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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수필] 연등밭을 거닐다 외 1편 / 권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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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28회 작성일 19-12-2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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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두 달 동안 병원과 집안에서 휠체어와 목발에 의지하며 살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음악을 듣고 내 안에 몰입하여 스스로 향유의 시간을 보내며 잠시 쉼표로 살았다. 또한 평범한 일상이 소중하고 감사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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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밭을 거닐다


현대 사회는 복잡하다. 안 들으려 해도 우리는 많은 소음에 시달리고 눈만 뜨면 온갖 사물들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의지로는 절제가 안 된다. 그러면 하루 24시간 중 조용히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 몇 번 있는가. 자고 일어나면 우리는 자신의 실체가 무언지도 모르는 혼돈 속에 끌려가는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다.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연례행사처럼 나는 낙산사 밤 연등밭을 거닌다. 가끔 혼자이고 싶거나 가족 중에 원願이 있을 때 낙산사를 찾기도 한다. 금년 초파일 전날 저녁에도 어김없이 낙산사를 찾았다.
낙산 바닷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비치호텔 입구 쪽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의상대 뒤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두 그루 키 큰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2005년 4월 5일 산불로 낙산사 경내 사찰은 물론 수십 년 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의상대 뒤에 서 있던 소나무가 불에 타서 화상을 입었지만 곁가지에 조그마한 싹이 올라오자 절에서 소나무에 링거액을 공급해 주어 5년 만에 소나무는 역경을 딛고 소생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언제 화상을 입었냐는 듯 꼿꼿이 서 있다. 그러다가 바닷바람이 불어오면 휘파람 불며 서 있는 소나무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마치 동양화 속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멀리 설악산을 배경으로 커튼처럼 노을이 내려지고 붉은 석양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순간 낙산사 경내는 암흑천지가 되는가 싶더니 수천 개 연등이 일시에 켜졌다. 오봉산 자락은 오색 빛 부신 구슬밭이 되었다.
낙산사 입구 범종 누각을 지나 빈일루를 거쳐 원통보전까지 오색 연등이 아치형 커다란 터널로 만들어져 있어 장관이다. 원통보전에서 고즈넉한 오솔길 따라 오봉산 정상 해수관음보살상 쪽으로 갔다. 검푸른 저녁 하늘 아래 약병을 들고 서 있는 해수관음보살상 머리 위로 음력 초이레 달이 떠 있어 무아일체 경지에 들게 했다. 엄숙한 고요로움 앞에서 업장소멸을 빌며 합장을 했다. 밤하늘의 달과 해수관음보살님, 그리고 내가 그 순간 삼위일체된 느낌이었다. 이런 순간을 법열의 경지에 든다고 하는 걸까? 그러기에는 스스로 오만한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난 일 년을 기다리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해수관음보살상이 서 있는 오봉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하늘과 바다가 까마득 맞붙어 있었다. 아무런 걸림 없이 밤바람만 지나가고 멀리 비치는 대포항 불빛만 이곳이 이승이라는 걸 느끼게 해 준다. 수많은 연등이 동쪽 의상대와 홍련암 바닷가 쪽으로 그리고 서쪽 템플스테이와 일주문 쪽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마치 낙산사 불국토를 지켜온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문채 몸에서 오색 빛을 뿜어내며 바다에서 천상으로 승천하는 것 같았다.
신령스런 그 연등길을 전생 업이 많은 나 같은 속인이 감히 걸을 자격이 있는가. 자연과 인간, 부처님 설법이 하나 되는 일체감을 느끼게 했다. 오봉산 정상 해수관음보살상에서 내려다보는 낙산사 밤 연등밭은 흡사 4월 밤 때아닌 잘 익은 사과밭에 온 것 같았다. 저만치 검은 보자기를 펼쳐 놓은 듯한 밤바다도 찬란한 연등 앞에 숨죽이고 있는 듯 적요했다.
