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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소설] 아버지의 지도(地圖) / 이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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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36회 작성일 19-12-24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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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에 쫓겨, 내 글은 세월을 이겨내지 못했다.
하여, 내 소설은 대다수가
사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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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지도(地圖)



“부간아…. 부간아 아~ ”
함경도 겨울바람은 문풍지 새로 들어오지 못해 밤새 보챈다.
“내 이름? 누가 내 이름을?”
부강이는 잠결에 제 이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도깨비? 아니야, 문풍지 소리야.”
돌아눕는 귓가에서 또 그 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더 크고 다급하게 제 이름을 들었다. 부강은 이불자락을 머리 위로 들쳐 쓰고 무릎을 오그려 엎드렸다. 문풍지가 멎으면 그 소리도 멎고, 문풍지가 떨리면 그 소리도 따라 들렸다.
‘아버지? 어떻게 아버지가?’
부강은 옆에 누운 할머니를 세차게 흔들었다. 할머니는 단숨에 알아듣고는 정지문을 열고 뜰로 나갔다. 속옷 바람에 맨발로, 싸락눈이 하얗게 깔린 마당을 질러 대문 빗장을 풀며.
“부간 애빕매? 부간 애비지비? 하늘이 무심치 아이하구나, 아…”
할머니 말끝은 오열로 이어졌다. 그러나 순식간에 그 울음은 삼켜졌고 쉬쉬 두런두런,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윗방 뒷방에서 엄마와 삼촌들과 숙모, 고모들이 한 덩이로 뜰에 나섰다. 사람 망태기 속에다 아버지를 싸안고 정지로 들어왔다. 어른들은 입에 검지손가락을 세워 들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엄마가 급히 방에 들어가더니 아버지의 옷가지를 챙겨 나왔다. 아버지를 봉당에 세워둔 채 옷을 갈아입혔다. 얼마나 반갑고 기쁜 일인데 어른들은 누가 아버지 잡으러 뒤를 쫓아 오는 것처럼 서둘러댔다. 제 이름을 불러 맞은 아버지를 정작 부강은 다가서지도 만져보지도 못했다.
“어쩌겠니, 에미야 얼르덩 채비르 해라.”
“뉘 집이 좋겠니? ”
부강이는 아버지를 숨겨야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동원이네가 어때요?” 작은삼촌이다.
“거긴 길가래서. 너무 위태하잰소?” 작은숙모다.
“왕식이네 집이 좋겠는데요.” 큰숙모다.
“ 가찹아서리 좋은데 왕식이가 좀 걸린다이.” 큰삼촌이다.
“하긴 그 집 하라바이는 안직도 쏘련 땅에서 아이오잰니….”
어른들이 이 집 저 집을 의논하는 동안 아버지는 정지 간 부뚜막에 눕다시피 앉았다. 그 틈에 부강은 얼른 달려가 아버지 옆에 앉았다. 여늬 때 같으면 아버지 품에 안겼을 텐데. 아버지는 말도 않고 부강이를 어루만졌다. 아버지에게서 냄새가 났다. 거지 냄새다. 겨울이면 아침마다 봉당에 들어와 쭈그려 앉아 조반을 얻어먹고 가던 거지 ‘태호’ 보다 더 지독한 냄새나는 아버지. 온통 시꺼먼 아버지였다.
왕식이는 아버지의 육촌 아우다. 인민군이다. 계급이 젤 높은 ‘대좌’라고 했다. 그 집 아버지는 아들이 공산당원이 되는 꼴을 보기 싫다며 해방된지 이듬해에 러시아 ‘우라지보스토크’라는 항구도시에 망명 갔다고 했다. 거기서 그 어른은 마도로스라고 했다. 그 집 외동딸, 육촌 고모는 부강이를 참 예뻐했다. 고보(고등학교)에 다니는 고모 방엔 부강이가 좋아하는 물건들이 많았다. 방 뒷문을 열면 가지가지 꽃이 펴 있었다. 동네에서 드문 기와집이다.
“저엉 그렇다면 경남이네 집이 젤 낫겠어요. 어머이.”
제일 나중에 엄마가 조심스레 한 마디 한다.
“그래요. 좀 멀긴 해도 그 집이라면 안심되겠네요 어머니.”
아버지가 처음 말문을 열어 엄마가 짚은 ‘경남이’네 집을 말했다. 경남이는 부강이 보다 두 살 많은 그 집 막내아들이다. 할머니의 여동생 집인데 이모할아버지가 거간이라, 동네에서 몇째 가는 부잣집이다. 부강은 경남이네 집에 가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집안 간 대사 때 그 집에 가면 경남이는 부강이를 불러 어른들 몰래 자기 집 곳간에 데려갔다. 말이 곳간이지 경남이네 곳간은 부강이 아버지의 서재보다 넓다. 벽을 돌아가며 항아리가 줄져 놓였다. 경남이는 볏짚으로 만든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보인다. 아~ 항아리마다 구슬이 가득했다.
“부간아 너 어떤 거 갖고 싶은지 말해라. 내가 이 항아리 차례차례 다 보여줄 테니…. 이모할아버지는 그 구슬로 등갓을 만들어 부자됐다.”
길쭉한 구슬 항아리, 동그란 구슬 항아리, 계란 모양 구슬 항아리, 노랑, 빨강, 초록, 남색…. 아~ 부강은 늘 아무것도 정하지 못했다.
“경남아-” 이모할머니 소리다. 두세 번 부르면 경남은 부강이 손을 잡아끌고 곳간을 빠져나와 뒤란 배나무 근처에 가서 “왜요오….” 대답한다. 야단칠까 봐서다. 못내 아쉬워하는 부강이를 생각해서 어른들이 떠날 기미가 보이면 경남이는 살금 곳간에 다시 들어간다. 바닥을 휘이 쓸어 담아도 재 묻은 구슬 한 웅큼 부강에게 건네주곤 했다.
경남이네 집은 정말 멀다. 동네 끝자락에 그 집이 있다. 집채가 워낙 크고 방은 셀 수 없었다. 경남이랑 숨바꼭질하면 술래는 방 마다 뒤지지만 영영 찾지 못한다. 경남이네로 정하는 것이 부강이 생각에도 제일 좋을 것 같았다. 그 집에 아버지가 숨어 있으면 누가 대문을 두드렸다 쳐도 빗장을 끄르는 동안 아버지는 얼마든지 몸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경남이네 앞ㆍ뒤뜰이 하도 넓으니까. 경남이 누나는 모스크바대학에 유학 가 있고, 형은 뛰어난 미남인데 영화배우가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부강이가 구슬 때문에 경남이네 가는 것을 좋아한 것처럼 경남이 형아는 부강이 아버지 서재에서 축음기로 새로 나온 노래를 듣는 것을 퍽 좋아서 부강이네 집에 자주 왔다. 가끔 아버지에게서 축음기 판을 빌려 가기도 했다.
더더욱 잘 된 것은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우물이 그 집 근처에 있다는 점이다. 엄마처럼 동네 사람들이 먹는 물을 길러가는 길목에 경남이네 집을 지나쳐 간다는 것이다. 부강이네 마을은 바다가 가까워서 집집마다 허드렛(허잿물) 우물은 거의 다 있다. 오직 먹는 물이 나는 우물이 하나 멀게 있다는 것이다.
삼촌 둘이 대문께와 골목 어귀에 망을 서고 할머니는 아버지를 앞세워 총총히 집을 떠났다.
‘불쌍한 아버지’
잘 숨어 있어야 한다. 인민군에서 도망해 집에 온 아버지다. 그 새벽 아버지와 함께 대문을 나선 할머니는 훤히 동틀 무렵 굳은 얼굴로 돌아왔다. 식구들을 모두 아버지 서재에 모이게 했다.
“어머이, 미모님 댁에선 순순히 대해주시던가요?”
“첫새벽에 들이닥친 사람, 죽으라고 문전박대 하겠니. 놀라긴 했다마는 잘 돌봐 줄 게다. 모두 내 말 잘 들어라. 애비를 함부로 말해서는 아이된다. 에미가 물 길러 가면서 옷가지나 먹을 것을 동이에 담아 드나들어도 당최 모르는 일이다. 묻지도 말아라. 부간아 너 이 할미 눈 똑바로 봐라. 누가 물어도 아버지는 모른다고 해야 한다. 그리 아이했다가는 우리 식구 모두 죽는 날이다 알았나?”
부강은 네 살 아래 동생과 두 명의 사촌동생들이 보지 못한 아버지, 아버지 비밀을 혼자만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 날 후로 부강은 동네 아이들과 노는 일도 단속받았다. 할머니는 공연스레 자주 부강에게 눈치를 주었다. 인민군에서 도망쳐 온 아버지의 안녕을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귀가는 드러내놓고 기뻐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날 이후 온 식구가 맨날 가슴 졸이며 살아야 했다.
보도엔 국방군이 ‘압록강’을 코앞에 두고 있다 하는데, 마을에는 밤낮 빨치산 따라 북으로 갈 사람을 모으고 있다. 사방에서 경계가 풀렸다.
“아마이 판장에 가 보지 아이하겠슴매?”
옆집 아지매가 할머니에게 왔다.
“거긴 어째서리?”
“아, 모릅매? 침고마이 당꼬가(간 고등어 댕크) 헤처저서리 누구나 맘대로 퍼 간다 하재이오.”
“그게 무슨 말이니, 고마이 당꼬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니?”
“그 뿌이 아이요. 어업조합에서 장부책이랑 전표랑 다 태우고 있답매… 부그로 도망갈 채비르 그리 한다잼매.”
‘이놈덜이 급하긴 한가보다. 국군이 들어오기는 하는가 보다’
할머니는 겉으로는 아무치렁 않고 의시댔다.
“이봅새, 내 넷째 아들이 원산철도핵교 댕기는데 소리소문없이 인민군에 나갔고, 인제는 우리 집안 장손까지 인민군에 뽑헤갓스이 날 어쩌겠소.”

