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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수필] “그랬구나,” 외 1편 / 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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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459회 작성일 19-12-24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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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닮아가는 일
세상을 닮아가는 일은
참 슬프다.
난 장미꽃을 참 좋아한다.
사랑을 하려면 장미꽃처럼 하려고
꽃만 예쁘다고 바라보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꽃이 가진 가시마저 사랑해야 한다.
철없을 때는 그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이를 먹은 일은
세상을 닮아가는 거다.
참 힘들다.
올 가을은 참 쓸쓸하다.


--------------


“그랬구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수업 중 1학년 명훈이가 막 고함을 치면서 우는 것이다.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고 달려가 보니 3학년 지석이 형아가 때렸단다. “너는 왜 때렸냐?”고 물으니 지석이는 아차 하는 모습으로 매우 당황했다. 둘을 불러내어 “왜 그랬어?” 하니 서로 말을 하려고 하는 통에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1학년 아이는 내가 안 그랬다고 하면서 울기만 하고 3학년 아이는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다.
“뚝! 그만 울어” 하고 야단을 쳤다.
“선생님이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해결을 해 주지 조용히 하고 한 사람씩 차근히 이야기해 그렇지 않으면 둘 다 혼날 거야, 명훈이부터 이야기해봐.”
“제가요, 노랑색 크레파스가 없어서 수영이한테 (다른 자리에 앉은 1학년 아이) 빌려 달라고 했는데 없다고 하는 거예요. 분명 있는데 안 빌려줘서 제가 수영이한테 치사하다고 했더니 시한이 형아가 자기한테 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라고 했는데 자기를 보면서 그랬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옆에 있던 지석이 형아가 너 3학년한테 대들면 안 된다고 나쁜 놈이라고 해서 제가 ‘형아가 뭔데 참견해’ 했다고 때렸어요.”
“도대체 뭐야? 너희들 다 나와, 조용히 잠수타고 있는 너희 둘 다 나오라고. 뭐가 이렇게 복잡하니? 그럼 원래 명훈이하고 수영이 일이네?”
“예.”
“근데 너희 둘 3학년 왜 참견질을 해서 명훈이를 울리는 거야?”
“아니 명훈이가 저보고 치사하다고 한 줄 알고…”
“그럼 지석이 넌 왜 참견을 했는데? 응”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 녀석들이, 그리고 너 수영이 왜 크레파스를 안 빌려주는 거야, 그건 네 것이 아니고 학교 거라 다 같이 쓰는 거야. 여기서 없으면 저기서 빌려주고 수영이 너 왜 안 빌려줬어?”
“제가 쓰고 있는 거라서.”
“그럼 다 쓰고 빌려줄게 하면 되지, 왜 안 줬어?”
“죄송해요.”
“아니 명훈이한테 사과해.”
“명훈아 미안해.”
“아니 괜찮아, 치사하다고 말해서 미안해.”
“그럼 수영이는 들어가.”
“다음 너 시한이. 넌 너한테 안 그랬는데 왜 너한테 했다고 그랬어?”
“음, 전 저한테 한 줄 알고…”
“명훈이한테 사과해.”
“미안해 명훈아.”
“알았어. 형아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응”
“그다음 너 지석이 왜 때렸어?”
“3학년인데 막 대들고 그러니까.”
“너한테 대들었어? 뭐? 너는 고작 1년 차이 나는데 대들었다고 때리고. 선생님이랑은 사십 년이 넘게 차이 나는데 막 대들고 말도 안 들으면서 그럼 선생님은 너희들 엄청 때려야겠네?”
“우와, 선생님 그럼 나이가 그렇게 많아요? 우와 서른 살인 줄 알았는데, 그럼 오십 살이 넘어요? 우리 할머니랑 같아요.”
“시끄러워, 지금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 너도 명훈이 한데 사과해.”
“명훈아 미안해.”
“알았어. 다음부터 그러지 마.”
“알았어.”
그리고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불러 설명을 해가며 다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 마음들을 다독여 주었다.
순간에 아수라장이 된 수업 시간이 종료가 되었다. 맥이 빠졌다. 머리가 질근 아팠다. 어린아이들도 저렇게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울고불고 하는데…
수업 정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몇 년 전부터 있었던 많은 힘든 일들이 생각나 속상해서 눈물이 나왔다. 그때 그 사람들은 나에게 왜 그랬을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운전하고 오는 내내 펑펑 울었다. 오늘 내가 약자인 아이의 그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고 야단만 쳤다면 그 아이는 나를 원망하며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고 마음이 상했을지 모른다.


