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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소설] 별이 빛나는 밤 / 강호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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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693회 작성일 19-12-2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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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밤



황소자리는 오리온자리 동쪽에 있는 별자리다. 별들이 황소의 뿔처럼 배열되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밤하늘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별자리는 대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에 의해 이름이 지어진다. 이를테면 황소자리는 올림프스의 주신인 제우스로부터 비롯됐다. 제우스는 아름다운 페니키아의 공주 유로페(Europe)에 반했다. 제우스는 황소로 모습을 바꾸어 유로페를 크레타 섬으로 납치해 아내로 삼고 크레타섬과 건너편 해안(유럽)을 유로페에게 주면서 유럽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오리온 별자리도 마찬가지다. 오리온은 바다를 다스리는 신 포세이돈의 아들이다. 인간계에서 가장 걸출한 사냥꾼인 오리온은 사냥의 여신이자 달의 여신이기도 한 아르테미스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해의 신인 아르테미스의 오빠, 아폴로는 이를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다. 어느 날, 남매는 강가에서 사냥에 열중하고 있는 오리온을 과녁 삼아 활쏘기 내기를 한다. 오리온인 줄도 모르고 정확하게 화살을 쏘아 자기 연인을 죽인 아르테미스는 슬픔과 비탄에 빠진다. 이를 불쌍히 여긴 제우스가 오리온을 하늘로 올려보내 별자리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황소자리 중에서도 기현과 소연의 관심을 끈 것은 히아데스와 플레이아데스성단이다. 황소자리 배면에 보이는 두 성단은 다른 성단보다 유난히 젊고 밝은 별들이 많아 칠흑처럼 까만 우주 공간에 보석을 뿌려 놓은 것 같았다. 그곳에서는 별들이 항상 새로 태어나고 또 폭발해서 소멸되고 소멸된 성운들이 다시 뭉쳐 새로운 별로 탄생한다.
별자리를 관측할 때마다 기현이와 소연은 천체망원경의 초점을 황소자리, 그중에서도 플레이아데스성단에 맞추었다. 구름 없이 맑은 날에는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별자리다. 두 사람이 그 별자리에 주목하는 이유는 구체적으로 딱히 무어라고 찍어서 말할 수는 없는 신비스러움 때문이다.
그 시절, 두 사람은 심한 갈증을 느낀 것처럼 밤낮없이 섹스에 몰두했다. 오직 그것밖에 할 일이 없기도 했다. 보안사와 경찰의 일급 수배자가 된 기현은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자신의 집을 몰래 빠져나와 소연의 자취방으로 숨어들었다. 소연은 같은 천문기상학과의 새내기 후배였다. 기현은 국립천문대 단체 현장실습 때 소연을 만났다. 갸름하고 작은 얼굴에 피부가 유달리 희고 고왔다. 수줍게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치아와 알맞게 도톰한 입술이 루주를 바르지 않아도 붉었다. 투피스나 엷은 원피스를 입었을 때 드러나는 몸매가 고혹적이었다. 남학생들의 관심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기현도 자신의 시선이 자꾸만 그녀 쪽으로 쏠리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다행히 소연도 기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로 발전한 것은 순식간이다. 몇 번의 가벼운 데이트 끝에 소연이 기현을 자신의 자취방으로 초대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여자가 남자를 자신의 내밀한 거주 공간에 초대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허락하겠다는 간접적인 의사 표시다.
소연이 손수 차린 저녁을 먹고 상을 물린 후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사람은 서로 와락 껴안았다. 서투른 키스가 끝났으나 무언가 허전했다. 그녀가 대담하게 스스로 옷을 벗었다. 상의를 벗고 팔을 뒤로 돌려 브래지어 고리를 풀자 봉긋하고 탐스러운 하얀 젖가슴이 드러났다. 선명한 핑크색 젖꼭지가 팽팽하게 도드라졌다. 치마를 벗고 다음으로 주저 없이 미끈한 두 다리를 치켜들고 팬티를 벗어 내렸다. 이내 잘 빚어진 조각같이 아름다운 그녀의 눈부신 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그제서야 자신의 행동에 부끄럼을 느꼈는지 소연은 몸을 움츠리고 두 손으로 소복이 드러난 까만 거웃을 가렸다. 그녀의 아래는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다. 기현도 허겁지겁 옷을 벗어 던지고 소연의 배 위에 몸을 실었다. 기현의 우람하게 발기된 크고 딱딱한 음경이 그녀의 질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턱을 치켜올리며 외마디 비명을 올리며 매달리듯 양팔로 기현의 등을 세차게 끌어안았다. 기겁을 한 기현이 몸놀림을 멈췄다. 소연은 겁먹은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현을 올려다보았다. 서툰 기현의 몸짓으로 그녀는 자신이 기현의 첫 여자라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소연에게도 역시 기현은 자신의 첫 남자였다. 아픔을 참으며 그녀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파요 천천히요.’ 두 사람은 그렇게 첫 경험을 공유했다. 이후, 날마다 섹스에 몰입했다.