그런 고요의 절정에서 해수관음보살님께 삼배를 올리고 돌아서니 초이레 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타전 쪽으로 내려오다가 문득 캄캄한 숲에서 검은 산짐승이 불쑥 튀어나왔다. 얼마나 놀랐는지 가까이서 보니 연등을 촬영하러 온 사진작가들이 나무 뒤나 풀숲에 숨어서 촬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둠 속에서 피워 올린 수많은 연등의 실제 모습이 사진 작가들의 작품 보다 더 예술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타전 뜨락 허공에 바둑판처럼 촘촘히 연결된 줄에 수백 개의 분홍과 흰빛 연등이 구슬처럼 수놓고 있다. 흡사 수만 송이 연꽃들이 연지에서 피워 올린 경전 같은 말씀들이다. 업장소멸에 든 순수한 선의 경지가 저토록 황홀할까, 허공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연등이 인연처럼 연결되어 있고 그러면서 자유롭게 빠져나가는 그물망이 잘 짜여진 인드라망 같았다. 다시 홍련암 쪽으로 내려가니 발바닥이 허공을 밟는 느낌이었다. 법당 안은 저녁예불로 소리 가득했다. 홍련암 쪽 연등길은 어둠에 갇혀 스스로를 보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무지한 나를 조금이라도 깨닫게 하는 길이다.


내가 낙산사를 찾고 밤 연등길을 매년 찾게 된 연유는 열세 살 무렵, 그러니까 오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위에 부서지던 파도와 절경의 사찰이 뇌리에 떠나질 않고 있었다. 나는 그곳이 어딘지 몰랐고 그저 막연히 그리워만 하고 있었다. 먼 훗날에야 알았지만 그곳이 바로 동해 바다와 낙산사 홍련암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단체 영화 관람을 갔었다. 영화 제목은 「꿈」이었고 신상옥 감독의 작품으로 주인공은 배우 신영균과 김혜정이었다. 낙산사와 홍련암을 배경으로 한 영화 자막은 아름답고 인상적이었지만 내용은 섬뜩했다. 스님 조신(신영균)이 법당에 기도하러 온 약혼자가 있는 양양 지역 태수의 딸 달레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약혼자 몰래 데리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갖은 고충을 겪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스님 조신이 법당에서 잠깐 잠든 사이에 꾼 꿈이었다. 꿈에서 깼을 때 조신의 얼굴에는 땀이 비오듯 했고, 상단 위 부처님과 칼을 든 사천왕이 부릅뜬 눈으로 조신을 바라보는 장면이 화면을 채웠다. 홍련암 법당 아래는 동해 푸른 파도가 넘실거렸으며 벼랑 가득 흔들리며 피어 있던 꽃들이 생생하다. 열세 살 때 본 그 영화 장면이 수십 년이 되어도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촬영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저 상상 속에만 자리하고 있었다. 그 시절 우연히 춘원 이광수 전집을 읽다가 보니 거기에 소설 「꿈」 이 실려 있어 원작을 전부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소설 속 영화 촬영지가 현실에서는 없는 상상의 세계인 줄 알았다. 그리고 속초로 이사를 온 후 어느 날 우연히 낙산사엘 갔다. 그런데 처음 간 곳인데 어렴풋이 본 듯한 익숙한 곳이었다. 한참 기억을 더듬으니 40여 년 전 사춘기 시절에 보았던 영화 한 장면이 떠올랐다. 「꿈」 영화 촬영지가 바로 이곳이었구나 하고 감탄과 경이로움을 금치 못했다. 그런 연유로 자석에 끌리듯 나는 이곳을 자주 찾게 되고 일 년 중 가장 엄숙한 날인 초파일 전날이면 이곳 밤 연등밭을 거닐게 된다. 연등마다 가족 이름이 적힌 수많은 소원지가 밤하늘 아래 흔들리고 있다. 생이 있는 이상 누구나 기원이 있고 중생들은 그 힘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허공에 매달려 있는 연등은 자유로우면서도 인연의 관계 속에서 잘 연결된 고매한 인드라망이다.
십여 년을 거의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밤 연등밭을 거닐며 어둠 속에서 해수관음보살님의 염화시중 미소를 친견했다. 그런 순간마다 나 스스로 정체성을 찾은 듯 행복했다. 한 해가 지나면 그 다음 해에 연등밭 거닐기 위한 나의 소망이 또 하나 생기게 된다.