6.25가 터지던 그해, 부강이네는 함경남도 흥남시 ‘서호진’에 살고 있었다. 당연히 인공 치하였다. 아버지의 고향은 그곳에서 북으로 백 리쯤 되는 ‘홍원’이다. 해방되던 해에 아버지는 홍원 어업조합 경리계장 자리에 있었다. 일제는 모든 선박에 쓰이는 기름을 통제 배급제로 묶어두고 있었다. 전쟁에 필수품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두 척의 상선을 운영하기도 했다. 외할아버지가 맡긴 것이다. 외갓집엔 농토가 많았는데 일제가 식량 증식 정책을 펴면서 조선 사람 소유의 농지를 야비한 방법으로 수탈해갔다. 그 틈바구니에서 할아버지는 손수 경작하리만치의 농지만 남기고 일시에 매각처분, 그 씨앗돈으로 상선 두 척을 구입하여 사위인 부강 아버지에게 운영을 맡긴 것이다. 아버지는 본인의 배에 소요되는 기름은 말할 것도 없고, 홍원항을 기지로 삼는 모든 어선의 기름을 지급하는 직무를 도맡았다. 전표에 따라 주유량을 면밀히 했다. 가까운 이웃들에게 야멸차리만치 원칙대로 집행했다가 가끔은 할머니로부터 나무람을 받기까지 했다.
해방정국에서 아버지 죄명은 일제의 하수인, 공금 횡령, 악질 부르주아 였다. 일말의 해명이나 재판 과정 없이 홍원경찰서에 압송, 3일 만에 함흥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맡기고 간 물건 중에 지도책이 있었다. 엄마가 지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수산업은 물론 상선을 운항하는 데에 매우 중한 지도라 했다. 아버지의 배는 북으로 청진에서, 원산을 거쳐 남으로는 부산까지 운항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잡혀가기 며칠 전날 이른 아침, 부강에게 단짝동무 마쯔다가 울면서 왔다가 간 일이 있었다.
“도미애, 이거 너 가져. 우린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대. 빨리….”
얼떨결에 부강은 마쯔다의 인형을 받아 안았다. 마쯔다가 아끼던 인형.
부강이 늘 부러워했던 그 인형을…
“부간아, 너 그거 뭐니?” 할머니가 보았다.
“마쯔다 거요.”
“내가 몰라서 물니, 그걸 어째서 니가 개지고 있능가 말이다.”
할머니 억양이 매우 못마땅한 뜻이다.
“마쯔다가 날 가지래요. 가아는 일본나라로 간다구서리… ”
“갖다줘라. 그딴 거 집에 들이지 말거라 얼릉.”
부강은 인형을 안고 작은 고모에게 업혀서 한달음에 마즈다네 집에 갔다. 동네 아재비(아저씨)들이 몽둥이로 마쯔다네 식구를 마구 쫓아내고 있었다.
“해방이다. 너들 왜 안즉 안 가고 있는 거야.”
너무 무서워서 부강은 또 한달음에 집에 왔다. 인형은 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일과 마쯔다의 일이 같은 일인가? 부강은 영문을 몰라했다. 4살 아이로서 어찌 그 정국을 다 알 수 있었겠는가.


함흥형무소에 일 년 반 동안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아버지는 맨 처음 한 일이 있었다. 빼앗긴 상선은 그렇다 쳐도 공금횡령이란 누명은 벗고야 말리라. 조합에 나가 실랭이 끝에 가까스로 막내삼촌 친구들 호의로 창고에서 삼 년 전 장부를 찾아냈다. 밤낮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 하다시피 주판알을 튕기고 장부를 대조하고 결국 공금횡령은 무죄였음을 증명했다.
붉은 깃발 아래서 이 억울함을 송사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었다. 허탈감을 달래려 아버지는 낡은 어구들을 손봐가지고 마을 노인들에게 짠바리(근처 해변에서 잡어를 잡는 작업)를 대행하게 하며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대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기엔 어림도 없었다. 두 삼촌과 숙모들은 부강이 보다 한두 살, 어린 사촌 동생들 데리고 각기 남의 집 사랑채를 얻어 세간났다. 단출해진 가족을 데리고 살며 할머니는 어판장에 나갔다. 배 들어오면 생선을 도매로 떼어 소매꾼들에게 되파는 일을 해서 부강이네 식구를 살렸다. 다행한 일은 예전에 당신 아들이 마을 선주들에게 차등을 두지 않고 공정했으며, 때론 당신 상선에 배당된 기름에서 근해어업에 생계를 얹은 소형 선주에게 나눠 줄 때도 있었던 일이 오늘날 그의 어머니에게 홀대치 않고 우선권으로 생선을 넘기는 데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세상이 온통 붉은 깃발로 휘날리며, 어떠한 경우라도 기존 질서는 파괴돼야만 하던 그 시국인데, 아버지에게 전혀 뜻밖으로 엄청난 제의가 들어왔다.
<흥남 수산물 판매소 경리과장>
지금으로 치자면 수협인 셈인데, 흥남수협은 홍원의 그곳과는 비교되지 않게 큰 규모다. 흥남항에 속한 어선은 물론 타지역 어선도 때에 따라서 흥남항에 입항, 생선을 하역한다. 하루에 입찰하는 어획량이 어마어마하며 경리과장이 관리하는 돈이 어마어마하다. 판매망이 넓기 때문이다.
흥남항은 남쪽 편에 주로 공장이 들어서 있고, 북쪽 편에 어선이 접항한다. 만(灣)이 워낙 깊고 넒으므로 북쪽 항에서 남쪽 공장 지역은 커다란 굴뚝만 삐죽삐죽 보일 정도다.
해방 정국 북조선에서는 어떤 산업체든 국가가 관장했다. 그 종사자들 역시 공산당에서 임명한다. 그런데 부강 아버지의 신분은 공산주의 혁명에 저해요소인 악질 부르주아, 전과자, 비당원(非黨員)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를 채용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아버지는 서울 협성실업고보(현, 광신상고 전신)에서 수학했으며, 23세에 주사시험에 합격했다. 모든 계산은 주판으로 수작업하는 터라 월말이 다가오면 사나흘은 일거리를 집에까지 들고 왔다. 오로지 그 실력 하나만으로 채용된 자리였다. 아버지는 엉뚱한 제의에 대해 많은 밤을 갈등으로 지새웠을 것이다. 며칠 밤을, 밤마다 아버지 서재에선 엄마와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새 나왔다. 엄마가 정지로 나와 부강이를 옆에 뉘여도, 아버지 서재엔 불이 꺼지지 않았고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가족의 생계를 생각하면 마다할 자리가 아니었다. 봉급이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추락한 신분이며 낙인찍힌 인간으로서 그 굴에 들어가 일하기란 여러모로 껄끄러울 것도 망설임의 한 이유가 된다. 거절한다면 ‘형무소 일 년 육 개월간의 교화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단정 지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산치하에 동조하기 싫다.’로 비쳐질 것이다.
난세에 가장들은 제 처자식을 보며 뜻을 접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는 약 일주 만에 흥남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론 지었다. 아버지는 직계 식구만 챙겨서 흥남으로 이사를 갔다. 상처가 많은 고향을 떠나고 싶었을 아버지. 나이 많은 할머니가 새벽 판장에서 궂은일 해야 먹고 사는 일상, 아버지가 비켜갈 수 있는 길이 더는 없었을 것이다.