문득 티비에서 본 ‘그랬구나’ 게임이 생각났다. 서로 상대에게 불편함 속상함을 이야기하면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그랬구나’ 하는 게임이었다. ‘그랬구나’ 게임은 상대가 어떤 서운한 말을 해도 ‘그랬구나’ 하는 거다.
“어머님 때문에 너무 속상했어요.”
“아니, 내가 뭘 어쨌다구?”
“아니요, 그냥 그랬구나, 하는 게임이라구요.”
“어머니 왜 그렇게 저에게 잔소리를 하세요? 전 너무 힘들어요. ”
“그랬구나, 다 너를 위해서 …”
“아니, 어머니 그냥 그랬구나 하는 거예요.”
“그래, 그랬구나.”
“어멈아, 나는 네가 엄마 말을 너무 안 듣고 네 멋대로 해서 많이 속상하다.”
“그랬군요.”
이렇게 서로 서운함에 ‘그랬구나’만 하는 게임이었다.


누군가가 속상하다고 하소연을 하면 그저 우리는 “그랬구나.” 하면 될 텐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더구나 대부분 남편이나 아들에게 누군가와 트러블에 속상함을 하소연하면 누가 잘못했고 왜 거기를 가서 그 소리를 듣느냐 쓸데없이 돌아다니니 그런 소리나 듣고 그럴 시간 있으면 잠이나 자라는 등… 그래서 남편은 남의 편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나도 요번에 아들 녀석한테 그랬다가 속만 더 상한 적이 있었다. 위로는커녕 변호사처럼 누가 잘못했고 하면서 나열해 속을 더 뒤집어 놓았다. 본전도 못 찾고 아들이 내 편이 아닌 것에 더 속상함만 느끼게 되었다. 아들이 더 미웠다. 다시는 어떠한 말도 안하리라 다짐했다.
그냥 야속해서 속상한 맘을 말하고 싶었다. 누가 잘못했다 그것을 따져 주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마음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 마음, 내 마음이 아프니 그냥 위로받기 위함에 터놓은 것인데 자기가 더 열을 내서 잘잘못을 가려준다. 그 사람의 속상함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 그 섭섭함에 또다시 그와 싸움도 하게 된다.
나도 사실 아들 녀석에게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꾸욱 참았다. 싸우기 싫어서였다. 분명 그렇게 말하면 나는 그게 아니고 ‘엄마가 속상해 하니 자기가 속상해서 그런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왜 너는 엄마 편이 아니고 그들 편이냐?’ 하면서 싸움을 했을 것이다.
나는 요즘 작은 일에도 점점 마음이 서운해진다. 결코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을 텐데 자꾸 마음에 뿔이 생긴다. 톡 쏘아붙여 한마디 던지고 싶지만 다시 되돌아올 독가시가 가슴에 더 깊숙이 꽂힐까 봐 속으로 꾹꾹 눌러 참고 있다. 그런 시간들이 잦아지고 있다. 그냥 눈물이 주룩 흘러내린다. 많이 섭섭하다. 누군가로 인해 무엇이든 힘들었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견디기 힘들다. 그냥 그 자체로도 얼마나 힘겨운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그렇다. 어떤 일로 속상해 하는 이에게는 잘잘못을 따져 달라고 심판을 내려달라고 이야기를 꺼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더러 가까운 사람들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혹은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충고 아닌 충고로 독침을 쏘아댄다. 슬픈 이한테는 결코 그를 위해서든 어떤 충고 따위나 질책 따위는 필요 없다. 설사 그가 잘못을 더 많이 했다 하더라도 묵묵히 ‘슬펐겠구나, 힘들었겠구나’ 그저 등을 두어 번 토닥토닥거려 주면 다 끝나는 일이다.
실제로 많은 연구에서도 문제를 객관적으로 해결하는 도구적인 도움보다도 힘든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정서적 지지가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는데 더 좋은 효과를 준다고 밝혔다.
