어
부화를 꿈꾼 적이 있다


기원의 씨앗들이 불씨로 번지는
시방정토, 바람 부는 숲길
날개 퍼덕이며
우렁우렁 돌탑들이 자라고 있다


아랫돌은 윗돌을 받들고
윗돌은 아랫돌을 품으며
허공 끝
인드라망을 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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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버섯을 씻으며


흰색 실들이 가닥가닥
물속에서 풀어진다


스물넷에 혼자된 할머니는
뭉쳐 있던 가슴 속 한을
목화솜 틀어 실로 뽑아내곤 했다
시집올 때 무명 실타래를
반짇고리 안에 넣어 주며
실타래처럼 둘이 해로하라고 하셨다
결 고운 흰색 실꾸리가 수십 년
반짇고리 안에서 곤하게 누워 있다


팽이버섯이 물속에서 흔들린다
물레질하던 할머니 손이 허공에서
원을 그리듯 흔들리고
아픈 생이
가닥가닥 실이 되어 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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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이 내려지다


잡고 있던 끈을 놓아버렸다
삶의 헛헛함을 벗어나듯


영혼의 즙을 짜내던
뜨겁고도 빛나던 간판이었는데
눈인사도 없이 생을 내려놓았다


환하게 손님을 맞던 자리에
조문 온 바람만 비틀거리고
어깨가 아프도록 매달려 있던
가파른 등 뒤로
깊고 수북하던 삶의 못 자국들


깃발처럼 푸르던 간판이 사라졌다
12월 달력이 내려지듯
짧았던 生이 그림자처럼
긴 꼬리를 벽 뒤로 감추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