흥남에서 아버지의 일상은 매우 단조로왔다. 고향집 서재에 꽉 찼던 문학서와 인문 서적들은 고향집에 그냥 두고, 흥남에 와서 살 동안 윗목에 앉은뱅이 쪽상 위에는 유독 낯설고 두툼한 책 몇 권만이 달랑 놓였다. 아버지는 전처럼 독서를 많이 하지 않았다. 홍원집에서 서호진으로 이사할 때 책장은 그대로 두고 회전의자와 레코드판 중에서 큰 판들(Lp), 축음기는 가지고 왔다. 서호진 집은 따로 아버지 서재가 없었다. 집이 작았기 때문이다. 축음기 역시 모셔 놓기만 할 뿐 홍원에서처럼 자주 틀지 않았다. 회전의자, 공작새 색깔 나는 비료드로 감싼 것인데 아버지는 그 의자도 예전같이 아끼는 것 같지 않았다. 사무실에 가져갔다. 신발에서 떨어지는 별별 흙먼지가 깔려 있는 사무실, 뱃사람들이 들고나는 비린내가 풍기는 사무실에 내다 쓴다는 것이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는 표정인데, 부강이와 엄마가 오히려 아까워했다.
어느 날 고향에서 할머니가 서호진 부강이네 집에 왔다. 기별도 없이 온 것이다. 할머니는 맏아들, 당신의 장손이 어찌 살고 있는지 당신 눈으로 꼭 봐야겠다며 온 것이다.
부강이가 아버지 사무실로 소식 전하러 갔다. 부강이도 아버지 일하는 것을 처음 보긴 마찬가지다. 출입문 밖에서 숨을 가다듬고 삐죽이 손잡이를 잡고 당겼다. 조금 열린 틈으로 머리만 드밀었다. 아버지는 옆 모습으로 보였다.
‘아버지 의자? 어딨지? ’
문 열리는 소리에 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
“부간, 부간이 너 여길 어떻게….”
부강은 용기를 내 아버지 자리에 달려갔다. 사무실 모든 사람이 두 부녀에게 시선을 집중, 한 마디씩 수인사를 퍼부었다.
“우리 집 큰 여식 부강이라 하오. 인사해라 소장님이시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소장이란 사람 앞에 가 섰다. 소장이라면 아버지 사무실에서 제일 높은 사람일 테지. 부강은 머리 숙여 인사하고 곧 아버지 뒤로 돌아섰다. 소장은 안락의자에 앉았다. 뚱뚱하고 얼굴이 붉었다. 아버지의 멋진 회전의자는 소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소장이 뺏은 것이다. 집에다 그런 소리는 말 한 적 없다. 엄마가 속상해 할까 봐 식구에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
훗날 부강이 철들어서 알았지만, 서호진 집에 있던 낯설은 책들은 『볼쉐비키』 『러시아 공산혁명』 『스탈린』 혹은 『레닌』 전집 따위였다. 의자 말고도 아버지에겐 아끼는 주판이 두 자루 있었다. 주판알이 상아(象牙)를 깎아 만든 것인데 큰 것은 사무실에서, 때론 집에 일거리를 들고 올 때 쓰던 것이고 하나는 양복 윗주머니에 넣고 다닐 만큼 작고 정교한 것이었다. 주판과 공산당 이론서들이 아버지를 지탱해 주는 것이란 사실도 후에 알았다.
그럼에도 여름철 방문을 열어두고 살 때, 아침 출근 시간 전, 아침밥을 먹는 그 시간에 맞추어 사무실 직원 한 청년이 집에 가끔 왔다. 처음엔 무슨 급한 전갈을 가지고 온 줄 알았다. 그게 아니란다. 왜냐고 물으니,
“이 선생과 출근같이 할라고 왔습네다.”
능청스레 비죽 웃으며 툇마루에 곧추앉아서 우리 집 아침밥상을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었다.
“어이없는 일도 다 있지. 어린애들이 학교 길에 같이 가자고 한다지만 다 큰 어른이 길을 모르나 호랭이가 있어 무서운가. 원 참.”
엄마가 숭늉 그릇을 들고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눈짓으로 말을 막았다. 그런 날이 종종 있었다.
“여보 아침에 당신 실수할 뻔 했어요. 당신 말따나 같이 출근하자 왔겠소. 우리 집에서 반찬은 어떻게 먹나, 쌀에 잡곡이 얼마를 섞는지 따위를 염탐시킨 거라오. 아침 밥상은 되도록 간소하게 합시다.”


퇴근하고 집에 와 있던 아버지는 저녁 시간 종종 직장에 다시금 불려가곤 했다. 그게 싫어서 아버지는 자전거에 부강을 태우고 자주 바닷가에 갔는데, 어떤 날은 그곳까지 사람을 보내 아버지를 데려갔다.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결과 모든 기득권자와 유산자와 식자(識者)들을 다 제거한 시점에서, 그네들끼리의 회의에 아버지는 끼지 못했다. 문제는 그 식(識)자가 문제다. 소장이 주관하는 당 회의건만 지식이 딸리는 소장이 결말을 내지 못하는 사안이 생기는 것이다. 당칙이나 로(노)선에 관계된 부분에서 애매한 해석으로 자신 없을 때엔 어쩔 수 없이 비당원이지만 부강 아버지가 필요했다. 아버지가 ‘텍스트’를 가지고 이건 이래서 이렇게 해석해야 옳고, 저건 저래서 옳지 않고를 쩍 벌어지게 단판을 내려 주고는 씁쓸하게 돌아왔다. 휴대용 주판과 쪽상 위의 『볼쉐비키』 따위는 그럴 때마다 아버지를 세워주는 무기였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여덟 살 부강이 눈에 무척 쓸쓸해 보이고 불쌍했다.
바닷가 모래불은 물놀이 철이 아니면 스산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부강을 그곳에 놓아두고 먼데 수평선만 보고 있었다. 아이는 찰싹대는 파도와 술래잡기 하고, 조개껍질을 줍기도 하고, 곱새등 왕눈이를 쫓기도 하며 혼자 놀았다. 아이가 한기를 느끼거나 놀이에 싫증나서 당신 곁에 주저앉아 고무신 속에 든 모래알을 털어 낼 때에야, 흠짓 놀라서 아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갈까?”
어느 날 저물녘, 아버지가 부강을 데리고 바닷가에서 막 돌아왔을 때였다. 검은색 승용차가 집 앞에 있었다. 아버지를 태우고 어디론가 다녀오는 일이 있었다. 부강은 번득이는 차에 선뜻 올라타는 아버지가 이상했다. 불안했다. 마쯔다네가 쫓겨가던 그때도 아버지는 저렇게 검은 차로 집을 나섰다. 그리고 형무소에 일 년 반 동안 갇혀 있다가 왔다.
“누구야 엄마, 아버지 태우고 어딜 가는 거야?”
“너 생각 나? 홍원 이모할머니 집. 너 좋아하던, 구슬 많은 집. 경남이네 말이다. 그 댁 큰딸, 그때 모스크바대학 갔던, 아버지가 형무소 살고 나서 집에 있을 때, 우리가 읍에 올라갔던 날이 생각나? 그때 러시아식 신식잔치 했잖어. 그 새각시가 쌍가매 아니 창남이지. 쏘련대학 마치고 시집간 거야. 창남이는 판사가 됐고 남편은 검사란다. 지금 함흥 법원에 있다는구나.”
“생각나 엄마. 근데 왜 안 들어오고 아버지만 데려가?”
“차를 보내서 아버지를 모셔간 거야.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 게지.”
그 시절엔 승용차를 쉽게 보지 못하던 때다. 그야말로 고관대작이나 몰고 다니던 쌔단이라 불렀다. 부강이 아주 어릴 적에 원산에서 일본 관리들이 타고 다니는 것을 가끔 보았을 뿐이다.
한 시간쯤 후에 아버지는 돌아왔다. 아버지 말로는 그 쌔단(승용차)이 함흥에서 왔다고 했다. 함흥 법원 창남이가 보낸 차라 했다. ‘빨치산’에 가담하라는 회유를 받는다고 했다.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 했다. 사무실로 자주 전화해서 설득한다고 했다.
“왕식이가 그렇고 창남이도 그렇고 모두 어른들 생각과 영 다른 길에서 ‘성공’이란 걸 하고 있으니, 참 찹찹하네.”
“그래, 당신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정말 빨치산에 가담할 거요?”
“여보 당신까지, 왜 이러오. 이놈들 하는 짓 보면 전쟁이 밀리고 있는가 본데, 여차하면 북으로 튈 태세요. 내가 대답만 하면 오빠네 식구는 자기 차로 책임지겠다는 둥 … ”
서호진 큰 길가 벽보판에는 붉은 글씨로 매일 같이 전쟁 소식을 갈아붙이곤 했다.
<인민해방군은 연일 이기고 있다.>
<낙동강까지 진격했다. 건너기만 하면 남조선을 해방시키는 일은 눈앞에 있다.>


