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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시] 힘들어 힘들어 그 후 외 9편 / 양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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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09회 작성일 19-12-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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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뫼』 원고를 내야되는 것을 보니

또 한해가 지나가나 보다.

속초평생교육정보관에서 문학을 공부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넘었다.

아직도 상큼하고 신선한 표현은 서툴지만

그저 자연이나 사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을

표현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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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 힘들어 그 후



서너 살 남자애가 엄마에게 매달려 있다
양쪽 어깨에 가방을 멘 가냘픈 엄마
“힘들어” “힘들어” 내려놓으려 하지만
안간힘을 쓰며 허리에 붙어 있다


균형을 맞춘다며
무거운 장바구니 양손에 들어 주던
초등학생 손주가 생각난다


무엇이 아이를 철들게 할까
몇 년의 태양 빛,
보고 들은 세상 잔소리
알 수는 없지만


칠십 대 중반을 넘긴 내 지혜는 어디 갔을까
아직도 귓전을 맴도는
“힘들어”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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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쩌다



세월이 다 가버렸네
아니 어쩌다 눈앞이 여든이야
가물가물 눈으로 이제서야
내 그림자 바라보고
뒤도 돌아보네


돌아간다 해도
흠 없이 살 리 만무하지만
후회되며 되돌리고 싶은
내 삶의 흔적들


지구를 품어 안은 공기처럼
작은 마음으로나마 이웃을 감싸 안고
먼지 앉은 풀 한 포기도
따스하게 바라보며
나를 마무리 지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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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가장



약지 손톱 옆에 두 줄 상처가 났다
핸드백 속에서 무언가를 찾다
종이에 베인 것이다
저를 지키느라
상대에게 아픔을 준 종이 몇 장


상처가 그렇듯
삶의 모양새도 아물 텐데
환하게 피어날 어린 살붙이
모질게 꺾어버린 못난 아빠


나약이란 보재기로
식구들 둘둘 말아 안고
서글픈 가장 되어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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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와 태양



몸을 막 씻고 나온 옷들
건조대에 매달려 있다
목마른 봄볕 쏜살같이 달려와
빨래를 헤집고 다니는데
한결 가벼워진 옷들
살랑살랑 춤을 춘다
지루해진 태양
또 다른 별 찾아 떠나가고
제 몸 거두어 줄 손길 기다리며
빨래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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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뜬 반달



벌써 별들은 떠났는데
시간의 끈 놓쳐 버린 반달
하늘을 두리번거린다


뼈를 앙상하게 드러낸 울산바위
구름 속에 아랫도리만 가린 채
바람에 떨고 있다


그토록 찬란했던 어젯밤
도도한 모습 어디 가고
풀어진 옷고름에 하얀 소복으로
반쪽 찾아 희미하게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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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와 시간



째깍째깍
억겁의 시간을 갉아먹는 초침 소리
동그란 얼굴 어루만지다
코가 주저앉았다


중앙에 붙들려
돌고 도는 팔다리가 어지러워
가끔은 비틀거리지만
하늘이 산을 베개 삼아 눕는 시간에도
한 생명이 땅속에 몸 누이는 때에도
졸지 않으며 지구를 깨우는 너


한 세대 뒤에 다른 세대를 엮어
역사를 이어 가는 주인에게
생명의 피고 짐을 알려 주거라
네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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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내가 뒤를 돌아보는 것은
새벽기도 가는 길
방금 지나친 사람이 혹시나
반가워해야 할 사람이 무서워서입니다


내가 뒤를 돌아보는 것은
조그만 방귀 소리를 누가 들을까 해서입니다
그래서 집이 좋은가 봅니다
작은 낙원이 아닐까요


내가 뒤를 돌아다보는 것은
살아온 내 모습이 부끄러울까 해서입니다
돌아보지 않아도 될 그때
큰 상은 아니더라도
작은 칭찬 한마디 듣고 싶어서입니다


소금기둥이 되어 버린 롯의 아내처럼
어리석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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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바위 사랑



말갈기 날리며 하얀 숲이 달린다
날카로운 이빨 드러낸
울산바위 뒤로 하고
영랑호에 걸터앉은 바위를 찾아서


마을 처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사람이 되고자 웅크렸다가
영원히 돌이 되어 버린 호랑이


애타는 마음 물속에 숨긴 채
화살마저 튕겨버린 애절함
오늘도 호수를 파랗게 물들이며
떠나버린 처녀를 기다린다


서라벌을 잊은 화랑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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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이 삭발한다



죽어서도 넓은 땅 차지하고 누운 왕
구월의 땡볕 아래
민초들이 낫질한다


삐죽삐죽 솟구치는 욕망들
울분의 칼끝으로
산산이 토막 낸다


파아란 허공으로 튀어버린 야망 조각나고
탄식도 호령도 없이
조용히 누운 허깨비


불국사 종소리 들으며 백팔번뇌 다스리고
무소유를 소유하라며
염불하듯 삭발하는 커다란 능


천년 세월 전해 주는 바람에
알싸한 아픔이
온몸을 휘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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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산에는 촛불잔치가 열린다



어린 소나무에서 노송까지
가슴 가득 촛불을 켜 들고
하나님께 찬양 드린다


지난겨울
우리네는 무탈했다고
손자가 두 명이나 생겼다고
저마다 자랑하며
왁자지껄 감사해한다


어젯밤에는
아랫마을 늙은 쥐 삼 형제
축하하러 왔었나 보다
촛불을 켜둔 채
날 샌 줄 모르고 잠든 구부정한 가지 밑에
까만 솔방울 두어 개 뒹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