자취방 건물 옥상도 두 사람이 섹스를 나누는 은밀한 장소다. 한차례 폭풍 같은 섹스가 끝나면 서로의 손을 잡은 채 뜨거웠던 몸을 식히며 반듯이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은 낮과는 다르다. 낮 동안 최루가스로 희부옇던 하늘에 초롱초롱한 무수한 별들이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황소자리로 향했다.
“선배! 저기, 저 별을 제 별로 할래요. 오른쪽에 있는 별은 선배 별로 하세요.”
소연의 손가락 끝이 아득히 먼 우주 공간의 황소자리에 있는 플레이아데스성단을 가리켰다. 성단의 중심을 약간 벗어 난 외곽에 두 개의 별이 무언가 서로 속삭이는 것처럼 반짝였다.
학교는 휴교했지만 소연은 핑계를 대고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기현을 대신해서 외부의 동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 때문이다. 연일, 광화문과 종로 거리는 파렴치한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와 독재를 성토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와 함성으로 들끓었다. 이를 저지하려는 투구를 쓴 전경들의 모습과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때가 두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게이트 자동문이 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향했다. 이미 펜스 앞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직이나 싸인 펜으로 국어나 일어와 영어로, 찾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피켓을 손에 든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입국 게이트에서 흔히 보는 공항 풍경이다.
도착 출구에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은 화물이 거의 없거나 달랑 어깨에 가방 하나를 둘러멘 이들이다. 아는 얼굴들이 나타나자 저마다 큰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펜스를 넘어 달려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들 같았다.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서로 얼싸안고 얼굴을 비볐다.
세관 직원의 화물 검사를 마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시 밀려 나왔다. 여기저기서 반가운 환호성이 터졌다. 한바탕 작은 소란이 있은 후, 갑자기 왁자하던 출구가 휭- 하니 비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갈 길을 재촉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문은 닫히지 않았지만 이제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 교수는 혹시나 남 박사가 비행기 출발 시간을 놓친 것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탑승자 명단에 분명히 이름이 들어 있었고 출발 직전에는 전화까지 받았다. 하릴없이 출구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데 그러고도 한참 만에 남 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터 두 대에 골프 가방과 대형 화물이 가득 실려 있었다. 남 박사는 바바리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두 손으로 카터를 밀면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이 교수와 시선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며 카터를 잡은 한 손을 놓고 팔을 높이 치켜들며 손을 흔들었다.
그제서야 이 교수는 남 박사가 다른 사람보다 늦게 나온 이유를 알았다. 대부분의 이삿짐들은 이미 두 달 전에 선편으로 도착했다. 이삿짐이라는 것이 자신이 사용하던 중고나 다름없는 생활용품 몇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천문관측을 위한 망원경과 기상관측을 위한 부대 장비들이었다. 이번에 남 박사가 직접 챙겨가지고 온 것들은 선편으로 보내면 파손이 염려되는 카메라나 망원경 본체 같은 디테일한 전자 장비들이다.
남 박사가 영구 귀국 의사를 밝힌 것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기상기구(WMO: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 회의에서다. 유엔 산하에 있는 세계기상기구는 나라와 이념을 뛰어넘어 세계가 서로 평화를 모색하고 협력하는 기구다. 일 년에 한 번 씩 제네바에서 만나 규칙을 정하고 새로운 정보와 기술을 공유한다. 지구 대기의 흐름을 연구하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기상업무의 특성상 어느 한 나라만으로는 이 목적을 수행할 수 없다. 세계적인 공조가 필수적이다.