8월 중순 날씨는 연일 무더위를 더해갔다.
부강은 혼자 집에 있다가 부둣가 쪽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골목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광경을 봤다. 엄마가 장 보러 가면서 모기장 안에 배만 가리고 재워 놓은 돌쟁이 동생을 잘 보라 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흥남이 폭격당하는 것이 그날이 처음이었다. 맞은 편 저쪽 흥남 비료공장, 화약 공장, 간장 공장들이 불타는 바람에 맞은편 서호진에서 밤에도 그 환한 불빛으로 신문을 읽을 수 있을 정도라는 말이 돌았다. 공장들은 줄줄이 3일 밤낮으로 불탔다. 흥남 폭격을 시발점으로 서호진도 매일 쌕쌕이(전투기)의 폭격을 당했다. 대다수 관공서는 방공호에 사무실을 차렸다. 방공호는 돌산 밑으로 판 것이라 웬만한 폭격엔 끄떡없다. 입구는 하나지만 출구는 여러 군데며 전기와 수도까지 끌어 들여놨다.
민간과 관청은 별도로 구획이 지어졌다. 공습이 종일 이어지거나 밤까지 이어지는 때엔 아예 며칠씩 방공호 속에서 살았다. 학교들은 예정보다 앞당겨 방학을 실시했다. 과거 일제가 태평양 전쟁 중에 팠던 것인데 해방되고 그곳은 철책으로 막아 놓고 있었던 것이다. 부강이가 또래들과 그 굴 앞 너른 땅에서 고무줄 뛰기 놀이를 하며 놀던 곳이다.
퇴근 시간도 아닌데 아버지가 집에 왔다.
“부간아 엄마는?”
아버지 얼굴에서 불길한 예감이 보였다. 방에 들어가지 않고 선 자리에서 급히 어머니를 불렀다.
“여보, 받아둬요. 배급통장, 아 도장도….”
“아직 배급 날짜가 멀었는데 웬 배급통장을?”
“내 오늘 도에 올라가요. 지난달 결산서에서 끝수가 안 맞는다고….”
“?”
“지난달 도에 올린 결산표에 계수가 안 맞는다고 도(道)까지 굳이 사람을 올라오라는 거요. 계수가 안 맞는다는 말은 핑계지, 전화로 하던지 아니면 문서를 다시 올려보낼 일 가지고, 사람을 직접 부르는 데는 딴 꿍꿍이가 있다고 봐요.”
구실이지 내용은 그게 아니란 걸 직감하신 듯했다.
“이번 길은 심상치 않은 그 무엇이 있소. 일주일 지나도 소식이 없으면 애들 데리고 홍원집에 가 있어요. 언제고 거기서 만날 것이니 그리 알고…”
아버지는 단숨에 이런 말을 남기고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뒤쫓아간 우리 눈앞에서, 아버지는 따가운 저녁 햇볕을 마주하고서 삼륜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아 그렇게 서호진을 떠났다. 아버지는 집을 오랫동안 떠나 있을 때면 제일 먼저 아버지 지도를 맡겼는데 이번엔 안 맡겼다. 깜박하고 사무실에 두고 온 것일까?


예감대로 아버지는 일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소장에게 물어보면 어물어물 행선지며 소재지가 묘연한 말만 늘어놓았다. 현지입대 했다고도 하고….
엄마는 아버지의 예감을 인정하고서 간단히 짐 챙겨 관사에서 나왔다. 방공호 가까운 오두막에 거처를 옮겨 놓고 ‘홍원’으로 가는 배편을 수소문했다. 유엔군 공습이 본격적으로 계속되고 기찻길은 군수물자 나르기에도 부족한 터, 밤에만 운행되므로 우리 같은 입장에서 육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떠나고 부강이네 가족은 방공호 근처 오두막에서 매일 밤늦도록 아버지 소식을 기다렸다. 여름철 장맛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밤이다. 건너편 신작로에서는 군가 소리가 구성지게 들리곤 했다. 낮에는 공습을 피해 방공호나 참호 속에 숨죽이고 있던 인민군 장병들이다.
<앞으로 전진, 앞으로 전진. 앞으로 전진 또 전진… 생~명으로 지키자 목숨 걸고 지키자.>
“죽으러 가는 젊은이들을 어데서 저렇게나 많이 잡아 왔길래 밤마다 며칠째 행군해 가는지 끝이 없구나. 이렇게 굵은 빗속에도 쉬지 않고…”
엄마는 넋두리하며 군가 소리가 상여 나가는 소리 같았다고 말했다.
“네 아버지도 필경 인민군에 강제로 잡혀 간 게 분명해. 공산당을 미워하던 네 아버지를, 공연한 구실로 호출하고는 꼼작 없이 묶어간 게야. 나이 서른세 살에 군대라니? 일선에 가지만 않기를 빌자.”


여름에 그렇게 떠난 아버지의 소식은 끝내 오리무중이고 공습은 날이 갈수록 더 심했다. 뱃길로 나누어 ‘홍원’에 돌아간 부강이 가족은 할머니와 막냇삼촌, 다섯 식구가 홍원집에 살았다.
더위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부강은 옆집 동무들을 불러 뒤란 집 그늘에 가마니를 깔고 한나절 놀았다. 반듯하게 누워 하늘을 봤다.
“야, 야 저기 봐 저기, 오늘은 너무 잘 보인다.”
부강이는 장난감 비행기보다 더 작은 비행기를 세는 것을 재미있어 했다.
“야. 근데 참 페럽지(이상해), 그지? 어떻게 허공에서 저렇게 네 대씩 줄을 딱딱 맞출 수 있니. 네 개씩 한 덩어리가 되고 그런 것이 또 네 덩어리가 돼서 날으면서 한나도 부딪치는 비행기는 없단 말이야. ”
“그래, 참 재주 있다. 그치?”
“비행기는 은숟가락 만드는 재료 가지고 만드나 봐. 자세히 봐라. 하늘이 맑을수록 반짝반짝 은빛이 나잖어?”
“야, 오늘은 너무 많다. 언제 끝날지 몰라. ”
“매일 매일 더 많이 북으로 가고 있어.”
북으로 편대지어 가는 B29는 연일 그 수를 더하여 아이들은 헬 수 없었다. 아이들은 놀이 삼아 세고 있지만 어른들은 시름이 그만큼 더해갔다. B29는 폭격기라는데 한 대에 싣고 가는 폭탄이 어마어마하단다. 그 모든 폭탄을 어데다 쏟는지 염려하는 것이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깊어가도록 아버지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누구보다 엄마와 할머니의 수심은 말할 수 없었다. 곧 새해가 온다. 새해를 얼마 남기지 않은 그 새벽에 아버지는 도적같이 우리에게 온 것이다.
그때 마을은 이중구조를 가진 정세였다. 산에는 공산군과 빨치산, 마을엔 국군과 치안대가 장악하고 있어서 말조심이 절실할 때였다. 인민군 도망자로서 아버지의 신변은 아주 위험한 시점에 있었다. 아버지의 출현은 우리 집 대가족에게 반갑고도 무서운 일이었다.
할머니는 그 새벽에 아버지를 앞세우고 경남이네 집으로 총총히 갔다. 돌아올 땐 혼자였다. 돌아온 할머니는 유독 부강에게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동생과 사촌들은 그 새벽에 아버지가 집에 온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시간이면 어린 애들은 자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 조이며 선잠을 자는 날들이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국군이 마을에 완전히 주둔하고부터 아버지는 더 이상 숨어 지내지 않아도 됐다. 온 식구가 다 모여 왁자하게 떠들며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자유가 부강이의 반쪽 자유를 풀어 주었다. 아버지는 그제서야 지난여름 강제징집 이후, 탈영까지의 여정을 가솔들 앞에 맘 놓고 들려주었다.


