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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2018년 [시] 층층나무 외 9편 / 장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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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20회 작성일 18-12-3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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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색다른 여행을 했지요. 이스라엘 성지순례와 갈뫼 제주기행, 추석 연휴를 이용해 인도네시아 의료선교회 봉사에 참여해 보았습니다. 변산반도에 위치한 연수원에서 은퇴 설계 교육도 받았습니다. 멋진 경치도 보았지만 저의 내면 풍경을 들여다보는 여행을 하느라 애썼습니다.
이제 남은 앞날을 어떻게 살 것인가? 나의 사명은 무엇일까? 어려운 문제를 많은 이들과 즐겁게 나누며 풀어보려 했습니다.
교육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묶어 시집으로 내려던 연초의 계획은 내년으로 미루게 되었지만 내년엔 지금과 다른 상황에서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나름 기대가 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감사하며 또 늘 깨어 떨리게 함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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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층나무


어느 봄날 산비탈에서 만난
층층나무 한 그루
기대를 거름 삼아 옮겨 심었는데
어느 날 거목으로 자란 층층 사다리
무너져 수풀 속에 누워 있었네


보기에 아름답고 먹으면 약이 되는
남다른 정원수를 무엇이 베었을까
하늘로 가는 계단을 질투한
계곡의 고요였을까
변화 없는 일상 지루함의 칼이었을까


하늘과 땅 사이 누구를
무엇을 올리기 위하여
그대는 잠시나마 존재했을까
우리는 모두 무엇을 이루기 위해
어떤 불쏘시개 되기 위해
이 한 많은 세상에 잠시나마
머물다 떠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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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 아래에서


굵은 빗방울이 호박잎 때린다
튀어 오른 자잘한 물방울
주변 꽃대를 치고
꽃송이들 일제히 전율한다
그 힘으로 옥수수 대궁이 굵어지고
서둘러 열매가 들고
지상의 지느러미들 날아오른다


배고픈 하늘이 자꾸
구름빵을 만들어 먹고
나무들 바람의 손 잡고 춤춘다
입술에 침을 바르는 뿌리들
출출해진 나는
멀리 떠난 새들에게
만나자고 문자를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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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무엇이든 볼 수 있다는 건
진짜 중요한 걸 볼 수 없다는 것
마음으로 볼 수 있다는 건
귀로도 코로도 볼 수 있다는 것
그렇게 그대 영혼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말했나
사랑의 눈길만 있고
눈물이 없었다면
얼마나 메말랐을까
세상 얼마나 삭막했을까
눈물 같은 비 내리고
빗물처럼 눈물 쏟아지는 감격


그대 맘속에 들어
그대 슬픔 아픔 녹여내어
영롱하게 맺히는 눈물방울 되었으면
흐르다 흐느끼다
폭풍처럼 터지는
활화산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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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좋아하여 항상 생각하며 사는 말씀이지만
항상 기뻐하는 일 가장 어렵습니다


쉬지 않는 기도와 어떤 경우에라도
감사함으로 받는 마음 없이는
어찌 항상 기뻐할 수가 있을까요
변덕스런 날씨 같은 내 마음을
나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은데요


갈라지고 서로 믿지 못하고
모든 게 두렵고 불안한 세상에서
얼굴 근육 펴고 마음 자락 볕 잘 드는
양지 마당에 펴 놓고 웃어봅니다
아랫배 힘주어 소리 내어 하하하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바울 선생님 가르침 따라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주 감사하며
해야 할 사명 뭘까 생각하며
힘들 때마다 마음 시계를 쾌청에 맞추고
기뻐 울고 기뻐 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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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4월


솔방울에서 부화한 새끼 소나무
아주 어릴 땐 솔 껍질 모자를 쓰고 있더니
꽤 의젓한 보득솔로 자랐다


옆에 선 참나무들 햇볕 다퉈 키 키우고
뿌리를 깊이 박은 아카시아도 날카로운 가시들 세웠다
개암나무 잡목들 사이론 추억처럼
희고 둥근 번데기 집도 보인다
듬성듬성 가녀린 진달래꽃 무더기
생강나무 노랑꽃들 나비처럼 파닥인다


몇 일 전 꽃샘추위에 눈까지 맞았는데
좀 떨어져 바라보니 버드나무가 연초록이다
겨우내 누르스름하던 밭 둔덕이 푸르게 변하고
양지 녘 백목련이 하얗게 웃는다
눈여겨보니 낙엽송 가지들도 물기가 촉촉하다


사는 일 어지럽고
사람들 죽어가는 흉흉한 세상에
풀들이 일제히 머리를 세우고 쑥쑥 올라온다
방긋방긋 웃으며 꽃이 피어나고
푸근하고 둥근 산이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기적이다 기적이다 기적이다
어김없이 오시는 봄 이 다 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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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교실
- 오냐오냐 교육