우리의 관계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 들이 분명 있다. 그런데 가끔 사람들은 친하다는 이유로, 도와준다는 핑계로 슬슬 선을 넘으며 그 사람의 마음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많은 것을 도와준 것처럼 너를 위해서라고 하면서 쉽게 타인의 삶을 침범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일본의 최고 심리카운슬러 오노코로 신페이는 너를 위해서라고 말하는 경우는 실제로 대부분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과 행동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한없이 잘해주는 사람에게조차도 왜 그런지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관계 거리 조절을 실패했을 때라고 한다. 관계조절, 서로 간의 적절한 선, 예의, 말조심 정말 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들을 늘 잊고 산다. 정확한 상황 파악 그리고 이유 정도는 알고 하는 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침묵과 기다림은 그 상대에게 아주 소중함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간혹 경우 없이 나에게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갑질이란 것을 내세워 자신의 권위를 나에게 보이고 싶은 이도 종종 있다. 그것이 직장의 갑질이든, 물질의 갑질이든, 지식의 갑질이든, 연배의 갑질이든, 각양각색의 갑질로 나를 공격한다.
왜 그렇게 무례했을까? 그 사람들을 생각해보며 너무 이해가 안 가 따지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속으로 삭힌 경우가 참 많았다. 준비되지 않는 나에게 구는 그 무례함은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자존감까지 마구 뒤흔들어 놓는다. 처음에는 저 사람이 왜 저럴까? 하다가도 반복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잦아지다 보니 문득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자책하고 속상해 했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이 원망스럽고 내 맘도 모르면서 왜 그러냐고 같이 해대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그러다 보니 그 참는 것이 마음의 깊숙한 곳까지 병이 되고 상처로 아물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참고 참았다 집에 돌아와 꼭 잠이 들 무렵에 열 받고 속상하고 괘씸하고 그냥 싸울 걸 그랬어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수없이 밤을 꼴딱 세운 적도 많다. 바보같이 내 가 내 병을 키우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거기에 걸려 있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가지처럼 번져가고 그물망처럼 나를 올가미에 갇히게 하고 말았다. 삭혀지지 않은 괴로움이 괴로움을 업고 겹이 되고 다시 겹겹이 쌓이면서 나의 병은 커가기만 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 고민하고 선배들과 의논하고 친한 사람들에게 욕을 해대어도 그 병은 결코 낫지 않았다. 욕이 커지고 나로 인해 아무 상관 없는 그들의 관계에 벽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저히 그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속을 삭이기 위한 방침으로 나에 맞는 마음의 약병을 찾기 시작했다.
여러 책을 뒤적이며 읽고 읽었다. 그러다 드디어 어떤 책에서 나의 마음속에 그 모든 근심, 속상한 것을 통쾌하게 해줄 방법을 찾았다. 그 책 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무례하게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우아하게 웃으면서 그들에게 경고할 것이다. ‘지금 금 밟으셨어요? ’


