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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수필] 9월에 쓰는 일기 / 노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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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438회 작성일 19-12-24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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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에 감사하는 삶, 타인을 존중하고,
감사함이 내가 살아가는 힘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일이 생긴다고
바로 누군가에게 갚으려 하지 않고
훗날 기회가 올 때 베풀면
그 사랑의 힘은 계속되고
이런 실천 메시지가 모이면 많은 시너지가 되어
더 큰 메시지로 울릴 것이다.

지금은 9월,
나는 아프지 않다.
모든 것은 내 마음속에 있다.


 - 「9월에 쓰는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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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쓰는 일기



해마다 9월이 되면 작은 몸살을 앓는다. 아마도 내가 태어난 달이라 그런가 보다. 결혼해서 딸 아이를 예정일보다 3주 빨리 낳은 것도 9월이다. 그러다 보니 딸애와 난 3일 차이로 미역국을 끓여 먹는다.
산전 진찰을 위해 방문한 병원에선 임신중독증이 있어 서울의 큰 병원을 권유했지만 지방에서 서울까지 가서 출산하기는 쉽지 않았다. 진찰 당일 입원 수속을 하고 다음 날 유도분만이나 제왕절개수술을 하기로 했다. 첫 출산인데 의사가 분만의 어려움을 얘기하니, 나는 불안해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런데 뱃속에서 그 느낌을 알아챘는지 다음 날 새벽, 유도분만 전에 출산 징후가 나타나며 통증을 시작했고, 몇 번의 어려움 끝에 자연분만으로 딸을 품에 안았다.
나와 달리 딸애는 9월에 감기몸살을 앓는 정도로 가볍게 지나가며 잘 자랐다. 청소년기에 가지고 있던 콩팥병은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제 몸을 불려가면서 나를 위협했다. 여자는 남자와 달리 술과 담배를 멀리할 수 있고 ‘건강’이라는 두 글자를 옆에 두고 항상 몸을 우선 하다 보니 조금은 관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때론 스스로 움츠러들면서 적극적인 행동을 할 수 없었던 제약이 되었다. 몸은 내가 관리하면서 지킬 수도 있지만, 지킨다고 해서 언제나 유지되는 것도 아니란 걸 알아 가는 데는 24년이 걸렸다.