이 교수는 기상청의 패널 자격으로 이 회의에 참석했다가 그곳에서 전혀 뜻밖에 남 박사와 만났다. 남 박사는 미국과 나사(NASA)의 대표 자격이었다. 그동안 인터넷이나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긴 했으나 직접 얼굴을 대면하기는 10여 년 만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다.
첫날 공식회의가 끝난 저녁 시간, 두 사람은 호텔 지하의 바에서 따로 만났다. 여러 일정과 각자 소화해야 할 일들 때문에 회의장에서는 그저 손을 잡고 인사를 건넸을 정도였다. 남 박사가 먼저 와서 바텐더가 서빙하는 카운터에 앞에 앉아 있었다. 초저녁이어서 술을 마시기에는 이른 시간인지 넓은 바 안은 썰렁할 만치 손님이 적었다. 그냥 기다리기가 심심했던 남 박사는 이미 손에 스카치위스키로 보이는 컵을 들고 홀짝거리며 이따금 출입구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이 교수가 출입구에 모습을 보이자 빠르게 몸을 돌려 의자에서 일어났다. 환하게 웃음 띤 얼굴로 성큼성큼 이 교수 쪽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휴스턴에서 잠깐 만난 뒤, 다시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두 사람은 얼음판같이 살벌하고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의 한 시대에 친구로, 또 동지로 젊은 투지를 함께 불태웠다.


기현이 당국에 체포된 것은 학생데모를 같이했던 동료의 밀고 때문이다. 성일이라는 친구는 오래전부터 소연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소연이 기현의 여자인 것을 알면서도 소연의 주변을 얼쩡거렸다. 처음부터 그를 믿지 말았어야 했다. 시국이 한 치 앞을 가름 못할 정도로 과격해지고 있을 때였다. 웬일인지 그때까지 방관만 하고 있던 성일이 데모에 합세하면서 빠르게 기현과 두영에게 접근해왔다. 그전까지는 학교에서 거저 인사만 나누는 사이였는데 데모를 같이 하게 되면서 동지적 관계가 되었다. 데모가 끝나면 무교동 낙지 골목에서 어울려 같이 술도 같이 마셨다. 이 자리에 소연도 자주 합석했다.
급기야 기현이 현상금과 일 계급 특진이 주어지는 당국의 일급 수배자로 밖으로 자유롭게 나다닐 수 없게 되자 소연이 기현을 대신해서 메신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소연은 같은 일로 밖에서 성일을 몇 차례 만났다. 회합 장소와 날짜 같은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형사들이 소연의 자취방으로 들이닥쳤다. 민망하게도 두 사람이 섹스를 하고 있을 때였다. 기현은 겨우 팬티 하나만 달랑 입은 채 보안사 요원들에게 수갑이 채워져 밖으로 끌려 나왔다. 골목길 담 모퉁이 저쪽에서 성일이가 형사들에게 끌려 나오는 기현을 지켜보고 있었다. 묘한 미소가 성일의 얼굴에 떠올랐다. 끌려가는 기현의 일행이 사라지자 성일은 그들과 반대 방향의 골목길로 사라졌다. 훗날 그가 학생들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당국이 학교에 심어 놓은 프락치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보안사로 끌려간 기현은 초죽음이 되도록 맞고 고문당한 후 강제로 입대 당했다. 군 복무 31개월 동안, 최전선 GOP에서만 근무했다. 휴가는 물론 외출 한 번도 없이 밖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그가 제대를 하고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복학생으로 남은 학기를 마쳤다. 국내에서도 일자리가 있었으나 그는 바로 뉴욕에 있는 대학에 입학 허가서와 함께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쓴 「지구의 권계면과 성층권 사이 기체입자 운동 분석」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은 관련학계에서 대기물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로 평가받았다.
