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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수필] 2019년 <갈뫼> 문학기행 소회 / 이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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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07회 작성일 19-12-24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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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갈뫼> 문학기행 소회



2019년 <갈뫼> 문학기행 장소를 백제문화권으로 정했다. 신라ㆍ고구려 문화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고 할 수 있지만 백제라는 국가와 문화에 대한 지식은 오히려 적다 하겠다.
2019년 8월 23, 24일 1박 2일 여정으로 일행 17명이 전세 버스에 탔다. 우리나라는 과히 도로 공화국이라 하리만치 동서남북으로 뻗은 길이 사통팔달이다. 한데 강원도에서 충청도로 가는 길은 아주 멀다. 피타고라스(두 변의 합은 나머지 한 변보다 크다) 정의를 들먹이지 않아도. <갈뫼>의 회원 수는 총 30명인데 고작 17명만이 동행한다. 장소는 쉽게 정하지만 날짜정하는 일이 늘 문제다. 이리 정하면 이런 사람이 못 간다고 하고 저리 정하면 저런 사람이 못 간다 한다. 세상사 어느 단체나 한결같이 길 떠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쉬운 마음으로 떠나고 배웅한다.
충청도 땅에 들어서니 산세부터 강원도의 그것과 다르다. 그리 높은 산도 없고 봉우리는 한결같이 뭉근하니 느긋하다. 충청도의 심성이 그렇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제일 먼저 당도한 곳은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 지역이다. 백제의 왕과 왕족의 묘가 군집해 있는 곳, 동쪽에 1~4호분, 서쪽에 무렬왕릉과 5~6호분이 있다. 1~5호분은 굴방식인데 무렬왕릉과 6호분은 벽돌로 쌓았다. 당시 중국 묘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안다. 특히 무렬왕과 왕비의 관은 일본산 금송으로 만들어진 사실로보아, 백제의 축기술과 주변 국가와의 교류를 파악할 수 있다. 떠나기 전에 우리는 관광사와 숙의하여 꼭 가봐야 할 곳, 여러 군데를 정했다. 동선의 최대한 효율을 감안해서 정했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당도하면 예정대로 완벽하게 돌아보지 못하곤 한다.
우리는 첫날, 첫 장소인 송산리 고분군 터에서부터 발을 쉽사리 뗄 수 없었다. 천오백 년 시간을 건너뛰어 백제와 마주하는 걸음, 어찌 어설프게 스치고만 지나치랴. 인솔 선생님은 간간히 재촉하건만 일행은 누구 하나 반응하지 않는다. 한 점 유물이라도 더 자세히 보려고 못 들은 체한다.
모형전시관은 무덤 내부 구조와 유물 배치 상태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고분의 축조 과정, 발굴 과정 등, 역사적 가치를 재확인하는 기회였다.
백제는 기원전 18년~기원후 660년까지 약 700년간 존재했던 고대국가다. 2015년 7월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을 비롯한 부여 익산의 백제유적 8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특히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 웅진시기(475~538년)의 왕릉군으로서 무덤의 구조화 유물이 백제문화의 우수성과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교류를 증명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우리가 가장 오래 머물렀고 놀라워 했던 곳은 무렬왕(백제 25대)과 왕비의 능 전시관이었다. 삼국시대 고분 중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왕릉이다. 1971년 5호분과 6호분의 배수 시설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어 1500여 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출토된 유물이 4,600여 점, 무덤 주인을 알리고 축조 연대를 분명히 제시하는 지석(誌石)이 확인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세세한 것들을 다 열거하기엔 지면이 허락하지 않는다. 4,600여 점을 한눈에 어찌 다 담아올 수 있을까?
그 중의 으뜸은 송산리 고분에서 출토된 보물 중 국보 제287호의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 大香爐) !
우리 모두는 보물 앞에서 숨이 막혔다. 총 높이 30㎝쯤 돼 보이는 향로 한 점에는 세상 삼라만상이 담겨 있다. 우리 강토에서 살지 않는 동물도 새겨졌고, 5명의 악사와 각기 다른 악기도 담겨 있다. 우둔한 내 지력으로 그 형상을 다 옮겨 말할 능력이 없다. 다만 그 향로 한 점으로 당대의 우주관 내지 사후사(死後史)에 대한 관념을 미루어 볼 뿐이다. 백제문화 기행은 이 향로 한 점만으로도 충분하지 싶었다. 특히 무렬왕비의 팔찌에는 내 개인적인 관심이 컸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갈뫼> 문학기행지로 백제문화권이 정해지던 즈음, 나는 2019년 《한국소설》 7월호에서 이광희 작가의 소설 「왕비의 팔찌」를 관심 갖고 정독했었다. 이번 기행엔 특히 「왕비의 팔찌」에 유념하리라 마음먹었다.
소설은 다분히 허구적 요소가 있게 마련이라지만 발굴 과정과 처리 과정, 보존처리 과정, 그리고 해독 과정 이 모두가 실제에 정확한 근거를 두고 써 내려간 소설인지라, 나는 작가가 어디까지를 실제상황으로 했으며, 어디부터가 허구인지를 알 수 있도록 서술해 놓았다. 나는 그 경계를, 진위를 내 눈으로 확인해 보려고 했다.
내 기대와는 다르게 전시물 설명지에는 “팔찌 안쪽에 ‘다리(多利)’라는 장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짧은 한 문장이 전부였다. 혹여 백제 유물 전시관, 박물관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샅샅이 뒤진다면, 내가 찾는 다리의 편지나 그 편지가 담겨서 묻힌 목곽(木槨)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제부터는 이광희 작가의 소설을 많이 차용해서 개진해 나갈 것이다. 백제 제25대 무렬왕릉은 어떠한 손도 타지 않은 온전한 묘였다는 것을 여러 가지 출토 유물이 증명한다.
묘지석(墓誌石)이 있다. 왕릉의 널길 입구에 2장의 장방형 석판, 청회색의 섬록암에 해서체로 따박따박 써 내려갔다. 가로 35㎝, 세로 41㎝, 두께 4.5㎝, 독해 내용은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를 일기로 계묘년(523년) 5월 7일 서거했다. 왕비의 묘지석은 대왕의 매지권(賣地券) 뒤에 적혀있다. 매지권이란 지신(地神)에게 묘지 터를 매입한 근거를 적은 문서에 해당한다. 영수증 뒤에다 왕비의 기록을 남긴 것이다.
丙午年(526年) 11月 百濟國王 太妃 天命을 다했다.(병오년(526년) 11월 백제 국왕 태비 천명을 다했다.) 즉 왕비는 무렬왕이 서거하고 3년 만에 천명을 다했다고 알 수 있다. ‘다리’가 왕비에게 만들어 바친 은팔찌(국보제 160호)는 경자년(520년) 2월이었다. 왕비가 서거하기 6년 전이다. 은팔찌에 적힌 명명과 목간(木簡)에 편지를 쓴 사람이 똑같이 ‘다리’인 점은 동일인임을 증명한다.
팔찌는 발굴 당시 왕비의 왼쪽 손목 부근에서 발굴됐다. 실제로 착용하고 매장했음을 입증한다. 목간은 공산성과 금강 변이 맞닿은 지점에서 발굴된 목곽 안에 명주 천으로 싼 채 들어 있었다. 현재 공산성 금서루를 지나 금강을 발아래 내려다보고 있는 ‘공복루’ 인근이다. 정확히 공복루와 금강 사이 한 뻠 정도의 고수부지다. 한갓진 곳이다.
공동 발굴단에서 주로 출토된 유물의 연대와 독해를 담당하던 김 교수는 여러 난관과 설렘으로 이 목곽에 들어 있던 목간(편지) 해독에 착수ㆍ진척을 보이자 못내 흥분상태까지 이르렀다. 일개 장인 신분의 ‘다리’라는 남자가 대왕비에게 쓴 편지라 하기엔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너무나 당돌한 표현이라 김 교수는 자신의 해독이 맞는가를 잠시 의심했다.