어느새부터인가 이 나라엔
오냐오냐가 교육철학이 되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을
너무 과신해서일까 확대해석해서일까
고3 수험생 있는 집에선
온 식구들 숨소리도 죽여야 하는 게
상식이 되었다 그저 공부만 해라
모든 거 참아 주마 오냐오냐
일류대 입학이 지상목표가 되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잘못한 아이 크게 야단도 못 친다
학생 인권 존중하느라 속앓이가 늘었다
아이들 기죽이지 말라는
새로운 교육사조 때문에
선생님 기는 죽고 아이들 기는 살아
폭력 신고 용의선상에 오른 교사들이
오냐오냐 잘한다 경쟁이라도 해야 하는지
교육은 있되 철학은 없고
행정이나 정치적 고려는 있되
교육적 원칙이나 판단은 뒤로 밀리는
이 시대가 지나면 또 어떤 미래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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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교실
- 인성교육


“소금이 빠진 고기와 교정받지 않는 아이는 부패한다”*
인공지능 시대가 될수록 교육은 사회가 병들지 않도록
주입해야 하는 백신과도 같다고 한다
인성교육진흥법도 만들고 인성교육지도사 자격증도 많은데
왜 터지는 사건 사고들이 이리 거칠어질까


아이를 하나만 낳아 오냐오냐 키워서일까
회초리를 내려놓고 말로만 채찍질한 탓일까
지혜보다 지식을 앞세우고
과정보다 결과를 앞세우고
남들보다 자신을 앞세우고
화해보다 비판을 앞세우고
어른보다 아이를 앞세운 죄
그 죗값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A little knowledge is a dangerous thing’**
진실로 배우려 하지 아니하고
적은 지식으로 너무 설쳐댄 벌로
내 종아리를 내가 때리고 있는 게 아닐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옛사람들 지혜를 잊고
자식 교육의 독선생 노릇을 해온 결과가 아닐까
어린이를 어른으로 만드는 그 길고 어려운 과정을
참아내지 못하고 조바심치다 결국
어른이 되지 못한 설익은 존재들만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네덜란드 속담
✽✽Alexander Pope (1688–1744)의 시 「An Essay on Criticism」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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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교실
- 또치쌤 고창석


세월호가 가라앉고 1128일 만에
선생님이 돌아오셨다네
차가운 바다 밑에서 오월 신록의 땅으로
눈물로 멍든 뜨거운 가족들 품으로


객실 사이를 뛰어다니며 “빨리 나가라”고 소리치던
고슴도치 머리를 한 짱짱한 40세 체육쌤이
자신의 구명조끼를 제자들에게 주면서
탈출하라고 쩌렁쩌렁 재촉하던 그가 돌아왔다네
지난 삼월 녹슨 집 한 채가 바다에서 올라오고도
아무 소식 없더니 오월 화창한 날을 택해
아직 온전히 돌아오지 못한 아홉 사람 중 맨 앞장에 서서
맹골수도 거센 물 바닥으로부터 나왔다네
정강이뼈 하나로 달려 나왔다네


엇나가는 아이들 이야기를
그렇게 참을성 있게 들어주시더니


그 무거운 세월을
그렇게 오랫동안 짊어지고 견디시다가
마침내 그 이름만으로도 빵 터질
또치쌤 고창석으로 돌아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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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교실
- 내비게이션(Navigation)처럼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길 안내하는 차량용 내비게이션처럼 하잔다
실수로 잘못된 길로 들어서도 절대로
절대로 화내거나 소리 지르지 말고
있는 지점에서 다시 경로 탐색하여
친절하게 안내하면 될 일이다
몇 번이고 실수한 횟수 세지 말고
오로지 목표 지점을 향하여 참을성 있게
감정 섞지 말고 사근사근하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끈기 있게 기다려주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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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교실
- 미성년자 노동 착취


내 어릴 때 다니던 시골 초등학교엔
토끼가 몇 마리 살고 있었네
염소도 두어 마리 함께 있어
먹이당번 하는 날은 신나고 즐거웠지
아카시아 나뭇잎 따다 주면 오물오물 잘도 먹는 토끼들
커다란 눈과 보스스한 털이 귀여워
많이 먹어라 어서 커라 사랑을 듬뿍 주었었지
운 좋은 날 염소젖 얻어먹은 날
일기장에 적어 놓기도 했는데


요즘에 아이들 그런 일 시켰다간
미성년자 노동착취 혐의로 쇠고랑 찬다네
운동장 풀 뽑기는 일도 아니었고
방학 숙제로 퇴비용 풀 10kg 베어 제출하기
등교 때 큰 돌멩이 하나씩 주워 와 학교 짓기
솔방울 솔옹이 주워 난로 땔감하기 쥐 잡아 학교에 가져오기
뽕나무 심어 누에치기 등등 노력동원이 일상이었는데


학생들 쓰는 화장실 청소도 교실 청소도
용역에 맡겨 달라하고 교무실 청소를 왜 학생들에게
시키느냐고 따지는 학부모들에게 이런 얘기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믿지 못할 코미디일 거야
따져보면 아주 오래된 역사도 아닌데
가난했던 시절 얘긴 해서 뭣하나
먹고살 만해졌다는 게지 위안을 하면서도
노동 착취라는 말이 섬뜩하게 가슴에 와 박히는 건
내가 단순히 나이 먹은 이유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