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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2018년 [시] 튤립 외 9편 / 이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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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1,320회 작성일 18-12-3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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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한 곳에 뿌리 박고
46년을 살았는데
올해 들어 동네 지형이 바뀌고
스카이라인이 바뀐 오래된 집에 산다.


무던히도 덥던 지난 여름
시집을 묶어 내느라 딴엔 애썼다
해서 기력이 소진되는지
내 사고력과 판단력이
굼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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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


몸보다 머리가 큰 개구쟁이처럼
온종일 뛰놀다
해 질 녘이면
엄마 품에 안겨
입 꼭 다물고 곤한 잠에 든다


먼 먼 옛 조상은
유럽의 귀족을 상징했다는 너
풍차가 보이는 너른 들판에
화려하게 피어
엄청 비싼 값이었다지


애정과 배려라는
꽃말도 예쁜


삼월이라도
쌀쌀한 내 화단에
분홍 튤립 세 송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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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그랬지


세간의 주목받을 만큼
찬란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초보적 글


쓰고 구기고
한밤 내 쓰고 버려도
휘모리로 신명났었지


등단이란 관문도 통과하기 전
나는 시 앞에 무릎 꿇고
진액 모두 짜내어도
몰아치는 기쁨 있었지
그 짓이 삶의 목적일 때 있었지


자진모리장단으로
신명 났던 힘은 가라앉아
남의 글 배웅이나 하며


나도 그땐 그랬지로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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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숲길


여주 땅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으로
이어지는 왕의 숲길을 걸었다


아직은 순한 햇살
오월의 신록이 내뿜는 초록이
흘러나와 온몸에 감겨든다


눈도 씻고 폐 헹궈내며
감사한 발걸음은 느릿하였다


숙종, 영조, 정조 임금이
선대 왕릉을 참배하러
행차하였다는 숲길


저 솔숲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옛 임금들의 아름다운 행차를
지켜봤으리 그래
저리도 당당히 곧고 푸르게 섰구나


백성을 진정 사랑하신
세종대왕의 인자한 모습처럼
포근하고 아름다운
영릉(英陵)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봉분 하나에 혼유석 두 개가 놓여
소헌왕후와 합장임을 알리었다


오월의 깨끗한 바람이
초록을 뚝뚝 떨구며 일렁이는
왕의 숲길을 왕궁사람처럼
의젓이 걸어봄도


한글을 마음대로 쓰고 있음도
고맙고 감사한
호사를 누린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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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거북이


적도의 바다
평균 수온 28℃에 사는
바다거북은 물빛보다 고운
초록 등껍질을 가졌다


콜롬비아 산 최고 품질의
에메랄드 빛이다


허파가 있는 파충류가
수천 킬로미터 먼 바닷길을
시속 2킬로미터로 헤엄쳐
육지로 올라온다니
어미가 되기 위한 위대한 모험이다


사람 냄새 없는
깨끗한 모래 언덕을 찾아
200여 개의 알을 낳고는
바다처럼 짠 눈물을 흘리며
헤엄치던 짧은 다리로
모래 덮어 주고 바다로 떠난다.


포란 않는다고 거북 어미
냉정하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이가 없는 바다거북은 초식이면서도
딱딱한 산호를 물어뜯어 삼킨다
튼튼한 알을 낳기 위한 고통을 참는 거다


돈 싸들고 수천 킬로 출산원정 가는
어미하고는 차원이 다른 희생


초록 등 바다거북이
진짜 에메랄드 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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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아재


주문진 바닷가 5구에는
세상 맘씨 착한 총각
만수씨가 살고 있는데요


단둘이 살던 어머니
삼 년 전 하늘나라 보내고
사흘 밤낮을 울며 지냈다네요


우람한 체격은 아니지만
구릿빛 튼실한 팔뚝 하며
큰 목청은
통통선 타고 문어잡이에 딱입니다


문어가 많이 나든 적게 나든
새벽 네 시면 바다에 나갑니다


만수 아재는
할배부터 동네 코흘리개까지 친구요
인사 잘하는 학생
대답 잘하는 친구
쉰 살 모범생입니다


‘문어 속여서 잡으면 안돼여.
갸들도 먹을 걸 주고 잡아야죠.’
문어가리 안 하고 돼지비계 끼워 쓰고
어린 문어 잡히면 놔 준다네요


셈수를 잘 못해
도매상이 쳐주는 값에
늘 웃으며 사는 만수 아재는
세상 둘도 없이 착한 어부랍니다


그래서
사악한 계집이 꼬일까
동네 어른들이 지키고
돌봐 준 덕에
아직도 장가를 못 갔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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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속내


바다가 저만치 보이는 연곡천
여름이 시작되는 유월이면
맑은 물 흐르는 여물목에
이름도 예쁜 은어가 살고 있다


여리여리한 몸에
은사(銀絲)로 지은 시스루룩의 패션


행여 비린내 풍길까
물풀과 이끼만 먹어
수박향이 난다


그렇게 이쁜 은어가
성질머리 사나워
난폭하게 영역싸움 하다가
놀림법 낚시에 걸리기 일쑤


아파트 분양권에 눈독 들이고
이 땅 저 땅 영역 넓히려
흔들고 다니는 부류의
여인네 같은


씨은어를 쫓은 은어와 투기에 여념 없는 자
이 지구상에서 무엇이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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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단풍


토론토의 가을도 깊어가는
시월


푸르던 넓은 잎 붉더니
붉더니 불덩이처럼 날린다


젖은 흙에 내려서도
더 괄하게 타는
캐나다 단풍잎은
썩어 부스러져도 붉겠다


제 색깔 제대로 내는
잘 익은 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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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은 지나야 온다


토론토의 10월은
쌀쌀하다


푸르던 활엽수
노랗게 내리는 저녁
우리 동네 달이 따라와
내려다보고 있다


연년생 동생 집에 온 지 두 달여
괜스리 집이 궁금하고
어릴 적 동무도 갑자기 생각나


그 적 부르던 노래
흥얼거려 본다


용순이, 명아, 이슬이
여기 사는 동생 범이도
소꿉친구였다


뒤뜰 사과나무 떨어지는 잎에
이름 하나씩 붙여 부르면
식구 같던 동무 얼굴
달처럼 떠오르는 이국의 밤
그리움은 지나야 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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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새우고 싶은 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밤
물내 나는 깨끗한 옷
갈아입는 느낌


함박눈이 펑펑
내려 쌓이는 밤
햇솜 이불 포근한 졸음 오는 밤


함박눈이 펑펑
부드럽게 내리는 밤
살갗에 닿는 간지럼
맑고 지순한 밤


백열등 불빛이
아늑하고 따뜻한 밤


한없이 한없이 눈은 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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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바라기


한 지붕 아래 살다가
이사 나간 손자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별이 보고 싶어
밤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던
다섯 살배기


너 떠난 후
한 사나흘을
감당 못할 그리움에 아팠다


낮엔 너의 창가에
햇살이 들어와
따뜻한 위로를 주지만
밤의 달빛이
불 꺼진 네 창을 비출 때
자분자분 밀려오는
네 모습 아른거려
눈물이 난다


너는 나의 햇살이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