함흥도청에 당도하자 미리 대기시켜 놓고 있던 군용차에 옮겨 탔다. 불문곡직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겠다. 차는 그런 식으로 모인 대여섯 사람을 태우고 즉시 출발, 영흥 훈련소에 가서 풀어놨다. 불과 한 주간 훈련을 마치고 자대로 분산됐다. 나이로 보나 사회경험으로 봐서 아버지는 여섯 명 분대원을 거느린 분대장으로 임명받았다.
그 무렵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탈환한 국방군은 파죽지세로 북진에 북진을 감행해 나갔다. 아버지 부대는 싸움터에 한 번 나가보지 못한 채 후퇴 대열에 합류, 계속 북쪽으로 행군했다. 드믄드믄 남한군의 비행 공습을 받으면 대열이 흩어졌다가 다시 주워 모아 북으로 북으로….
오늘밤 새고 내일 아침에는 압록강을 넘기로 돼 있었다. 분대원 여섯은 모두 막내 동생 벌 되는 어린 신병이다. 공습을 피하는 대책으로 부대는 각 소대별로 움직였다. 공산당 조직의 특수성 때문에 서로 속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줄곧 눈치를 보고 슬쩍 농을 던져보기도 하면서 그날 밤 거기까지 다다랐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분대원 여섯을 밖으로 불렀다.
“동무들 여기까지 우린 모두 무사히 왔소. 우리는 임무를 잘 마친 셈이오. 내 지시에 잘 따라 준 것에 깊이 감사하는 바요. 우린 오늘 밤을 여기서 유숙합니다. 날이 새면 압록강을 넘어 만주 땅에 갑니다. 이제 가면 살아서 고향 땅을 다시 밟을 수 있겠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길이오. 나는 이제부터 동무들의 현명한 결단을 바라오. 나는 죽을 각오로 행동할 것이오. 이제 내가 구령을 붙일 때 자기 뜻대로 용감하게 행동하시오, 오래 생각할 시간이 우리에겐 없소.”
아버지는 한참을 그렇게 먼 하늘을 응시하였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자칫 살인날 지도 모른다. 미리 합의한 일처럼 분대원 여섯, 전원이 일시에 뒤로 돌아 몇 발작 앞으로 내디뎠다.
“아하아 동지들…”
“소대, 고향집 향해 백 보 앞으로 가앗…!”
아버지의 지난 이야기를 듣는 가솔들, 이 대목에 와선 모두 입에 침이 말랐다. 침묵이 한 참 흐른 뒤 아버지는 서랍에서 지도를 꺼내왔다. 아버지 신상에 있어 고비마다 저 지도가 함께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요?”
“어떻게 됐어요?”
“그중에 반대하는 사람, 없었어요? ”
저마다 침을 꿀꺽 삼키고 불안해했다.
“내 구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제히 뒤로 돌아섰다.”
그들도 서로 오래전에 같은 생각했다고, 반동분자로 의심받을까 내색하지 못했다 했다. 여섯 명 분대원은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는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공습을 피해가며 여기까지 헤매지 않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고, 앞으로 우리가 각자 집에 다다를 수 있는 길도 이 지도면 문제없소.”
아버지 소대원 여섯 사람은 정색을 하고 오던 길을 되짚어 걸었다.
“자, 자, 마음들 진정하고 내가 하는 말 잘 들으시오. 우리는 이제부터가 매우 위험한 길이 될 것이오. 우리 보다 더 뒤에 낙오된 자들에게 우리가 탈영, 도망자란 게 들통나면 죽는 길 밖엔 없소. 이제부터 사선을 넘는 거요.”
가끔 뒤에 낙오됐다가 따라오는 다른 부대원들과 맞닥뜨리는 경우, 그들이 이상히 여겨 소리쳤다.
“어잇, 동무들 지금 어딜 가는 거요?”
“아. 네, 우린 아무부대 제 몇 소대의 분댄데, 도중에 공습으로 부대가 흩어졌소. 우리만 너무 앞섰기에 뒤쳐진 대원과 합류해야 하오. 수고들 하시오.”
이런 말로 탈출을 감추고 위기를 모면하며 계속 남으로 걸었다. 제일 먼저 가까운 ‘북청’ 사병에게 지도에서 북청을 포함한 일대 쪽을 떼내 주었다. ‘신포’ 사병 이 씨에게도 그렇게 떼주고, 한 사람씩 네 사람을 먼저 작별했다. 제일 먼 ‘영흥’ 사병과 작별하게 될 때 걱정을 많이 했다. 그 무렵 영흥에 낙오돼 있을 낙오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부디 무사히 가게. 이제부터는 낙오병 같은 건 없을 걸세. 그러나 사람의 눈이 제일 무서운 것이 되네. 지방 빨갱이들 말이오. 평화가 오면 다시 만나세.”
아버지 지도는 토막토막 났지만 그 사병들이 살아서 무사히 제 어머니에게 돌아갔기를 비는 마음이라 했다.


