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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시] 어부의 회상 외 9편 / 조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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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98회 작성일 19-12-26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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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동을 다시 찾아들어

바다는 항시 곁에 있었다


내가 마음을 열지 않는 한

바다는 출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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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의 회상



문을 열면 푸른 바다였다


허깨비 어부를 태운
쓰러질 듯 삐걱거리는 의자
진종일 쏟아지는 태양을 피해
골목 어귀의 그늘로 이사를 한다


만선을 꿈꾸던 젊은 날의 욕망은
고향을 그리다
청호동에 닻을 내리고
밤마다 덧없는 꿈이 되어
하얗게 무너져 내린다


햇살이 창가에 안부를 물으면
마지막 남은 패기
날카로운 눈매에 시간을 꿰어
삶을 퍼덕이며 유영하는 사람들을
낚아 올리고 있다


길목 끝으로 사라지는
기억의 수레바퀴 소리를 들으며
뭍과 바다를 가르는 길
사이에 두고
번득이는 포획자의 시선

집으로 숨어드는
나는
한 마리 인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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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청호동 축항을 에워싼 테트라포드에는
물길의 흐름을 읽고
고기떼들의 계절 습성을 아는
낚시꾼들이 시간을 잊은 채
따개비로 붙어 있다


낮과 밤을 적절히 조율해 가며
몫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둥그스런 둔덕을 타다
고르고, 고르다 탄다


가끔씩 바람이 드세고
파도가 매서울 때는
바다를 비우기도 하지만
어풍이 드는 날에는
남기고 간 흔적들로 넘친다


거두어 가지 않은 쓰레기들은
테트라포드 틈 사이에서 은밀하게
제 몸을 조금씩 조금씩 바스대다


찰싹찰싹 파도의 넉살에
넓고 깊은 바다로 흘러든 부끄러움들
생선의 밥이 되고 갈매기의 생명줄이 되어
바다가 아프기 시작했다

밥상 위에
플라스틱 생선 한 마리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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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병 일기


대형마트 하역장
흥정도 투정도 허락하지 않는
빈 용기 무인회수기 두 대가 나란히 섰다


오전 열 시
열과 행을 맞춰
빈 병들의 사열식이 시작되고
1에서 30까지 제 몫의 셈
사원의 구령으로 끝이 나던
어제 같은 어느 날


비어 버린 가슴을 향해
세상의 정 속만 쓰리다고
푸념에도 냉정하기만 하다


라일락 향기 날리던 봄 그늘 아래
처절한 기다림은 짧을수록 좋다더라
뜨거운 여름날
자전거 페달에 목매어
깨어질까 조바심에 울어대는
휘파람도 조금만 아프다더라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고
아무리 마셔도

잠들지 못하는
빈 병들의 어지러운 세상


실업자 하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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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



청호동 수로에
자동차가 곤두박질쳤다


파도 소리 잠든 깊은 밤에
거침없는 해변 도로
청춘의 질주가
꺾어진 모퉁이를 벗어나
겨울 수면으로 빠져들었다
동상과 키 낮은 나무 사이로
교묘히 작은 공간을 열고


웅성거리는 호기심은
숱한 소문을 싹 틔우는
슬픈 전설이 되고


뼛속을 파고드는 얼음장은
생과 사의 갈림길로
두 젊은이의 우정은
뜨거운 심장으로 멈추었다


걷잡을 수 없는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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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나기



여름의 절정은 휴식을 위한
뜨거운 길을 찾는 것이다


더위를 한껏 먹은
늘어진 피로들이
잠 못 이루고 끈끈한 밤


작은 집에는
방학이라는 예약권을 거머쥔
손주들이 짐보따리를 풀었다


계곡의 물소리가 되었다가
부서지는 파도가 되었다가
모래알의 재잘거림
한 사나흘의 불편이
은근슬쩍 열흘로 길어졌다


후더운 하늘 아래
밀려드는 자동차 물결 일렁이며
반라의 육신 청춘으로 농익는 곳


산. 바다. 호수가 어우러진
내 인생의 축복으로 남을
속초!
네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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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계산법



톡, 톡, 톡
스무 살 코앞까지
주판알을 튕기며 계산법을 배웠다


정교하게 잘 다듬은
꿈의 세상은
매끄러운 중심축을 타고
하나 더하기 둘
둘 더하기 셋


예물 같은
수십 년 묵은 주판
손때 잃은 생기로
뻑뻑한 계산을 한다
넷 빼기 둘
둘 빼기 하나


이삿짐을 챙길 적마다
버림받은 자식이 되어
깊숙한 장롱 어디엔가
아우성 없는 소리를 깔고
유물로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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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밤에



조금은
나지막이 내리면 좋겠어
너무 먼 나라의 이야기들


도란도란 밤을 풀어 놓은
청호동 잔물결 위로
화폭의 그림 한 점
가로등 불빛 따라 일렁이고


바다의 가슴은
매양 외로움을 다독이지만
가난한 백사장의 상처 난 등을
부드러운 파도의 손길로
토닥이는 밤


내 마음을 울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
내 마음이 올리는
노란 해바라기 한 다발
빈센트 반 고흐가 머무는
어느 작은 별에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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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장마



눈물을 얹는다는 것은
후줄근한 기다림
끝자락을 보는 것이다


묵직이 어두운 마음
풀지 못한 채
부는 바람 탓이라고
미련을 안고 떠돌기만 할 뿐


산기슭에 올라
나란한 시선으로
가벼이 흐르라
부르는 나를 두고


조용한 걸음걸이
멀어지는 등 뒤로
마른 눈물이
햇살로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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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은 그렇게 멀어지는가



초저녁잠이 깊어지면서
이른 새벽이 훌훌 자리를 텁니다


바삐 지나온 세월이
잠시 미안한 듯
이부자리 속에서 차분히 잠을 자고
별일 없는 생각들로 꼬리를 무는 시간
머언 기억과 가까운 기억들이
와르르 마음으로 쏟아집니다


곁을 주지 않은 사람들과
곁을 주지 못한 사람들과
곁을 나누어 가진 사람들의
아침이 궁금해집니다


소식 모르는 친구들
가벼이 스쳐 간 인연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리워져


한 번쯤이라도
안부를 전할 수 없는 곁을
끌어안으며 물어봅니다


인연은 그렇게 멀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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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가 있는 정원



어머님이 물려주신
자그마한 터에
따개비집을 지었다


그리움의 물빛을 안은 자식들
도시로 떠나보내고
두 내외
소꿉장난 저녁밥이 든든하면
여름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맞는다


겨우 내내 걸어 두었던
설악산 푸른 담장을 열고
출렁이는 오솔길을 거닐어
다다른 하얀 끝점


바다의 심장 소리 지나는
청호동을 향해
속초의 나비가 날아오르고
꽃들이 향기를 담아 든다


기대고 누운 하얀 얼굴이
내리는 어둠에 사위어 가고
푸른 풀잎을 스쳐 온 바람
물비린내가 짙어질 때
바다정원에 내리는

별빛이 깊어간다


스르르 잠들고 싶은
여름밤 작은 등대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