나도 그렇게 할 것이다. ‘지금 금 밟으셨어요?’
가끔은 오해를 받아도, 무례함을 당해도, 좋은 게 좋은 거야. 서로 이해하며 살아. 그렇게들 이야기 한다. 그런데 왜 나한테만 이해하라고 하는 걸까? 혹여 중립을 지키는 상황이라면 상대에게도 그랬을까? 왜 나만 갖고 그러는데? 그 말들은 도대체 누구들 위한 말일까?
그것은 비겁한 말, 나에게는 아주 슬픈 말이다. 좋은 게 좋은 거 난 싫다. 나한테 무례하게 나를 슬프게 하면서 다 너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난 괜찮다고 그러지 말라고 할 것이다. 결코 그런 말들을 사양할 것이다.
자연이 놀랍고 아름다운 까닭은 목련이 쑥 잎을 깔보지 않고 도토리나무가 밤나무한테 주눅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어느 누구에게도 다른 이를 깔볼 권리는 없는 것이다.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도우려 들지 말아라.


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
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자리를 떠난 별을 보게 되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장슬로우

가끔 타인의 일로 인해 속상해 하는 사람을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참고 기다려 주면서 ‘그랬구나,’ 해주면 참 좋겠다.
갈매기는 아무 생각 없이 바다에 쉬고 싶어서 물가에 앉았다. 그러나 그 바다 밑에는 고래가 숨을 쉬고 있었다. 갈매기가 앉은 곳은 고래의 숨통이었다.


슬픈사람들에겐
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 말아요.
마음의 말을 은은한 빛깔로 만들어
눈으로 전하고
가끔은 손잡아주고
들키지 않게 꾸준히 기도해주어요.
슬픈 사람들은
슬픔의 집 속에만
숨어있길 좋아해도
너무 나무라지 말아요.
훈계하려거나 가르치려 들지 말고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도 위로입니다.
그가 잠시 웃으면 같이 웃어주고
대책 없이 울면 같이 울어주는 것도
위로입니다.
위로에도 인내와 겸손이 필요하다는 걸 우리 함께 배워가기로 해요.

―이해인, 「슬픈 사람들에겐」


참 좋은 시다. 슬퍼하는 이에게 우리도 “그랬구나.” 해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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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새끼