기쁨도 잠깐. 국군이 다시 후퇴한다는 소문이 사실로 닥쳤다. 1.4 후퇴가 시작되었다. 마을엔 또다시 어수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버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국군을 따라 피난해야 한다. 이 마을에 공산당이 다시 권세를 잡으면 제일 불리한 사람이 부강 아버지 같은 불순분자, 탈영병일 테니 누구보다 먼저 국군을 따라 고향을 떠나야 했다. 가솔을 데리고 남쪽으로 갈려면 배가 있어야 한다. 아버지는 옛 지인들을 찾아 배편을 알아보지만 구할 수 없었다. 모든 동력선은 이미 국방군에 증발되고 남은 건 무동력선들뿐인데,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런 사정이고 보니 아버지에겐 가족을 태워 남하할 배가 없었다. 옛정을 잊지 않고 있는 사공 몇 집이 있어 그네들 배려로 부강이네는 가까스로 피난 짐을 대충 배에 실어놨다.
그들이 홍원항을 떠나던 날, 밤중에 자다 말고 불시에 “나간다 아아… 빨리 빨리…” 치안대원 고모부가 총부리를 들이대고 급하게 몰아붙였다. 마치 구약성서에서 이집트를 빠져나오던 밤, 히브리 족속의 상황을 닮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훤히 동이 트고 보니 부강이 아래 동생, 다섯 살 아이가 위 저고리도 안 입었다.
일단 홍원을 떠나 흥남, 서호진 항에 잠시 들렀다. 서호진 항구에 정박하는 하룻밤 동안 아버지는 전에 살았던 집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준비할 일을 지시했다. 엄마들에겐 솜이불을 잘라서 사공들에게 씌워줄 방한모자를 짓게 하고, 남정네들에겐 식량과 땔감을 싣도록 했다. 생존에 꼭 필요한 만큼의 물건만 배에 실었다. 뱃짐을 줄이는 일은 비장한 탈출 준비를 위해서였다. 아홉 살 부강이 눈에도 너무 다급한 정황이 깨달아지는 것이, 아버지가 그렇게나 아끼던 축음기판이 방이며 마룻바닥에 와르르 쏟아져 발밑에서 밟혀 아작나는데, 아버지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가끔 눈발이 날렸다. 부두에는 마지막 철수 선박 LST가 구름 떼 같이 모여든 인간들의 절규를 못다 싣고 닻을 끌어 올리고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북새통에 부강이네도 가랑잎 같은 목선에 다섯 가족의 생명을 얹고 출항했다. 기상 조건으로 봐선 바다로 나가 있던 배라도 서둘러 육지로 돌아올 판인데 눈발이 점차 굵어지는 저녁이지만 더는 지체할 형세가 아니었다. 가까이에서 포성이 접근해 오는 소리가 뚜렷했다. 가랑잎 같은 배들이 줄지어 항구를 빠져나가고, 아직도 인파에 묻힌 부두에선 군이 못다 가지고 떠난 무기들이 불길에 싸여 있었다.
축항 끝을 막 지날 때였다. 갑자기 한 청년이 물속에서 손을 올려 부강이네 뱃전을 잡았다. 그는 소리치고 애원했다.
“살려주세요 태워 주세요. 안 가면 난 죽어요…”
사공 한 사람이 달려가더니 청년이 거머쥔 손을 밟아 짓이겼다. 청년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물속으로 첨벙 떨어지더니 곧 멀리 사라져 버렸다. 아홉 살 부강이가 본 전쟁의 얼굴 중 한 장면이다. 축항을 빠져나갈 때만 해도 작은 목선들이 못짐을 잔뜩 싣고 부강이네처럼 올망졸망 피난대열에 함께했다. 배끼리 신호도 주고받으며 떠났다. 흐린 날씨 탓인가 항구를 떠나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완전히 어두워졌다. 바람이 적당히 불어와 부강이네 배는 돛을 두 개 다 펼쳤다.
이 배는 사람을 실어나르기 위한 배가 아니다. 근해 어부들이 노를 졌거나 돛으로 바람을 적당히 이용해 움직이는 무동력 배다. 선실이라야 생선을 담는 공간이다. 밑창에 막음대를 깔았고 그 아래, 바닷물에 닿는 우묵한 공간에는 조업 중에 갑판이나 틈새에 조금씩 스며들어 고인 물을 모았다가 펌프처럼 수작업으로 빼내게 설계되었다. 생선을 담던 칸에 (아버지의 선견지명) 며칠 전에 노랑태(황태) 다섯 바리를 맨 밑에 깔았다. 그 위에 여러 겹 가마니를 깔고 또 그 위에 차렵이불을 깔아 여자와 아이들을 앉혔다. 돛은 두 개, 하나는 이믈에 또 하나는 좀 더 큰 것으로 고믈에 새웠다. 노는 갑판 좌우 현에 각기 3개씩 도합 6개가 걸려 있다.
흥남항을 벗어난 배는 곧장 직진, 먼바다로 내달았다. 공해상으로 배질 할 것을 지시한 것은 부강이 아버지다.
“내 이리 댄창질은 처음입매다. 해안선이 아이보이니까디 어데가 어덴지 바이(전혀) 모르겠습매.”
도사공이 불안해 말했다.
“걱정 마세.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오. 조금 가다 보면 이유를 알게 될거요.”
부강 아버지는 나침반, 손전등과 함께 지도를 펼치며 도사공에게 설명한다.
“흥남철수작전은 무엇 때문이겠소. 동해안으로 진격한 남한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올라간 거요. 그런데 중부전선, 서부전선은 그만치 못했소. 갑자기 중공군이 가담했소. 그놈들은 인해전술을 펴서 남한군 허리를 가로 막았소. 그러니 먼저 북으로 진격한 연합군이 고립된 거요. 육지로 후퇴할 도리가 없어 배로, 즉 바다로 후퇴하는 거요. 우리 눈으로 보지 않았소? 흥남항에서…. 얼마나 다급한 후퇴였소. 포성이 들리고 부두에는 연합군이 미쳐 못 가져가는 군수물자, 무기를 불태우고 떠나는 것 말이오.”
바람은 돛을 적당히 밀어주었다. 노는 방향을 잡는 정도만 저으면 된다. 바다는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혔다.
“이 선생, 저기 저 불꽃을 좀 보시기요. 저가 어디쯤 될까요?”
“거 보시오. 내 말 했잖소. 육지 가까이 배질했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거라구. 육지서는 저렇게 피아간 백병전이란 말이오. 강원도 땅은 이미 공산군이 장악하고 있소. 이렇게 먼바다로 배질하지 않았다면 우리 배도 공산군의 포격을 면치 못했을 거요. 그보다 바람냄새 좀 이상하지 않소?”
부강 아버지는 갑판에 있는 남정네들에게 방한 모자를 쓰도록 일렀다.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모양의 모자. 마치 어린애 업고 두르는 케이프 같이 목을 감싸고 어깨까지 내리 덥혔다. 서로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물결이 점점 높아져 왔다.