오늘 신이 죽기로 마음먹고 이 글을 적습니다.
부디 저승에서라도 용서하옵소서.


이렇게 시작한 편지는 ‘사모하는 또는 나의 여왕’ 이런 호칭을 무려 17번이나 반복해 썼다. “1500년을 건너온 남의 편지를 엿보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라는 김 교수 독백이 있다.


소신은 대부인 마마와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동갑내기이었사옵니다.
어릴 적 동가리 집 초등으로 살면서 마마를 참으로 좋아하였지요.
… (중략) …


예닐곱 살 되던 해 어느 날 소신이 나무를 해 오다가 도랑에 잘못하여 발목을 접질렀사옵니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마마께옵서 신음하고 있던 내게 다가와, 그 고우신 손으로 제 험한 발목을 잡고 어루만지며 위로해 주셨사옵니다.
소신은 그때의 따스한 마마의 손길을 잊을 수가 없었사옵니다.
… (중략) …


마마께서 궁에 들어가시어 왕비에 오르시던 날 소신은 누구보다 양축하였나이다. 소신은 그 길로 노반의 식솔을 자원하였사옵니다.
열심히 공예를 익히는 것만이 대부인 마마를 따라 궁성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었사옵니다.
… (중략) …


마마께서 언젠가 노반의 누추한 공방을 두루 둘러보신 적이 있사옵니다. 그날 노반 박사께서 저를 친히 불러 마마의 손수건을 건네주셨사옵니다. 마마께옵서 동향(同鄕)인 미천한 저를 챙기셨다는 말씀이지요.