우연히 몇 년 전부터 미시령을 넘어 수업을 가게 되었다. 그곳은 아주 작은 학교(분교)였다. 처음 아이들을 만났을 때는 전교생이 4명이었는데 지금은 9명으로 늘었다. 3년 전 처음 방문했을 때는 폐허 같고 작은 학교였지만 지금은 아주 예쁜 학교가 되었다. 그곳은 3월 초면 어김없이 눈이 펑펑 내려 오전수업 시간 전에 눈썰매장을 만들어 눈썰매를 타고 노는 학교이기도 하다.
재작년은 내가 앉을 의자도 없어 집에 있는 의자 네 개를 차에 싣고 미시령을 넘어갔다. 처음 넘은 미시령이라 무섭고 혹시라도 의자가 무거워 옆으로 넘어지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도 내며 슬슬 올라갔다.
그렇게 처음 접한 작은 그 학교에는 어미 개 한 마리와 새끼 강아지 다섯 마리, 수탉 한 마리가(이 닭은 부화기로 알을 깨서 나온 인공 닭이라 싸가지고 없다고 함) 살고 있었다. 이 닭은 어미 품에 자라지 않아서인지 안하무인 격이다. 자기가 대장이고 누구든 곁에만 가도 쪼아대고 주차장 중앙을 턱 하니 차지하고 다리를 하나 깃털 속에 넣은 채 잠을 자고 한다.
아침에 주차를 하려면 몇 번 비키라고 해야 비키는 좀 짜증 나는 닭이다. 그래 일명 싸가지 없는 닭이다. 가끔은 새끼 강아지를 쪼아대어 수업 시간에 강아지가 아파하며 깽깽거리기도 하여 나가보기도 한다. 어린 새끼 강아지가 혹여 닭한테 물려 죽지는 않나 해서. 그럴 리는 없지만 혹여 너무 어린 강아지라 걱정이 되어서다. 저 수탉이 너무 얄밉다.
그러다가 몇 마리 강아지들은 분양을 가고 남은 강아지들은 제법 많이 자라고 수탉도 점점 위엄을 갖추며 벼슬도 나고 몸집도 커졌다. 그런데 몸집이 커지면서 수탉의 횡포는 점점 심해지듯 하더니 지가 왕이다. 어떨 때는 강아지 집이 제집인 양 턱 하니 자리를 잡고 있고 어미 개와 새끼 강아지들은 집밖에 쫓겨 나와 있기도 한다. 내가 마음 같아선 쫓아내고 어미 개와 강아지들의 집을 찾아주고 싶지만 사실 나도 무섭다. 거기다가 다른 선생 다리를 쪼아 무척 아프다고 하길래 겁이 났다.
그런데 가끔 왠지 수놈이라 그런지 가다를 딱 세우며 다리 하나로 버티고 있는 폼 새가 제법 멋있기도 했다. 닭이 멋있어 보이기는 처음이다. 나를 봐라 하는 듯 아주 폼 잡고 느긋하게 잠을 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겁내지 않는 너의 그 용감함에 한 표 준다. ‘옛다’ 하면서. 왜냐하면 사람인 내가 닭을 겁내니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강아지가 개의 모습이 나올 쯤 수탉에게 으르렁거리며 저도 수놈이라고 이제는 제법 대들기도 한다. 그렇게 대들고 쪼아대고 하면서 정들이 들었는지 둘이 잘 놀기도 한다. 누가 보면 닭인지 개인지 좀 헷갈릴 정도로 잘 논다. 그 모습을 보며 어미 개는 다 자기 자식인 양 흐뭇한 눈빛으로 그 개들과 닭을 쳐다보곤 한다.(이건 나의 생각. 개들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른다.) 하긴 그 수탉은 어미가 품지 않아서 누가 어미인지 모르고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니 자기를 돌봐 주는 어미 개가 어미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늘상 자기를 바라다보고 집도 내주고 하니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것도 나의 생각) 더구나 닭들은 자기 밥을 주는 사람을 어미라고 알고 따르고 한다는데 저놈의 수탉은 가끔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도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싸가지로 했나보다. (거기 계시는 한 선생님 말에 엄청 웃었지만 날이 갈수록 맞는듯하다.)
하루, 하루 커가는 강아지들을 보면서 한 마리 한 마리 분양이 되고 이제는 어미 개와 새끼 개 한 마리만 남았다. 물론 그 수탉도 남아 있고 여전히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여름 방학을 보내고 가니 그 새끼 개 한 마리가 그 위엄 있던 수탉을 물어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에 이런 개새끼네, 그렇게 같이 놀던 녀석이 이래저래 정들어 보이더니 아니었나 보다. 배신감이 들며 갑자기 화가 났다. 아무리 얄미운 수탉이라지만 좀 마음이 아프고 짠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어미 개가 사랑을 주어도 새끼 개도 개새끼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입구를 들어서면 묶여 있는 개 한 마리가 지 기분에 따라 짖었다 말다 한다. 어쩔 때는 겁나 난리를 쳐대며 짖다가 지가 피곤하고 지 몸이 노곤할 때는 너는 가냐 하는 식이라 나는 약이 올라 창문을 열고 “야, 왜 안 짖냐?” 하면은 가끔 그래서 짖기도 하는데 오늘은 영 미동이다. 저놈 정말 귀찮은 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개지랄이라고 하는가? 지 기분에 따라 짖고 말고 하는 것. 살아가면서 얼토당토않게 사람에게 날벼락을 맞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괜히 가만히 있는 사람을 모함하고 트집을 잡아서 생사람 잡는다고 하는 말들이 저 개가 변덕을 부리듯 개지랄을 떤다 하는 욕이 나온 것 같다. 그래 혼자 저 짖지 않는 개를 보며 킥킥거리며 막 웃었다. 개지랄 너무 웃기다. 그 수탉을 물어 죽인 개도 그런가 보다. 가서 한 대 발로 차버리고 싶다. 그러나 참아야지 나도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니.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사람은 생각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며 양보도 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의라는 것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예의가 없고 제멋대로인 사람들을 가끔 욕하곤 한다. 부모 밑에서 잘 자라서 예의도 배우고 부모 그늘에 살아야 제대로 된 인간이 된다고. 그래서 부모 없이 자란 사람을 호로 새끼 그렇게 옛 어른들은 욕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이혼가정도 많고 한 부모 조손 가족도 흔해서 그런 말은 아주 조심스럽고 쓰기조차 꺼리는 말들이 되어 간다. 세상이 많이 바뀌고 있다.