원산 앞바다. 바람은 거세다 못해 미친 것이다. 바람에 질세라 파도 역시 심상치 않았다. 아버지는 심상치 않은 날씨에 더욱 긴장했다.
‘원산내기. 원산내기?’
아버지는 혼잣말을 되풀이했다.
‘참말 원산내기를 만난 거라면, 오늘 밤 이 바다에서 우리 생명을 건질 수 있겠는지. 여기까지 식솔들 끌고 와서 다 수장 시키는 게 아닌가? 하늘에 맡길 도리밖에 없다.’
아버지는 의연하려고 애썼다.
“바람이 심상치 않네. 내 여기서 키를 같이 잡아야겠소. 아무래도 아즈바이 혼자 힘으로는 이런 바람에 키를 제압하긴 어려울 것 같소.”
“그러시게. 아까부터 내가 그 말 할라고 벼르던 중이오 잘 됫슴매… 인제 안심이요.”
아버지의 합세로 도사공은 온갖 시름을 다 내려놓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걱정하는 것이 또 있다. 바다에 무수히 던져놨을 <어뢰>였다. 밤바다에서 어떻게 어뢰를 식별한단 말인가.
‘원산내기’ 뱃사공이면 한두 번 들어본 말일 것이다. 아무리 노련한 사공이라도 원산내기(폭풍)를 무서워한다. 순간순간에 맞게, 기지와 순발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배가 크던 작던 바람과 파도가 합세하는 힘에는 당할 도리없이 뒤집힌다.
“아이되겠습매. 밧줄로 몸을 동여맵시다.”
도사공과 부강 아버지는 바람에 함부로 떠밀리는 몸을 단단히 묶었다. 조금만 팔에 힘을 놓으면 키(Key)가 제멋대로 방향을 돌려버리기 때문에 힘을 빼지 않아야 의도하는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다.
“노르 뱃전에 모두 올려서 묶어라. 이제부터 바람으로 간다. 돛대 밑에 섰거라.”
두 개의 돛으로 각도와 높이를 조정해서 방향을 잡는다.
“야, 야들아 이믈 도츠 반 내리고, 고믈도츨 마이(많이) 올레라.”
“멀기(파도)다 아….”
쾽- 부글부글, 좌르르…. 집채만 한 파도가 다가온다. 배는 그 파도가 아무리 커도 정변 돌파다. 자칫 좌우 현에 받으면 영락없이 뒤집힌다.
“물, 물이 들어옵매, 물이요.”
한 개 파도 속을 뚫고 나간다. 이믈에 부딪힌 파도가 양 갈래로 갈라지며 고믈까지 덮으며 부서진다. 포말이 가라앉으면 갑판은 질벅거린다. 갑판에 널브러진 물은 어창 안으로 새 들어간다. 안에 누워 있는 사람 몸을 사정없이 적신다.
엄마가 이불 보따리 한 개를 끌렀다. 솜이불 한 채로 아이들과 당신이 물을 막고 누웠다. 함경도 겨울 이불은 목화솜을 장지 두 뼘 두께만큼 둔다. 그렇게 두꺼운 솜이불도 파도 서너 번 받고 나면 완전 물먹은 솜덩이가 되고 만다.
“젖은 이부르 내놓고서리 다른 것을 덥어요. 뱃짐을 덜어야 하오.”
겨우 끌어낸 이불은 바다에 내던진다. 이불 봇짐이 남아나지 못한다. 덮었다 버리고 또 다른 이불을 덮었다 버렸다.
“야들아 고믈 도츠 쪼끔 내려라”
“이믈 도츤 약간 오른쪽으로….”
“배에 물이 많은데 아이푸고 뭐히니 이 간나새끼들아….”
옛날부터 부자(父子)가 한 배에 타는 법은 없다란 말이 있다. 이처럼 분초를 다투는 위급상황에 닥치면 손이 좀 느린 선원에게 도사공의 명령은 곧잘 욕설이 섞이게 된다.
“멀기 온다(파도다) 아 아… 업드렷…”
쾽, 철썩 부글부글 좌르르. 그 와중에도 선실 안에서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돌배기 동생이 물을 함빡 머금어 저쪽 구석에 밀어 놓은 제 베개를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가져오라고 조른다.
“내 거야아, 내 거야… 으앙….”
엄마는 뱃멀미가 너무 심해서 토하고 또 토하고 기진맥진이다. 풍랑으로 배는 더없이 빠른 속력을 냈다.
“이렇게 달리다간 아침에 삼팔선 넘겠지비?”
“아마도 그럴 것 같소. 지금 우리 배는 150마력 발동선보다 더 빠른 것 같소.”
멀리 금강산에서 정말 불꽃이 튀는 것을 보는 남정네들은 가슴 가슴을 쓸어내렸다. 통천 해역을 지나면서부터 바람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파도역시 기세가 꺾이고 있었다. ‘원산내기’ 권을 벗어나고 있었다.
“이믈돛, 고믈돛, 둘 다 올려라.”
끄덕 삐끄덕…, 삐삐르르….
“날이 밝아온다. 조금만 더 기운 내자.”
“이제 막 삼팔선을 넘었소. 배를 해안 가까이에 붙입시다.”
갑판에서 남정네들 짐승울음 같은 소리를 질러댄다.
“인제 살았다아…”
선원들은 비틀비틀 갑판에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바닷물 포말이 얼굴에 하얗게 얼어붙었다. 하룻밤 뱃길인데 입술이 죄다 청어토막 같이 갈라지고 피가 맺혔다. 돛은 갈기갈기 찢어져 넝마가 돼 있었다. 고믈돛은 허리 부러져 덜렁거렸다. 간밤에 원산내기 앞에서 모두 수장될 뻔했다. ‘어뢰’ 한 발도 우리 배를 때리지 않았다. 하늘이 도왔다.
집집마다 가장지물(살림도구들)을 많이 바다에 내던지고 왔다. 부강이네 이불 보따리는 겨우 한 개 남았다. 어저께 초저녁 앞서거니 뒷서거니 흥남항을 같이 빠져나온 많은 목선들은 원산내기 시작 점에서부터 시야에서 몽땅 사라졌다.
‘모두 어떻게 된 걸까. 우리보다 더 빨랐을까, 아니면 잘못된 건가?’
한숨 돌리고 나니 그들의 안부가 걱정됐다.
“주문진이다. 등대가 보인다. 들어가자”
그야말로 부강이네 배에 탄 사람 중 한 사람도 낙실 없이 남한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주문진항엔 증발선, 거룻배, 어선에 피난민이 당도한 배 등등 접안할 자리를 잡기 어려웠다. 다행히 북에서 오는 배들은 별도 자리를 비워 놓고 있었다. 부강이네도 그 틈에 끼었다. 갑판에 있던 사람 한 명이 선창에 로우프를 던졌다. 군인 복장을 한 청년이 받아 고정 말뚝에 맸다. 제일 먼저 배에 오른 사람은 ‘헌병’이었다. 검은 바탕에 흰 색으로 ‘헌병’ 두 글자가 선명했다. 헌병 완장을 두루고 헌병 철모를 썼다. 검문검색을 한다 했다. 모두들 헌병을 두려워하는 눈치다. 부강은 잠시 고향 마을에서 두명씩 발마처 거리에 다니는 헌병을 본 적 있었다. 그때는 헌병이 무섭지 않았다. 반가운 사람이라 여겼다. 주문진 항구에서 만난 헌병을 사람들이 벌벌 떠는 까닭은 뭐란 말인가?
헌병들은 배에서 사람 모두 부두에 내리게 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몸을 샅샅히 훑었다. 남자들은 신분을 조사하느라 저만치 떨어진 임시 조사실이라는 건물로 데려갔다. 배에 오른 헌병들이 이믈칸에서 침고등어 한 가마니를 찾아냈다. 화장칸(부엌)에서 흰쌀 두가마니를 또 찾아냈다. 아버지, 아재들이 배로 다시 돌아오는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어스름 저녁녘에 시장에 갔던 엄마들이 배로 돌아왔다. 난생처음 보는 빠알갛고 몽실몽실한 과일,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고 멀미에 마음고생에 찌들었던 식솔들에게 그렇게나 맛 좋고 시원한 과일은 세상에 더 없지 싶었다.
‘홍시’! 북한 땅에 없는 ‘홍시감’! 죽을 고비 넘기고 당도한 이남 땅에서 부강이네를 반겨준 것은 사람이 아니다. 달고 시원하고 바알간 ‘홍시감’ 뿐이었다.
주문진항에서 아버지들은 반쯤 부러진 고믈돛을 수리했다. 넝마가 다된 돛풍을 오지오지(낱낱이) 기워서 다시 달았다.
“남선 바다는 북한 바다보다 순한 페이니까디 이걸로 잘 달개가며 배질을 해야합네다.”
주문진항을 떠났다. 포항을 향해 간다고 했다. 여섯 사람이 구령에 맞춰 노를 저으니 배는 제법 잘 달렸다. 고믈에 큰 돛은 쉬게 하고 이믈, 작은 돛 하나만 바람을 모으게 했다. 이윽고 포항 항구에 닻을 내렸다. 웬일인지 주문진항보다 몇 배나 큰 항구라는데 배가 별로 많지 않았다. 다들 떠난 것이다. 포항 시내 사정도 이미 전쟁의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 뚜렸했다.
“오늘 밤만이라도 여기서 좀 땅 냄새를 맡고 가세나. 우리 모두 뱃멀미에 지쳤소. 애들은 더 심하고….”
부둣가 근처 빈집, 반쯤 날아간 지붕 밑에 애들을 뉘었다. 어른들은 이 구석 저 구석 되는대로 온밤 눈발을 고스란히 맞으며 보냈다. 날이 새기 무섭게 군인 지프차가 골목 골목에 대고 소개령을 내렸다. 주문진 시장에서 사온 ‘납작보리쌀(눌린 보리)’을 좁쌀에 섞어 밥을 지었다.
“나쁜 놈의 새끼덜, 이거 어찌 어린 것들에게 멕이란 말이네. 설마 남조선 나라에서 흰 쌀을 다 뺐으라고 했겠습매? 저어덜이 피난민을 업신여겨 착복하는 걸게야.”
그랬을지 모른다. 원산 바다, 그 험한 순간에도 버릴 수 없었던 양식이다. 다섯 가솔이 언제까지 먹을지. 그 양식 다 떨어지면 누가 있어 양식을 도와줄까마는. 피난민에게 실낱같은 생명줄이나 진배없는 흰쌀 두 가마와 침고등어 한 가마니….
부강은 아홉 살 어린 마음에도 남한 땅의 첫인상이 그렇게 야속했다. 포항에서 부산까지 가는 동안 좁쌀에 납작보리 섞어 질게 지은 밥을 먹었다. 침고등어 대신 간장만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부강이는 기어코 갑판에 나와 앉았다. 배 칸 안에서 나는 냄새가 참을 수 없다고, 죽어도 선실엔 안 들어간다고. 배 칸 안에서는 생선비릿냄새에 나무 썩는 냄새가 섞였고, 페인트 부스러기까지 물에 풀어지며 합세하는 형용이 안 되는 냄새가 났다. 죽니 사니 할 적엔 멀미하기 바빴기 때문에 미처 냄새까진 느낄 새가 없었던 게다. 아버지는 예민한 딸애가 겪는 고통이 늘 안쓰러웠다.
흥남 공업지구가 폭격 당한 날 이후 전봇대에서 들리는 소리를 비행기 소리로 착각, 밤잠 못 자는 아이였고 배 칸 냄새로 또 고통받는 어린 것이 가여웠다. 부강을 홑이불 자락에 돌돌 말아 고믈돛대 아래에 앉혔다. 한갓지고 볕이 드는 자리다. 날씨 좋은 한나절 사공들은 오징어 낚시를 뱃전에 드리우고 배질했다. 산 오징어가 갑판에서 울그락 불그락 또 창자가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변장하는 것을 보며 아이는 오랜만에 화색이 돌아왔다.