일출의 명소이기도 한 낙산사와 홍련암은 사춘기 시절 우연히 관람한 영화로 인해 중년이 넘어서까지 찾는 내 영혼의 성소가 되어 나 스스로를 쓰다듬는 자리가 되었다. 삶이 가끔 버거울 때나 아니면 분에 넘칠 때, 나는 이곳에 와서 법당에 촛불 켜고 부처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게 된다. 내가 속초에 있는 한은 밤 연등밭을 거니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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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쉼표로 살다



눈만 뜨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이다. 현대인들한테 바쁘다는 말은 이미 일상처럼 되었고 가족들도 한자리에서 만나기가 힘이 드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세상에 살아가다가 조금이라도 한가해지면 왠지 세상 속에서 이탈된 느낌이 든다. 살면서 일부러 고요로움을 찾거나 잠시라도 쉼표 같은 시간에 젖어 들기는 정말 쉽지가 않다.
지난 두 달 동안 나는 본의 아니게 병원과 집안에서만 생활을 해야 했다. 몸은 갇혀 있지만 마음은 오히려 자유롭고 허공을 비상하는 느낌이었다.
우연히 아파트 계단을 내려오다가 넘어졌는데 큰 통증은 없는데 걷기가 불편하고 다리가 부었다. 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무릎 연골을 싸고 있는 반월판에 손상이 가서 관절경 수술을 했다. 그리고 나서 더운 여름 무릎 재활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주변에 있는 연세 드신 분들이 뼈를 다쳤거나 관절의 노화로 수술하는 걸 보았지만 남의 일이려니 하고 무심히 넘겼던 일들이 나에게 닥쳐왔다. 어느 지인이 그랬다. 육십이 넘으면 우리 몸의 관절이 오래 쓴 헌 행주나 걸레 또는 폐타이어 같다고 했다. 조금만 부딪치거나 넘어지면 골절骨節에 손상이 간다고 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물며 기계도 육십 년 쓰면 고장이 나는데 인간의 몸인들 오죽하랴?
평소에 나는 ‘마당발’ 혹은 ‘권길동’으로 불렸다. 누가 오라고 안 했는데도 나는 갈 데가 많았다. 내 스스로 일을 만들어 쉴 새 없이 바쁘게 쫓아다녔다. 그런 내가 이 더운 여름에 오른쪽 다리를 깁스하고 꼼짝 없이 두 달 동안 갇혀 있으니 말이 아니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는 말이 있듯이 내 삶에 있어 잠시 쉬어가는 쉼표라고 생각하자. 평소에 나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그렇듯이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외부와 차단된 이 많은 시간을 혼자서 무엇을 할까 하고 생각하니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 맞아, 이곳은 병실이 아니야. 그동안 내가 너무 바쁘게 살았으므로 잠시 나를 쉬게 하는 휴식공간이야.’ 하고 생각했다. 수술하고 깁스한 다리가 불편하지만 그동안 다리 덕분에 얼마나 잘 쫓아다녔던가 하고 생각을 바꾸니 그 또한 감사했다. 의사 선생님 처방대로 약 먹고 열심히 재활하면 나아지겠지. 두 사람이 쓰는 병실이지만 옆 침대에 환자가 없어 독방을 쓰고 있었다. 병실 창을 열면 6월 녹음이 우거진 산이 보였다. 밤이면 달이 창으로 들어와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달이 반가웠다. 낮이면 가지를 늘어뜨린 아름드리 소나무 위에 앉은 까치 두 마리와 친구가 되어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 미루고 읽지 못했던 책들을 줄을 그어가며 읽는다. 병원에서는 시간마다 내 몸 상태를 체크해 주고 세끼 밥을 갖다 주니 이보다 더한 호사가 또 어디 있을까? 모든 직원들이 친절하게 대해 주니 이곳 또한 나에게 휴양지였다.
휠체어를 타고 병원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던가 내릴 때 누군가 그림자처럼 뒤에서 밀어주고 간다.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도와주려는 그들의 측은지심에 감동을 받는다. 병원 건물 삼층 밖으로 나가면 환자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야외 정원이 있다. 7월인데도 흰구름이 가을 하늘처럼 높이 떠가고 구절초와 비비추 등 이름 모를 야생화가 정원 가득 피어 있고, 매실이나 대추나무 같은 과실수들의 열매가 윤기를 내며 매달려 있지 않은가. 또한 공작단풍은 붉은 이파리를 치렁치렁 머릿결처럼 흘리고 서 있다. 휠체어를 타고 아침이면 싱그러운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고, 해 질 녘이면 노을을 배경으로 먼 산이 회색 실루엣이 되어 내려오는 걸 바라보노라면 왠지 마음이 공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3층 야외 정원 산책로는 내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고 고정관념에 갇혀 있던 내 사고를 확 트이게 해준다. 저만치 산책하는 환자들과 눈인사하고 아름다운 경치들을 스마트폰에 담는다.