국내의 명문 대학에서 교수 자리 제의가 왔으나 모두 거절했다. 기현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떠나온 조국에 환멸을 느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으나 나라가 남북으로 갈리고 같은 민족끼리 서로 수백만을 죽이고도, 아직도 그 현실은 진행 중이었다. 공산국가들이 줄줄이 몰락되는 것을 보면서도 공산주의에 경도된 나라가 그의 조국이었다. 한국의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영달을 위해서 나라를 결딴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자 남 박사는 주저하지 않고 오케이했다. 세계의 첨단 우주항공분야를 관장하는 미국의 나사에서 자국의 인재가 아닌 아시아계 인물을 연구원으로 위촉하는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우주 공간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일은 기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지구는 지면에서 13킬로미터 고도까지가 공기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고도가 권계면이다. 이 고도는 항상 일정한 것은 아니다. 적도와 극지방, 그리고 계절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공기의 밀도는 더 가변적이다. 일반적으로 지구 대기의 흐름은 고기압에서 저기압 쪽으로 이동한다. 이것이 바람이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이 바람의 방향을 바꾼다. 때문에 우주 공간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기 위해서는 대기과학과 기상의 연구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여객기의 조종사는 사람을 태우거나 화물을 실을 때, 당일의 공항 기상 상태와 항로상과 도착 공항의 기상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바람의 방향이나 공기의 밀도에 따라서 승객과 화물의 적재량이 달라진다. 고기압일 때 비행기의 날개에 가해지는 양력은 더 강해지고 비행기의 이륙에 탄력이 붙는다. 저기압일 때는 정반대의 현상이 된다.
로켓에 인공위성을 실어 우주 공간에 쏘아 올리는 일도 근본적으로는 같다. 나사에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이같이 중요한 일에 남 박사가 스카우트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남 박사의 존재가 탁월했다는 반증이다. 그는 불과 6년 만에 나사의 대기 기상 분야 팀장이 되었다.


반가운 인사가 끝난 뒤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마침 다가온 바텐더에게 남 박사는 이 교수의 손에 들린 컵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세임!” “오케이!”
사람 좋아 보이는 백발의 바텐더가 웃으면서 이내 스카치위스키가 담긴 컵과 얼음 그릇을 가져왔다. 남 박사는 잔 속에 얼음 두 조각을 넣고 가볍게 잔을 흔든 뒤 입으로 가져갔다. 한 모금 술을 넘긴 뒤 이 교수를 바라보았다. 반가움이 가득 담긴 시선이다.
“가만있자. 우리 이게 몇 년 만이지?”
“휴스턴에서 보고는 처음이지. 한 10년 됐나?”
“그래, 꼭 올해로 십 년이야. 왜 우리 속담에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 정말 반갑다. 우리 건배하지. 정말 반갑다.”
“그래 정말 반갑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잔을 마주 부딪쳤다. 이 교수는 친구의 눈에 살짝 눈물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남 박사는 오래 잊고 있었던 고국에서 온 친구를 만나자 그동안 애써 머릿속에 묻어두었던 지난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이 교수는 친구의 눈물을 못 본 척하고 대신 술잔을 들었다. ‘건배’하고 남 박사의 잔에 술잔을 부딪쳤다. 투명하고 맑은 소리가 실내에 퍼졌다. 이 교수는 두 사람이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팔을 걸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 교수는 학회 일로 뉴욕에 갔던 길에 귀국을 하루 미루고 일부러 시간을 내 남 박사를 만나려 휴스턴으로 갔었다. 실의에 빠져 폐인 같은 모습으로 남 박사가 서울을 떠난 후, 십 년 만이었다. 그동안 메일 같은 것으로 서로의 일상적인 안부를 주고받았으나 직접 그를 만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만나면 참으로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한 차례 반가운 긴 포옹과 수인사가 오간 다음 잠깐 동안이지만 무언지 모를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그 침묵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소연이 남기고 떠난 어두운 그림자 때문이다. 이 교수는 서울에서 소연의 근황을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으나 남 박사가 묻지 않는 이상 스스로 이야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따금 주고받은 전화에서조차 남 박사는 단 한 번도 소연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좋은 소식이든 아니든 소연의 이야기는 남 박사에게는 금기다. 어색함을 들기 위해 이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생뚱맞게 지금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북한의 핵 개발로 화제를 돌렸다.
“북한의 핵 개발 말이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정말로 김정은이가 핵폭탄을 터뜨릴 것 같아?”
남 박사는 대답 대신 입가에 조금은 냉소가 느껴지는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를 리 없다. 이 교수는 남 박사의 태도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거리감을 의식한다. 아무리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고 이제 한국과는 무관하다 해도 남 박사가 한국이 처한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태도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교수의 이런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 박사는 컵에 남은 술을 마저 홀짝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다시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이 교수를 바라보았다.