드디어 부산항 영도에 정박했다.
모두 안전했다. 그날 밤부터 부강이 몸이 불덩이가 되었다. 갑판에서 밤낮 여러 날 있었던 탓이다. ‘빨리 집을 구해 아이를 편히 눕혀야겠다.’ 아버지는 왼종일 분주히 다녔다. 하지만 부산은 이미 피난민으로 포화상태라서 집은커녕 방 하나 조차 구할 수 없었다. 사경을 헤매는 아이를 살리려면 따뜻한 방이 있어야 한다며 아버지는 부산을 포기하고 ‘다대포’로 갈 결심을 했다. 어창 밑에 깔고 왔던 노랑태 다섯 바리를 헐값에 팔아 다섯 몫으로 나누었다. 이제껏 함께 죽을 고비 넘기고 살아온 다른 가솔네 집은 어쩔 도리가 없다며 배에 그냥 남기고 부강이네만 헤어졌다. 다대포 아이들은 이상하다며 부강이를 놀려댔다. 비행기가 그냥 지나가고 있는데 왜 무서워하고, 집안에 들어가 숨는지, 우스워 했다. 마침 다대포에 간이 진료실이 차려져 있어 아이를 업고 갔다. 나이 지긋한 의사 한 분이 청진기며 체온계를 아이 몸에 대 보시고 놀라 말씀하셨다.
“폐렴인데 너무 늦게 왔어요. 지금 이 진료실 약으로는 장담 못합니다.”
엄마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일으켰다.
“아 이 사람, 여기서 당신이 이러면 어쩐단 말이오. 우리가 정신 차려 최선을 찾아야지….”
“예, 하는 데까지 가 보십시다. 이 약, 시간 맞춰 먹이시고, 내일 다시 오십시오.”
다대포의 하루하루가 부모들에게 간이 타는 나날이었다. 어느 날은 의사가 아이가 못 알아듣겠거니, 커튼 너머에서 하시는 말씀…
“마음에 준비를 해 두십시오.”
아이를 업고 진료실을 나와 걸으며 엄마는 소리 내 울었다.
“어떻게 피난 온 길인데, 여기다 너를 두고 어떻게 우리만 고향에 갈 수 있겠느냐. 흑 흑 흑”
아버지는 ‘싱거 미싱’ 대가리를 릭셕크(배낭)에 메고 부산 국제시장에 가서 팔았다. 부강이를 보낼 때 입혀 보낼 옷감을 떠왔다. 엄마는 아이 머리맡에서 자주색 치마, 풀색 저고리를 밤을 새 지으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아이 모르게 닦았다. 받아온 약을 먹고 잠시는 아이 몸에서 열이 약간 내려가는가 싶다가 밤중이면 다시 불덩이요 간간이 의식을 잃기도 했다.
닷새째 되던 날 의사는 커튼 한 겹 사이에 부강이를 눕혀 두고 엄마에게 얘기하셨다.
“오늘 밤이 고비일 듯합니다. 이 약 연거푸 두 번 먹이세요. 내게 있는 약이 이게 전부예요. 여기 진료실에 오는 약은 ‘운크라’란 국제기구에서 오는 건데 아직….”
아이 머리맡에 새로 지은 옷 한 벌을 놔두고 부모는 날밤을 샜다. 훤히 동트는 그때, 아이는 부스스 눈을 부비며
“엄마아….”
“부간아아, 정신 드냐?”
와락 아이를 끌어다 안았다. 열이 내리고 있었다. 그 밤을 넘겼다. 고비를 넘긴 것이다. 겨우 회생하었다. 북한에선 들어보지 못한 ‘운크라’가 아이를 살렸다. 진료실 고마운 선생님이 부강이를 살려 주셨다. 아무 뜻도 모르는 ‘운크라’에서 보내 주는 약으로 부강이가 살아났다는 것이다.

다대포는 뒷동산에 올라가면 낙동강이 보이는 곳이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접어 두었던 지도를 햇볕에 말리고 아랫목에 깔아두어 구김살을 펴곤 했다. 그 지도는 전에도 부강이가 몇 번 본 적이 있는 지도다. 인민군에서 도망해 올 때 그 지도가 목숨을 살렸다고 했고, 원산 앞바다를 넘어 부산까지 갈 때에도 그 지도가 여러 번 목숨을 살려 주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지도는 수첩같이 보였다. 사이렌 식으로 접은 것인데, 한쪽은 내륙의 것이고 다른 한쪽은 바다를 그린 것이다. 글씨는 모두 일본 문자였지만 분명 우리나라 지도였다. 5십만 분의 1 지도라는 아버지의 설명이 어린 부강에게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하지만 아버지가 인민군에서 도망쳐 올 적에 압록강 근처에서부터 함경남도 홍원집까지 초행길을 그 지도 한 장에 의존하여 정확하게 올 수 있었다는 것과 폭풍 속에서 해안선이며 섬과 항구를 찾아 배질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부강에게 의미를 갖게 했다.
부강은 휴전된 속초에 다 부모님이 정착하면서 어린 시절, 청소년기까지 속초를 제2의 고향으로 성장했다. 서울살이를 하면서도 왠지 속초가 늘 걱정됐다. 일기예보에도 귀 기울이고, 풍랑주의보엔 마음 졸이고. 어부로 사는 친구들돠 그 부모님들의 사는 형편에 늘 연민이 있어 왔다.


지난해 부터 새삼스레 아버지의 지도가 생각났다. 한일 어업 마찰이 협상테이블로 이어질 즈음, 속초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울하기만 했다. 그곳 어부들은 생계에 큰 타격을 예상한다고 했다. 한일 관계는 언제나 찜찜하고 기가 막힌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떼를 쓰더니, 조업 구획을 들고나와 금 긋기를 해댄다. 한ㆍ일 어업 마찰은 결국 텃밭 싸움인 셈인데 잘될까 염려스러웠다. 우여곡절 끝에 협상은 체결되었다. 표면상으로 보자면 그럴듯하게 금을 긋고 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어부들은 손을 놓고 넋두리를 해댔다.
“관리들이 뭘 아느냐. 우리에게 물어봤어도 어디다 어떻게 금을 그어야 하는지 말할 수 있다. 이번 협상에서 금 그은 곳은 고기떼가 지나다니는 곳을 모조리 일본 쪽 바다로 넘어가게 한 것이다. 고기들도 다니는 길이 있다. 일본은 그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제법 넓은 해역을 따냈다고 해도 그건 빛 좋은 개살구다.”


아버지의 지도가 자꾸 생각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그 지도는 적어도 1910년대 이전에 제작됐을 것이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할 목적으로 제작되었을 테니까. 남의 땅을 강점하고 그곳 물산을 수탈하기 위해서 그들은 아버지의 지도처럼 정확하고 세밀한 준비 자료를 마련해 놓은 족속들이다. 지금은 그로부터 또 얼마를 발전해 온 세월인가. 우수한 수중 장비와 통신기기 그리고 컴퓨터의 시대다. 아버지의 지도 수준으로 지금까지 나아갔다면 지금쯤 그들이 갖고 있는 한반도 지도는 속초 앞바다에 엎드려 있는 암초까지라도 몇 개가 어디에 숨어 있는가를 담고 있을 것이다. 욕심 많은 이웃이 내 집 앞 텃밭을 넘보고 잣대를 교묘히 들이대고 금을 긋는 지경인데, 우리는 남과 북, 여와 야가 집안싸움만 하고 세월을 낭비한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속초 어부들의 소원은 북방한계선 내지 어로 저지선을 한 눈금만 더 올려줬으면, 통신장비가 좀 나아졌으면, 배가 조금만 더 컸으면, 냉동 수단이 얼음이 아니라 자체 냉동이 가능했으면 하는 것들이었다. 지금 그 소원은 다 이루어졌다. 계절별로 한시적이긴 하지만 어업 구역은 북방한계선에 근접한 ‘저도어장’까지 확장됐다. 기상예보도 옛날보다 정확하고 배마다 GPS를 장착했다. 감선 정책에 150톤 그 이상 수준이다. 얼음덩이를 무겁게 싣고 떠나지 않는다. 냉동자동화가 되어 있다. 식재료는 손쉬운 인스턴트가 얼마든지 있어 편하다. 그러나 개선된 여건을 가지고 그물을 던질 바다를 잃었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부들에게 바다는 더 이상 희망이 아니라고 한다.
비단 어업뿐이랴. 지금 우리는 자식은 끔찍이 사랑한다 하면서 그들의 텃밭도 못 지켜 내는 이 땅의 부모로서 부끄럽기 한이 없다. ‘과연 우리 세대는 그 옛날 아버지의 지도보다 더 훌륭한 지도를 후세들에게 넘겨줄 수 있는 부모이기나 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