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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시] 겨울 변산에서 외 9편 / 정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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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76회 작성일 19-12-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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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는 「마법의 순간」에서

살다 보면 흔히 저지르게 되는 두 가지

실수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끝까지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두 가지 실수로 여태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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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변산에서



바람은 입김처럼 따뜻하다가
어느 순간
이빨 날카로운 짐승으로 포효할 때
당신에게 덥석 목덜미 물리고 싶었다
눈보라 속
더 이상 길을 묻지 않는 눈사람이 되어도 좋았다
수평선 끝에 짐을 풀고
아이를 낳고
눈부시게 하얀 빨래를 널며
바람에 묶인 저 배의 발목처럼
나도 묶이고 싶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흔들리게 하는 바다
갈 곳 없는 사람처럼 이곳에 와서
부서지는 서로의 파도를 생각했다
서로의 손을 잡은 채
문득 따뜻한 이별에 대해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의 일몰을 지켜보았다
멀리 격렬한 포말이 일고
캄캄한 당신의 등에 기대어 울던 눈발들
 
나의 변산은 늘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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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1



일요일 오후,
미사가 끝난 성당 건너편
갑자기
한 여자가 허공에 삿대질을 하며
저 혼자 소리를 지른다
간혹 뒤돌아보면서 욕설도 내뱉는다
누군가를 때릴 듯
빨간 가방을 휘두르기도 한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안아 줄 수 없어
간절하게 지켜보고만 서 있다
쯧쯧, 어쩌다 저렇게 됐는지…
그래도 미사 드릴 때는 괜찮았는데…
 
누구라도 저런 길 하나쯤
다 늑골 속에 묻고 살지 않을까
나도 한때 모래사막을 헤매다
저 길로 갈 뻔한 적 있었다
저 여자,
미친 것이 아니다
모래사막이 된 가슴 속에 회오리바람이 불어
지금 잠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느님.
저 여자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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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2



점점
가게 운영하는 것이 힘에 부쳐
어느 날 마감을 하다가
‘아, 정리해버릴까 ’
혼잣말로 중얼거렸는데
옆에서 그림 그리던 일곱 살 딸아이가
그 순한 눈동자로 나를 빤히 보더니
“그럼, 우리 어떻게 먹고 살아?” 한다
오, 하느님
이 어린 것이 무얼 안다고
이런 처절한 말을 하는지요?
티 하나 없이 순결한 마리아 닮은 딸이
언제 이런 큰 십자가를 지고 있었는지.
먹고 살기 위해서만 살지 않도록
딸을 위해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다*
 
❇카톨릭 미사 때 영성체 예식에 부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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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신사



오늘은
작은 암자 같은 이 절에 든다
스님 없는 이 절은
보살이 절이고
절이 보살이다
무명의 가사 한 벌 없는 절에
세상의 묵은 때 두껍게 입은 나를
온전히 맡긴다
가진 것 없는 태초에 빈 몸이었으니
부끄러움조차 거추장스러운 옷
훌훌 알몸으로 절에 든다
낡아가는 육체를 잊고
법문을 외우듯 졸다 깨다 보니
절 한 채 다 타들어 간
보잘것없는 몸뚱이에
동백꽃 피었으니
잠시 합장하고 싶은 마음 누르고
때 민 돈
세신사에 봉양하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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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마리아



꽃들을 잃고 나는 쓰네
반성하라 아랫도리 역사를 외면하는 아베여
무궁화꽃 짓밟던 일본의 군화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조선의 소녀들 끌고 가서
공포에 몸을 떨던 꽃잎들 짓뭉개고
망설임도 없이 쏟아내던 더러운 배설물들
반성하라, 결코 너희 것이 아니었던 우리의 누이들께
아베 말이야,
사과는커녕 진실의 문을 잠그네
가엾은 조선의 소녀들
오! 아베 마리아
 
❇기형도의 「빈집」 패러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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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갈이



시장에서 얼갈이 한 단을 샀다
얼갈이를 보면
품 하나 모자란 이름이 어수룩해서
안쓰럽다
겨우 배추를 닮아 이름만 빌려 왔으니
배추 바깥에서 얼갈이는 헐렁해서 착하다
 
아버지는 나를 추울 때 심었다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1월이었다
나는 얼간이처럼 울었다
단단하지 못했고 끝끝내 배추가 되지 못해
한평생 속이 허술한 얼갈이로 살았다
배추밭 언저리에서
간신히 이름 하나 얻어
용케 여기까지 왔다