“안심해도 돼. 한국에서는 금방이라도 핵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법석이지만 그건 정치하는 놈들의 정권 유지를 위한 술책일 뿐이야. 왜, 우리 경험하지 않았어. 박정희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한 달에도 두세 번씩, 간첩 사건과 휴전선 침범을 조작하고 침소봉대하면서 공안 정권을 획책했던 거 말이야.”
남 박사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바텐더를 불러 술 한 잔을 주문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저놈들 말이야. 핵무기를 천개 만개를 가졌다 해도 절대로 핵을 터뜨릴 수 없어. 만약 저들이 핵을 터뜨린다면 공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그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어. 그런데도 핵폭탄을 계속 만들고 있는 것은 체제 유지를 위한 벼랑 끝의 발악이야. 저들은 언제 망해도 망할 놈들이지. 한국에서는 정치하는 놈들이 어쩌구 저쩌구들 떠들어 대는 것 같은데 밖에서 보면 다 보여. 마치 우주 공간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야.”
“자네 말처럼 그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다는 게 우리가 처한 현실 아닌가. 한국에서는 지금도 폭삭 망해버린 공산주의가 어처구니없게 한국에서 되살아나서 공공연히 북쪽을 두둔하며 활개를 치고 있는 중이야.”
국내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는 대화가 오갔지만 막상 중요한 이야기는 빠져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국내에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이르면 두 사람의 대화가 겉돌았다. 이제 20년 저쪽의 아득히 먼 일이 되긴 했지만 남 박사는 학생운동을 같이했던 친구들의 동향이 궁금하기도 할 텐데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의식적으로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이 교수는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남 박사가 아직도 깊은 수렁 같은 절망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돌변한 소연의 배신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소연의 이유 모를 배신은 남 박사에게 있어서 죽음이나 다름없는 고통이었음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당시 그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사랑하는 사이였고 매우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 박사는 소연에 대한 단 한마디의 말도 입에 담은 적이 없다. 그 절망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교수는 친구의 절망을 깊이 공감하면서 시리도록 마음이 아팠다. 그는 소연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없었다. 잘못 이야기를 꺼내면 남 박사의 묵은 상처를 다시 건드리는 것이 될 것 같아서다. 비록 친구라 해도 남녀 간의 애정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제, 모든 것이 너무 늦었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사실관계는 밝힐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남 박사가 오해를 풀고 깊은 절망에서 벗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기현이 체포되어 강제입대를 당한 지 거의 반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기현의 행방을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강제 입대를 당해 어느 전방부대에서, 휴가는 물론 외출 외박 일체를 금지당한 채 구금상태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만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즈음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소문이 학생들 사이에 나돌기 시작했다. 소연이 성일과 사귀고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어서 두영은 소연 본인에게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두영이가 믿건 말건 소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구체적인 양상을 띠어갔다. 소연이 성일과의 결혼을 위해 학교를 휴학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던 무렵, 두영은 소연으로부터 만났으면 좋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약속한 커피 전문점에 먼저 나가서 기다렸다. 임신 6개월쯤 돼 보이는 배가 부른 여인이 두영이 있는 자리로 곧장 다가왔다. 가까이 올 때까지 두영은 그 여인이 소연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무렇게나 뒤로 질끈 묶은 머리에 얼굴은 창백하고 초췌했다. 한때, 전교 미인으로 알려진 소연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소연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선배! 저예요.”
두영은 소연의 손을 잡은 채 멍하니 바라보면서 말을 잊어버렸다. 소연이 두영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면서 말했다.
“선배, 저 좀 앉겠어요.”
그제서야 두영은 소연이 임신부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황급히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라는 두영의 물음에 소연은 피곤한 듯 다시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선배! 실은 그게 말이에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소연의 눈에서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르 흘려 내렸다. 머리를 숙이고, 터져 나오려는 울음소리를 죽이느라 애쓰며 한참동안 어깨를 들썩였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머리를 들었다. 간신히 침작을 되찾았다.
“성일 선배 있잖아요. 그 선배가…”
“그 자식이 어쨌다는 거야?”