사모하는 여왕이시어,
마마께옵서 은팔찌 한 쌍을 만들라고 명을 내리신 날,
노반 박사들이 모여 이 문제를 논의하였고
그 가운데 제가 가까스로 간택되었사옵나이다.
신은 날아갈 듯이 기뻐했사옵니다.
그날부터 신은 어떻게 해야 마마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또 번민하였사옵니다.
땅에도 그려보고, 강에도 그려보았습니다.
하늘에도 그리고, 바람에도 그렸사옵니다
자나 깨나 그 생각뿐이었사옵니다.
하여 두 마리의 용으로 마마를 모시기로 하였사옵니다.
용 머리에는 어려움을 뚫고 하늘로 승천하려는 강한 인상을 담았습니다.
사납게 벌린 입과 긴 혀로는 사해에 걸쳐 있는 죄악을 물리치도록 했으며, 부라린 눈에는 정기가 서리도록 했사옵니다.
나팔처럼 긴 귀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도록 했사오며,
겨드랑이에는 구름 날개를 달아, 쉽게 하늘로 오르게 도안했사옵니다.
세 개의 발톱에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 그리고 영원히
마마를 지키고자 하는 소신의 갸륵한 염원을 녹였사옵니다.
용이 서로 꼬리를 향해 내달리도록 도안한 것도 끝없이 마마를 지켜드리겠다는 약속이옵니다.
용머리를 뒤로하여 한 번 쯤 세상을 돌아보도록 한 것은 소신의 연약한 의지이옵니다.
하나하나의 돋은 비늘은 제 살아 있는 마음이옵니다.
또 다른 팔찌의 용 두 마리는 천상세계로 나아갈 때 길을 안내하고 마마의 영혼을 인도할 용들이옵니다.
마마께옵서는 이 미천한 소신의 마음을 헤아려 팔찌에 소신의 함자를 적도록 은혜를 베푸셨나이다.
내 생애에 최고의 날이었사옵니다.
평생 마마만 가슴속에 품으며 혼인도 아니 하고 살았사온데 마마께서 없는 세상을 살 이유가 없사옵니다.
공산선 자락에서 이 몸을 던져 님의 뒤를 따르려 하옵니다.
사모하는 마마에 대한 생각은 한 줄의 글로 적어 오동나무 곽에 담았사옵니다.
이곽을 공산성 자락에 묻어 두고, 이 몸은 그 산비탈에 서 있는 참나무 허리에 몸을 맬 생각이옵니다.

병오년(526) 12월 겨울(冬)
‘다리’(多利)


마지막 연에서는 나의 ‘여인’이라 적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또 읽었다. 숨겨진 역사적 서사를 한 점 유물을 통해 이다지 곡진하게 유추해 낼 수 있다니 작가의 능력에 거듭 감복하여 한동안 먹먹했었다. 우리 모두 글 쓰는 사람일진대 이광희 작가의 시선과 감성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 소설 (왕비의 팔찌)의 차용 부분을 끝맺는다.

여행이건 기행이건 일상을 훌쩍 떠난다는 건 참 싱그런 시간이다. 우리가 유숙한 숙소는 좀 불편했다. 음식도 전혀 부여ㆍ익산을 대변하는 특색을 맛볼 수 없었다. 그런 느림의 기질이 백제 문화를 지켜가는 원동력일지 누가 알랴. 이튿날 우리는 공산성루에 오르고, 황포 돛단배를 타고 백마강을 거슬러 갔다. 낙화암 아래 정박장에서 하선, 고란사에 올라갔다. 암벽 틈에 소박한 고란사는 그 암벽에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고란초’가 있고 약수가 나그네의 갈한 목을 시원하게 축이기에 충분했다.
낙화암 하면 너 나 할 것 없이 ‘백제 최후의 날에 삼천궁녀가 꽃잎처럼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왜곡된 기억을 수정해야 할 때가 왔다. 일제가 우리의 고사(古史)를 폄하하는 쪽으로 그리했다는 사실, 고대사에서 백제에서 온갖 문화를 전수 받았던 일본이다. 그런 사실을 뒤집고 백제왕이 허영과 여색에 전염한 결과로 패망한 것이라 했다. 일본이란 나라는 21세기에 와서, 이 밝은 세상에서 제 나라 역사는 물론 이웃인 우리나라 역사마저 왜곡시켜 후세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실제 백제는 높은 문화와 장인정신까지 지녔던 국가였다. 라ㆍ당 연합군의 힘이 워낙 막강했음이 동양사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역사적 인식을 바로 가질 때 후손들도 일제의 발칙한 역사왜곡, 영토분쟁에서 우위를 되찾을 줄로 안다.
‘다리’의 목곽이나 목간을 본 사람 있으면 내게 필히 알려주십사 바라며 이만 맺는다.


❇노반: 조선시대의 ‘도화서’처럼 백제시대 궁중의 금속공예 기관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