집으로 오는 내내
얼갈이가 얼갈이를 들고
겉절이처럼 순하게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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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



그를 떠나보내기로 했다
바람 한 자락이 그의 등을 쓰다듬고 사라졌다
붉게 충혈된 바늘잎 몇 개가 땅 위로 떨어졌다
마지막 그의 눈물이었다
선 채로 생을 놓았지만 그는 여전히 장대했다
고유제 축문 읽어 주듯
다시 흙으로 돌아가라 다독이며
막걸리 한 사발 가만히 그의 발밑에 부어 주었다
그리움이 스며들었다
 
목수가 도끼를 들었다


오랜 세월,
함께 늙어가는 낡은 기와 내려다보며
한 집안의 일기를
꼿꼿한 필력으로 기록하던 그
아이들이 태어나면 생솔가지 내주어 금줄을 쳤고
송엽주를 즐기던 할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솔잎을 얻었다
젊은 날 객지를 떠돌던
아버지의 종아리를 바르게 세우기도 하고
사월이면 송홧가루 지천으로 날려
먼발치의 잔 꽃들까지 밤새 몸살을 하게 했다


사시사철 푸른 힘으로 한 가계의 내력을

말없이 적어 가던 그가
어느 날인가 침엽의 필을 서서히 내려놓았다
앓고 있었다
오직 그의 이름만 시퍼렇게 푸르렀다
목수는 두어 번 손바닥을 비볐다
어명이오!
높이 쳐든 어명이 그의 한 생을 아프게 찍었다
쿵,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곧게 넘어지는 저 황홀한 복종
도도하게 그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멎었던 시간이 토막토막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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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플러스 원



마트에서 소시지 시식은 쌈빡하다
뭐랄까
따끈한 쌀밥도 당기고
시원한 맥주도 상상이 되는
소시지를 좋아하지 않지만
요 염장 지르는 맛에
가끔 한 번쯤 맛을 본다
오늘은 원 플러스 원
그 꼬드김에 덜컥 장바구니에 담았다
허나 집에 와서 먹으면
왜 그리 짜고 맛 없는지


연애할 때
조금씩 맛보던 남자의 가슴과 눈빛은
나를 안달나게 했다
만나고 집으로 오는 길이면
뭐랄까
막차를 놓친 기분 같은 거
밀물과 썰물이 마음을 갯벌로 만드는
그런 맛들이 감질나서
남자와 남편을 묶은
원 플러스 원을 통째로 들였다
 
속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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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화장실 문이 열리고
기름지게 생긴 한 여자가
밍크 목도리로 코를 막으며 유난스레 나간다
볼일이 급한 나는 얼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말 코가 빠질 만큼 냄새가 지독했다
얼른
숨을 멎고
소변을 보고 나오는데
내 뒤의 여자가 들어가다 말고 움찔하더니
홱, 나를 돌아보며 째려보듯 코를 막고 들어간다
나는 손을 씻으며
‘나 아닌데’ 속으로 뇌까렸지만
밝힐 도리가 없다
 
휴게소 안은 먹는 사람들로 붐비고
저 멀리
다부지게 밥을 먹고 있는 밍크 목도리도 보였다
똥도 처음엔 음식이었다
는 사실을 늘 잊고 사니
살아가는 게 참 밥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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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택시!



새벽에 급한 일로 카카오택시를 불렀다
차량 번호와 노선, 6분 후 도착이라는 알림이 왔다
새벽 텅 빈 길 위에서
섬뜩한 한기를 느낀다
내가 이 시간 이 위치에 서 있는 것을
알고 찾아오는 이 편리한 두려움
 
택시! 택시!
를 외치며 손바닥 하나로 택시 한 대
거뜬히 세우던 힘
술 취해서 혀 꼬부라진 채
온몸으로 택시 잡던 영등포역


애인과 헤어진 날
나무처럼 서 있는 내 앞에
빈 택시 낙엽처럼 서 있다 가던 11월
광화문 만 원!
을지로 만 원!
서로 자신이 먼저 세웠다고 목청 높이던 낭만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새벽바람에 외투깃을 여밀 때
‘예약’
이라는 불빛을 달고 카카오택시가 앞에 섰다
빌어먹을, 내 행선지도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이 필요 없다
가슴 속에선 여전히

택시! 택시!
 
그 옛날로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