두영은 소연의 말을 황급하게 자르고 다급하게 다음 말을 재촉했다. 성일의 이름을 듣는 순간, 무언가 짚이는 게 있었다.
“성일 선배가 제 자췻집을 찾아왔어요. 기현 선배의 일로 의논할 일이 있다면서요.”
“그래서?”
“저 말이에요. 그 선배에게 당했어요.”
그 말끝으로 소연은 얼굴을 감싼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가 없었다. 기현을 핑계로 성일이가 그녀를 찾아온 날, 오랫동안 그녀를 사랑했노라면서 갑자기 야수로 돌변했다. 옷이 찢기고 반 기절 상태인 자신의 배 위에서 헐떡거리며 자신을 유린하고 있는 성일의 야차 같은 얼굴을 보면서 소연은 어느 순간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
소연과 성일의 결혼 소식을 두영은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후 들었다. 학교를 졸업한 성일이 신군부 출신 국회의원의 보좌관이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였다. 몇 년 후에는 국회의원이 된 성일이 티브이에서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 권력을 잡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산주의를 추종했던 좌파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평탄치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혼생활 1년 조금 지나서 별거에 들어갔고 결혼 7년 만에 합의 이혼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두 사람 사이의 초등학교 1학년인 딸이 있었다. 소연은 결혼과 함께 포기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전에 다녔던 천문기상학과에 다시 등록을 했다.


이 교수는 제네바에서 남 박사와 헤어지기 전에 그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귀국 의사가 전혀 없던 그가 정년으로 나사를 퇴직하게 되면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뜻을 내비쳤던 것이다. 무언가 이제 그의 마음속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실제로 남 박사는 정년을 3년 앞둔 시점에, 이 교수에게 이 메일과 전화로 다시 자신의 귀국 의사를 밝혀 왔다. 동시에, 영구 귀국을 위한 여러 가지 부탁을 해 왔다. 그 부탁 속에 남 박사가 기거할 집을 짓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집을 지을 장소로는 해발고도가 높고 도심과 떨어진 공기가 맑은 지역일 것을 강조했다. 가능하다면 철원이나 파주 쪽의 휴전선과 가까운 지역이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함께 보내온 설계도는 평범한 주거 시설이라기보다 흡사 규모가 작은 천문대 같았다.
이 교수는 차를 몰아 곧장 남 박사의 집이 있는 파주로 향했다. 일 년 전에 공사를 시작한 집은 이미, 인테리어 등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지고 정원의 조경공사도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그동안 이 교수는 이 집을 짓는데 많은 신경을 썼다. 주말마다 공사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여기저기 집을 꼼꼼히 둘러본 남 박사는 무척 흡족한 얼굴이었다. 마침내 무언가 이뤄냈다는 표정이었다. 새삼 이 교수의 손을 움켜잡았다.
“야아! 이 교수. 집이 너무 훌륭하고 멋져. 꼭 이런 집을 가지고 싶은 것이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당신이 내 꿈을 이뤄 줬어. 정말 고맙네.”
“고맙긴 뭐가? 나는 자네가 지시한 대로 한 것뿐인데 칭찬이 너무 과하네.”
이 교수가 쑥스럽게 웃었다. 두 사람은 그날 저녁, 파주 시내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소주를 곁들인 불고기로 식사를 하면서 그 옛날, 광화문의 낙지 골목을 생각했다.
그날 밤, 이 교수가 서울로 돌아가자 남 박사는 짐 속에서 미국에서부터 가져온 망원경을 꺼내 3층, 돔으로 올라가서 거치대에 올려놓았다. 돔의 스위치를 누르자 하늘을 가리고 있던 덮개가 열렸다. 쾌청하게 맑은 밤하늘이 가득 다가왔다. 청색 밤하늘을 배경으로 수많은 별들이 초롱초롱 빛났다. 남 박사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망원경의 초점을 황소자리의 플레이아데스성단에 맞췄다. 그리고는 아! 하고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보석 같은 수많은 별들 사이에서도 소연과 그의 별이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같은 시각이었다. 소연도 플레이아데스성단에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우주는 시간이 흐를수록 팽창한다. 따라서 별과 별들 사이의 거리도 멀어지게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별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연은 오늘 밤 따라 기현의 별이 더욱 밝게 빛나고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