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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시] 너만 손녀 있니 외 4편 / 이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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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419회 작성일 19-12-2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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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계절이다

치열할수록 안타깝다

내일이면 또 바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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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손녀 있니



꽃들아 꽃들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젤 예쁘니?
진이.


종달새야 종달새야
이 세상에서 누가 젤 지저귀니?
진이.


햇살아 햇살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젤 밝으니?
진이.


나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만 손녀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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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장화와 덧신들이 식당 안을 누볐다


지난겨울 붙였던 핫팩처럼 뜨거운 발바닥


종일 내린 장맛비를 온몸으로 받았다


발바닥이여


젖은 가족을 네게 다 올려놓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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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와요 집배원 삼현 씨



봄날 같은 어머니 떠올리며 문상 가는 삼현 씨


빠른 배송 당일 배달 퀵 퀵
사람이 아닙니다
로켓입니다
반품도 기뻐하겠습니다
영혼을 제거했으므로
날개 없이 날 수도 있습니다


불발탄으로 날아다니던 오토바이
추석 앞두고 터졌습니다
우리의 허기를 위해
남은 생 쏟아버린 동료
웃음 띤 영정 앞에 명절을 바칩니다


사는 일이 죽음보다 못하다면 죽음 앞에 부끄러워 어찌하나*
불끈불끈 투사로 일어서다
첫사랑 그니 앞 순정처럼 붉어지는 님이여
비 맞는 꽃잎 가여워 더뎌지는 걸음
재 넘어 목청 큰 할머니 보청기로 동동거립니다


님께서 달콤하신 까닭은 지는 꽃잎
쓸쓸함을 가슴에 새겨두기 때문입니다
꽃잎 떨어져 잉태하는 고통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도 비가 옵니다
바람은 살랑거리기만 할 뿐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젖은 도로 위 그대의 안부가 걱정되지만
너무 빠르지 말고 지치지 않게 핸들을 잡을 것
같은 하늘 아래 함께 분노하는 열정의 시간과
꽃잎에 씌우고 싶은 우산
여린 따스함으로 닿아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저녁이 풀어놓은 어둠을 세고 있습니다


❇집배 노동자 권삼현 시인 운을 빌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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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문자



‘민통선 지역 멧돼지 사살작전으로 출입을 통제하오니 주민 여러분의 협조와 양해를 구합니다.’


나는 내 의지대로 멧돼지가 된 것이 아니다.


내 어미가 나를 낳은 곳은 따스한 오월의 숲. 햇볕과 바람 나무들이 친구가 되어 주었지.
풀과 나뭇잎들이 고요해지는 계절, 허기져 산을 헤매다 보면 사람의 마을로 잘못 들어간 적도 있었어. 몇몇 친구들이 온몸 벌집투성이 되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경사라도 되는 양 몰려온 그들이 사진을 찍어댔지.


부드러운 채소와 고구마 옥수수를 먹은 것은 단지 배가 고파서였어.
종족보존을 위한 대결일 뿐. 우리는 그 누구도 먼저 공격한 적이 없었지.


이제 내 차례가 되었어.
한 점 부끄럼 없는 우리를 사냥감으로 공표했지. 무지몽매하지만 일용할 양식을 탐한 죄 밖에 없는 우리는 무참히 쓰러질 것이야.


저 가련한 동물의 상위 포식자들은 스스로 만든 규율을 비웃고 조롱하는 집단.


살아남더라도 그들의 착취와 지배를 받으며, 한 그릇의 밥에 만족하고 스스로 노예의 길을 걸으며 연명하겠지. 우리가 멧돼지이기 훨씬 전부터 저들은 돼지와 개의 영혼을 가졌다는 풍문이 돌았거든.


부른 배를 끌어안고 우리 터전을 빼앗는 인간에게 쫓겨 어디로 가야하나.


우리의 재난문자를 받아 줄 신이여 존재 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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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너도 집을 나가고 싶은가 보구나



집이 흔들
삼십 미터 밖 공사장
포클레인 한 번 내리쳐도 흔들
언덕 아래 가스관 공사
두부 자르듯 길을 갈라
몸서리치듯 너는 너를 흔들었다


어린 몸 데려다 첫아들 들었을 때
마당에 널브러진 밥상
취기와 객기 앞에 무릎이 꺾여
부서진 문짝처럼 흩어졌다


젊은 몸 부추기며 식당일 부릴 적에
봄꽃처럼 나는 나를 떨구었다.


생채기 생긴 곳곳
속살 흘리는 네가
안쓰럽기도 하다만


너와 나 사이
저 먼 은하에서 그리움이 돋아 만나게 되었다면
아득한 등 너머로 돌아가자


돌아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