2012년 초 한계점에 도달한 내 몸을 위해 나는 또 다른 시작을 해야 했다. 신부전 환자가 선택하는 치료 방법에 혈액투석이나 복막투석, 그리고 신장이식의 방법이 있으나, 계속 직장 다니길 원하는 나로서는 복막투석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병원의 사전 교육을 통해 복막투석의 필요조건을 보니 배의 장기를 감싸고 있는 복막이 훼손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그동안 맹장염 수술은 없었고, 제왕절개 수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 적합한 방법이었다.
딸애가 자랐을 때 “너는 건강하지 못한 엄마에게 너무 소중한 아이였고, 엄마를 위해 먼저 얼굴을 보여줘서 고맙다”고 얘기를 했었다. 누구에게나 소중하지 않은 자식이 왜 없겠는가. 출산하면서 우여곡절을 겪은 나로서는 어미 몸에서 더 자라고 나와야 했을 그 작은 생명에 대해 생각해 본다. 탯줄을 통한 공감으로 어미의 숨소리와 마음을 읽고 어미를 위해 3주나 빨리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딸은 그래서 더더욱 고마운 존재였다. 결과적으로 자연분만을 한 것이 오랜 시간이 흘러 몸이 나빠졌을 때, 내게 최선의 방법인 복막투석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딸이 대학에서 1학기를 마치고, 10월부터 학기가 시작되는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가기 위해 집에 머물렀을 때다. 내가 투석을 시작한 지 4년 만인 2016년 9월 초, 이유를 모른 채 십 여일 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딸애가 이른 아침 거실에 쓰러진 나를 발견해 응급조치를 하고, 남편은 직원들과 여행 중 달려왔다.
사실 나와 남편은 지진으로 인한 원전 사고 후 5년이 지났지만 여러 위험이 있다며 딸이 일본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자식 이길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부모의 반대로 일본행을 포기하고 대학에서 2학기를 보냈다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딸애가 집에 없었다면…’ 생각해 보면 아득하다. 소중한 기회를 두 번이나 내게 준 딸!
중환자실에서 스무날 가깝게 긴 꿈속을 헤매며 사투를 벌이고, 일반 병실로 올라와 며칠 지나도록 아무런 날짜 감각이 없이 지내던 날,
“엄마 오늘이 며칠인 줄 알아?”
“글쎄… 오늘이 며칠이더라.”
“오늘이 9월 26일이야.”
“그럼 너 일본 가는 날이네. 가고 싶어 하던 곳인데 엄마 때문에 못 가게 되어 많이 속상했지?”
“아니야, 안가도 괜찮아, 엄마가 회복한 거로 충분해. 아마 내년에 또 다른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중환자실에서 ‘빨리 일어나’라고 응원하던 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내가 열흘 지나 의식이 조금 회복되어 ‘일본으로 출국해도 괜찮다’는 아빠의 말도 거부하고 중환자실에 있는 엄마를 보며 많은 갈등 속에 포기하고 말았으리라. 학생 신분에서만 갈 수 있는 교환학생 자리라 학과 공부와 선발시험을 열심히 준비했던 것을 나는 안다. 합격한 것을 포기하기까지 얼마나 마음 아팠을지 생각하는 내게 오히려 위로를 건네던 딸이었다.
여러 가족 친지 등 주위 분들에게 걱정 끼치며 다행히 몸을 회복해 일상 생활을 하게 되었다. 복막투석을 시작하면서 내가 위생적으로 관리해 복막염 없이 투석 생활을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많은 환우들이 투석 시작하면서 신청한다는 뇌사자 장기이식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절체절명 위기를 겪은 후 남편과 딸은 완전하지 못한 내 몸을 불안해했다. 언제 또 위기가 올지 모른다며 생체이식을 받으라고 했지만, 가족들의 건강 상태는 이식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결국 가족들의 염려로 뇌사자 장기이식 신청을 하게 되었다. 이식 대기자 신청을 하고 얼마 되지 않던 2018년 1월, 병원의 장기이식센터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향했다. 평균 8년이라는 이식 대기시간을 생각해 빠른 이식을 생각지 못했는데 어떤 분의 고귀한 생명이 나에게 오는 건지… 먼저 가신 분과 가족들의 사랑을 생각하니 감사함에 눈물이 흘렀다. 이름 모를 기증자의 희생과 그 가족들의 사랑으로 새로운 생명의 선물을 받게 되는 순간이었다.


절명에 가까운 위기가 없었다면 나는 계속 투석을 하면서 지내고, 또한 신장이식 신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같이 찾아오는 시련이 있었지만 이러한 모든 지난 일들이 나에겐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투석을 해야 하는 상황을 직면했을 때 ‘내가 좀 더 몸을 신경 써서 다독였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의 시간. 그리고 다행히 내가 할 수 있는 복막투석을 하게 되고,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자동복막투석 기계를 사용하게 되어 내 시간을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해주니 그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내게 닥친 큰 고통의 시간이 없었다면 신장이식 후 찾은 지금이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하나 더 생긴 내 몸속의 신장을 감사의 마음으로 어루만지며 함께 지낸다.


지금도 장기기증 서약을 하는 사람들. 안타까운 생명이 사라지면서 사람과 사람이 생명의 선물을 나누는 일은 번져나가고 있다. 매사에 감사하는 삶, 타인을 존중하고, 감사함이 내가 살아가는 힘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일이 생긴다고 바로 누군가에게 갚으려 하지 않아도 훗날 기회가 올 때 베풀면 그 사랑의 힘은 계속되고 이런 실천 메시지가 모이면 더 큰 메시지로 울릴 것이다.


지금은 9월, 나는 아프지 않다. 모든 것은 내 마음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