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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2018년 [시] 11월 편지 외 9편 / 채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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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46회 작성일 18-12-31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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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병은, 쓰게 한다,
더 절절해지겠다.
주름을 들여다보다 꽃을 찾아낸다.
나를 살려야 한다.
새 잎이 돋아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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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편지


꽃에 연연해 하지 않지 않겠습니다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기억하겠습니다
오늘을 맞이할 수 있는 것에 설레겠습니다
하나 더 먹겠다고 욕심부리지 않겠습니다
내일 걱정에 잠 못 이루지 않겠습니다
완벽한 하루에 얽매이지 않겠습니다
젊음을 부러워하며 세월 보내지 않겠습니다
병에게 나를 내주며 울지 않겠습니다
훈수 들지 않겠습니다
매일 여행 떠날 준비로 두근거리며 살겠습니다
이 세상 떠나는 날 나를 대신할 시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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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바위 2


네 안으로 가는 길
위태로운 행로인 줄 알면서도
마음은 자꾸만 내달리고


오랜 고독이 모여
한순간 집중!


왈칵 쏟아내는 순간
너에게 각인된 찬란


천둥의 누설 후
줄기차게 떠도는 소문
매미 소리 왁자해졌다


해후는 짧고, 다음은 멀어


사랑,
네 이름 앞에 내 이름을 얹은 것
나의 이름으로 너를 호명하는 일
네가 영락없는 나를 하염없이 살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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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툭,


놓고 그저 바라봐요
마당 가에 감나무 바라보듯
먼 산마루 바라보듯
붙잡지 말고 가만히


피라미처럼 이리저리 몰리느라
나는 나의 바깥이었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간 일,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머물러
볶고 지지느라 잠 못 이뤘지요


허공 향해 문 열고 바라보면
시방에 다다르고
비로소 고요가 곁으로 온다는데


가파른 마음
잠시 내려놓고
지금 내뱉으려고 한 말
저만치 놓아두고
올라오는 것들을 그냥, 바라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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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소금


갓 따온 복숭아에
복사꽃소금 묻어왔다


점, 점, 점 번지는 발그레한 복숭아뺨 사이로
도화염전* 펼쳐지고
타르쵸* 나부낀다


한때 바람을 키우던 과원
서로를 알아본 복사꽃들이 토닥이며
소금꽃으로 피어나고
수척한 날들 복사꽃밭 가득하다
맨발인 마음으로 걸어온 무수한 날들이 붉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곳
이제 복사꽃 필 때
먹먹한 순간
매일 기도할 곳이 생겼다


✽복사꽃 필 때 거두어들이는 소금이 있는 밭
✽죽은 자를 위한 바람의 깃발(헝겊쪼가리에 적힌 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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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인


윗날개 비비며 연애시 읊는 귀뚜라미
뒷다리로 날개 가장자릴 긁으며
화려한 서정시 쓰는 여치


좀 요란한 시를 쓰는 편인 매미가
큰 소리로 시 낭송하는 통에
사랑을 마련해야 할 여름이 왔음을 눈치채곤 하지
개구리는 주머니 가득 공기 들이마셨다가
서서히 내뿜는 사랑시로 온 들판 처자들 후끈하네
매미, 개구리는 단독 시 낭송보다 합동 낭송을 즐기는 편


봄날이면 저마다 목청을 가다듬어
세레나데 부르는 숫새는 다 영락없는 시인
암나방은 유별난 시인으로 이름나 있다네
그녀의 가냘픈 시를 아주 먼 곳에서 들으려고
기막히게 발달된 안테나 달고 있는 수나방
곧 절판될 거라는 소문에 안달 난 수나방의 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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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파우스트를 팔십이 세에 완성한 괴테
팔십에 오페라 팔스타프를 작곡한 베르디
성 베드로 대성전 돔을 나이 칠십에 완성한 미켈란젤로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빛난다


후반생 지점에서 명작을 만든 신명
신은 우리 마음에 있다
신바람으로 나뭇잎 반짝인다


아직, 현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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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이라는 말


지금을 끌어다 놓으면 높은 산이 되겠지
바위산이 될지도 몰라
지나온 하루를 데려다 놓으면 흐르는 강물이 되겠지
제법 소리를 내며 반짝이며 흘러가는


봄과 여름 사이
누구도 이곳에 들면 빠져나갈 수 없는
중얼중얼대며 걷다 보면
가보지 못한 길이 궁금해 자꾸 걷게 되지
배후를 눈치채기 전까지
무궁무궁 혈색이 돌고 돌거야
필사적으로


두고 온 것이 있는지 뒤돌아보며 걷는 이 길
가야 할 곳이 있다고 걷고 또 걷는 진창길
수척해진 마음 위로하듯 내다 건 영원이라는 말
햇살과 바람 사이로
등불을 켜든 저녁이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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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네 이름으로 전화가 울려
평소와 다름없이
‘안녕’ 인사를 건넸지만
묵묵부답
잠시 후 네 딸이 전해온 부고
그 순간
오래전 너와 함께 걷던 대숲 바람이 불어왔지


정말 너는 사라진 것인지
화인으로 찍힌 걸음걸음
구름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고
앞뜰 나뭇가지에 새 한 마리 눈알이 빨갛다


아픈 몸으로 늘 먼저 안부를 물어왔는데
이제 누가 내 안부 물어주나
마지막 순간 아득히 정신을 놓기 전
네가 생각한 것은 뭘까
네 눈길이 머문 곳은 어딜까
그 길로 가기까지 남은 힘을 다 써버린
대나무꽃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세상은 소란스러워질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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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이 눈보라를 뚫고 기어코 가야 할 곳 있네
길인지 나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눈 오는 밤길
눈발이 화살처럼 내 눈을 향해 퍼붓는데
홀로 눈보라 속을 달려가네
눈구덩이에 빠진 마음은 꽁꽁 얼고 있는데
들이치는 눈보라 맞으며
좀체 그칠 기미 없는 이 한밤을 가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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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 달래려 살풋 얹은 왼손


오른손을 달래는 왼손
스스로를 달래는
최선 혹은 최소의 위로
자신에게 기대는
누구의 위로도 그다음일 수밖에 없는
무던히도 다치고 다쳐서 귀가하는 날들
마음을 다쳐 몸까지 욱신거리는
얽힌 문제로 긴 밤 지새는 동안에도
오른손 달래려고 살풋 얹은 왼손
다독이며 기도할 수밖에 없음을 아는 자의
말할 수 없는 아픔 이겨내는 꾹 다문
저 두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