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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2018년 [시] 싸라기눈물 외 9편 / 김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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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04회 작성일 18-12-3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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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도 마무리가 된다. 지질공원 해설을 위해 분주히 오르내리던 송지호 해안의 서낭바위 산책길도 넘실대는 파도와 부딪치는 능파대도 잠시 겨울잠을 자게 될 것이다. 뒤돌아보니 무엇보다도 기뻤던 일은 딸내미가 책을 낸 일이었다. 다른 나라의 서점을 돌아보며 쓴 『서점 여행가의 노트』는 각 서점의 고유한 생명력을 새롭게 조명하며 여행자의 여행 관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다. 글 쓰는 자식을 둔 글 쓰는 부모 마음일 것이다. 이번 책 발간이 더욱 넓은 의식의 세계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일부 회원 중에 건강이 걱정되는 이들이 있다. 새해에는 모두 건강하게 창작할 수 있기를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갖는 문학기행에 모두가 함께 할 수 있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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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라기눈물


아침에 뉴스를 보던 아내가
나이가 들수록
물을 많이 먹어야 된다고 했다.


내가 물을 적게 먹는 건
눈물을 흘리지 않기 때문이다.


가슴 찌릿한 감동으로
펑펑 울어줘야
물도 한 대접씩 먹어대는데


요즘은 별로 울 일이 없다.
꽃이 피고 새가 울어도
그렇다.


치장하고 선 당신이
거울 앞에서 바람을 일으켜도
그저 그렇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일만은 아니다.


흐르지 않는
싸라기 눈물을 밤새 쌓아 놓고
아침엔 누가 볼까
대빗자루로 쓸어내는
그런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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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말


잎이 부드러워서인가
꽃이 향기로워서인가
벌레 앉은 나뭇잎이
몸살이 났다.


찬찬히 보면
나뭇잎 위의 벌레도


몸을 흔들어댈 수도
손을 짚고 넘나들 수도 없어
삼보일배 고행을 한다.


갉아먹은 반쪽의 이파리가
그럴듯한 형상이 되자
벌레는 온 힘을 다해
뭔가를 토해내려 한다.


벌레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니
하려는 말을 들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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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 꽃


냉이 꽃 한창이다.


농사지을 사람 없으니
노는 땅 지천이고
묵밭 된다고 부탁해도
이젠 힘에 부친다고
몇몇 노인들 손사래 친다.


우리네 농토가 이리 될 줄이랴.
아버지는 한 뙈기밭을 얻으려고
술사고 밥 샀다.


산 중턱 비탈진 밭은
묵힌 지 오래고
그 아래 다락 논도
잡목만 무성하다.


드나들기 만만한 곳
김장밭 한 두럭이나마


밭 갈고 고랑 내려니
기계가 들어서야 한다.


밭 갈 소는 찾을 수 없고
소 같은 장정들은 없다.


망종까지는 씨를 넣어야 한다지만
이것도 괜찮다.
냉이가 꽃을 피워
온 밭이 시리도록 하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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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파대 바위


속 파인 바위들
그것들 하나하나 모여서
서로 위로하는 거 보았네.


찬찬히 보니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기 전
깊게 파인 속 드러내고
자기가 자기를 위로하는 거
파도 소리로 들었네.


사그락거리는 소금 알갱이를
가슴에 담고 사는
그 사람 속도
살점을 저미는구나.


하고 싶은 얘기 누군들 없을까
그조차 바람에 날려 보내고
텅 비우고 서 있는 바위를 쓰다듬다.


도닥이는 위로가
나에게 전해지고
나의 빈 가슴을
보여도 부끄럽지 않는 곳.


이쯤에서는 하늘과 맞닿은 창 모조리
열어 놓고 살아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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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지 않은 집


아이들이 괜스레 무섭다고
멀리 돌아서 가던 그 집
이제는 낡고 헐었다.


그 아이들 늙어
더러는 영구차 신세지며 떠나는데
저 집 속의 울긋불긋
상여는 못 본 지 오래다.


한 분 두 분
마을 어른 돌아가실 때
더러는 꽃상여 만들어
수십 장 만장을 휘날리기도 했다.


마을 외진 곳 상여움막
그 속의 상여 틀이
곱게 삭는다.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는 집
그 속에 갇혀있을
울긋불긋 색깔의 얘기들
하나 둘 삭아 내리는 집


둥둥 북소리로 떴다.
둥실둥실 구름으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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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진


살갗이 부풀어 올랐다.


눈 밑에 소(沼)가 생기고
푸른 물고기 모였다.


부푼 살점 살짝 터지자
눈물도 고였다.


살갗 밑으로는
소리 나지 않는 물이 흘렀다.


가슴 휘젓고
바람으로 빠져나간 돌을 보다가
아쉽게 놓친 사람 하나 찾는다.


오름 위로 오르다
고개 들어 올려다보니
천지가 노을이다.


이 땅도
지금 전신 발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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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


살구 먹어 보라고
아흔아홉 살 우물집 할머니
한 바가지 가지고 왔다.


어머니는 십수 년 전
망초 꽃 걸어가는 길옆으로
가셨는데
친구분은 아직도 정정하시다.


찬찬히 보니 같은 것이 없다.
물렁하니 갈라지면서도
속살 보일까 입을 다물고 있고
덜 익은 놈은
푸르뎅뎅하니 성깔을 내고 있다.


드문드문 검버섯 아래
신맛 숨기고 단맛 감추고
한번 골라보라고
내미는 얼굴들


난데없이
살구가 장난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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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방북신청서


아내의 오빠는
북에 있다.
아니 세상 떴는지도 모른다.


아들 하나 떨어뜨리고 내려온
장모님은
서리 맞은 꽃잎으로 가셨다.


방북신청서에
곱게 사진 붙여 놓고
한 가닥 희망으로
평생 진흙 길 걸었다.


붉은 눈빛으로 사시던
장모님만큼은 아니더라도
얼굴 모르는 오빠를 그립다 한다.


아내의 방북신청서가
채택되기는 어렵다.
북에서 탈출한 가족들은
더욱 어렵다.
그래도 보고 싶다 한다.


여전히 붉은 눈빛의
해가 뜨고 지는 세상에서
아내의 방북신청서는
아주 작은 얘깃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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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상봉 날


푸르디푸른 날들이
환영 현수막 뒤에서
환영으로 펄럭거리는 곳
밟고 온 날들의
실타래는 어디서 풀어야 하나.


이천십팔 년 팔월에
백 세의 언니가
놓쳤던 동생의 손
이제서 잡고 우네.


잠시 집 나갔던 사람
육십팔 년 만에 만나니
이걸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평생 산 거처럼 살지 못하고
허허롭게 떠나신
일 세대 이산가족들
이거 보고 계시오.


당초에 어찌해볼 수 없는 일이라고
외면한 채 먼 산보는
실향민촌 2세님들
방북신청서 다시 써봅시다.


산 사람 죽은 사람
이 땅에 수두룩한 멍든 가슴
쉼 없이 두드리며
오늘은 비가 내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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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내 몸에서 나를
나오게 하여
걷게 하고 말하게 한다.


내 몸에서 나온 나를
오늘에서 어제로
어제에서 그제로
걸어가게 한다.


이제 눈에 잡힐 듯
선명해진 나를
내일로 걸어가게 한다.


오늘 똑바로
서고 싶은 자의 연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