보름 동안 내 마음의 호사를 누렸던 휴양지를 떠나야 했다. 그동안 정들었던 크고 작은 이별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병원에서 주는 목발을 선물처럼 받아 가지고 속초 집으로 왔다. 마치 나 혼자 먼 여행에서 돌아온 듯 집이 낯설었다. 남편이 휠체어를 대여해 놓아 집안에서 불편 없이 밀고 다니며 소소한 일을 했다. 남편이 출퇴근하며 밥하고 빨래를 해 주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 지인들이 심심하지 않냐고 전화가 왔지만 심심할 여가가 없었다. 언제 내가 이렇게 고요히 있었던 적이 있었는가. 저만치 영랑호수가 시시각각 다른 빛깔로 눈에 들어와 내 가슴을 쓰다듬어 주었다. 멀리 불탄 산을 보니 가슴이 심히 아렸지만 스스로 집 안에 갇혀 호사를 누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밀린 글과 청탁한 원고를 쓰며 장편 소설과 시집, 수필집 등 여러 권을 읽고 음악을 들었다. 다리가 불편해서 밖으로 못 나간 두 달 동안의 시간들이 오히려 내 영혼의 쉼표였으며 생산적인 시간이 되었다. 나이 들어가면서 중요한 것이 건강과 돈이라면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취미가 있어야 됨을 절실히 느꼈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음악 듣는 일이 사람 열 명 있는 것보다 더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었다.
깁스는 풀었지만 재활이 문제였다. 집 안에서 다리 꺾기와 스트레칭, 찜질을 계속했다. 근 육십여 일 쓰지 않은 다리라 걷지 못하고 목발을 짚고 집 안을 다녔다. 어깻죽지가 아팠지만 참았다. 목발은 내가 디뎌야 할 지점을 먼저 안내해 주고 정확히 짚어 준다. 내 살아온 삶을 돌아보니 많은 사람들이 내 삶의 울타리였고 목발이 되어 내가 가야 할 곳과 해야 될 무수한 일들을 미리미리 짚어 주지 않았던가, 나는 목발을 딛으며 스스로 겸손해졌다.
며칠 전부터 창밖 방충망에 흰나비 한 마리가 미동도 없이 거실을 들여다보며 휠체어를 타고 목발 짚고 다니는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흰나비의 훈기가 내 몸에 번져왔다. 병원에 있을 때 창가에서 매일 나를 들여다보던 소나무 위 까치한테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릴 적 내가 신열을 앓고 있을 때 밤새껏 나를 지켜보시던 할머니 눈빛도 그랬다. 장맛비를 맞으면서도 나비는 방충망에 매달려서 내가 성큼성큼 걸어서 밖으로 나가길 바라는 듯 나를 고요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나비가 고마워서 서로 바라보며 마음 교류를 했다. 고요하고 잔잔한 가운데 커다란 울림이 왔다. 그렇게 며칠 동안 나를 지켜보던 나비가 내가 목발을 놓고 천천히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가자 가벼운 목례로 작별 인사를 하고는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렇다, 말없이 누군가를 지켜보는 보이지 않는 힘이 때론 바다를 들어 올리고 산을 움직이게 하기도 하고 삶에 지쳐 있는 사람들한테 힘을 실어 주는 소중한 일을 하기도 한다.
바쁘게 살아가다가도 한 번쯤은 쉼표 같은 시간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보며 영혼의 울림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리를 다쳐서 본의 아니게 병원과 집안에서 60일 동안 지냈지만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날갯짓 하며 스스로 단단해지는 여문 시간을 보냈다. 땅을 딛고 걷는다는 사실이 이렇게 고맙고 감사할 줄 몰랐다. 우리 몸속에 미세한 세포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이 주는 행복을 그동안 미처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60일 동안 잠시 쉼표로 살았던 시간 속에서 지난날을 반추해 보며 스스로 겸허해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