몇 달 전에 우연히 지인과 밥을 먹다 옆자리에서 결혼 상대를 고를 때는 이혼가정의 자녀는 절대 반대한다며 1위 배제를 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참으로 그 사람의 인격이 의심스러웠다. 일부러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혼이 흔한 이 시대에 그런 이야기가 화제가 된다는 것이 조금 듣기 거북했었다. 조금 무식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에 저리 뒤떨어진 말을 하고 있다니 하고 웃고 말았다.
요즘은 일반적인 가정에서 자라도 정서적으로 결함이 심한 아이들이 많아 심각성이 커지고 있다. 형제 없이 키우기에 독점력이 강하고 남을 향한 배려라든지 동정심이 전혀 없고 이기적이고 예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다. 다만 정서적으로 많이 부족한 아이들이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결핍으로 인한 것은 한 부모 가정이나 두부모 가정이랑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싸우면, 우리가 클 때는 다 싸우면서 크는 거다 하면서 부모들이 서로 이해했지만, 지금은 무조건 경찰에 신고를 하고 법으로 해결한다. 그놈의 법이 무엇인지 아이들조차도 수업 시간에 저를 잘 안 도와줬다고 경찰에 신고한다 하기에 아주 혼쭐을 낸 적이 있다. 아마도 그 부모가 알면 혼쭐을 냈다고 신고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다행히 아무 문제는 없었다.
그것은 한 부모든 두 부모든 아이를 어떻게 정서적으로 잘 키우냐는 문제에 달려 있다. 정서적으로 결핍한 아이들은 부모가 있어도 그 결핍에서 오는 문제로 사회성 부작용이나 스트레스의 조절 미 능력 등으로 충동적이고 타인에 대한 어떠한 배려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의 감정 또한 무시하며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 기분이 풀린다. 그러기에 세상이 달라진 지금은 정신적인 건강과 정서의 힘을 빌리며 아이들 키워야 하고 자신의 정서 함양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서가 메마른 부모는 자신의 욕구에 아이를 키우고 타인과 상호 간의 의사소통 따위를 엄두를 내지도 않고 즉각 반응하여 화로 대처하며 살아가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그랬는지에 대해 생각해 주지 않는다. 자기 말만 하고 급속도로 친하게 대하거나 낯선 사람을 엄청나게 경계하며 살아가고 있다. 한 마디로 정이라곤 일원 어치도 없다. 그만큼 건강하지 못한 정서는 모든 일상의 부정적인 산물이다. 질투, 비난, 시기로 인해 상대에 대한 안하무인 격인 태도ㆍ막말들의 사투를 벌이며 마구잡이 행동을 표출해 낸다. 그런 사람들은 나의 에너지를 빼앗는 것은 물론 나의 정신 건강까지 빼앗아가 버린다. 정서가 메말라가는 세상이 점점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우리의 미래는 극심한 분노 사회로 변해갈 것이다.
요즘 뉴스에서 나오는 많은 끔찍한 사건들, 사람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사건들이 우리의 가슴을 벌컹거리게 만든다.
우리는 사람에 대한 가치 평가를 어떤 가정에서 자라고 있었는지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닌 얼마만큼 정서적으로 잘 자랐는지에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제라도 정서적으로 얼마나 미약한지 알아보고 정서함양에 열성을 다하며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개처럼 살지 않으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