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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시] 돌탑 위에 봄 외 9편 / 정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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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75회 작성일 19-12-30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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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무단 횡단을 한다.

머리를 심하게 흔들며

위태롭게 발을 떼는 할머니의

불안한 하루를 응원하다

그리 멀지 않은 나의 모습을 그려본다.

누군들 늙고 싶을까?

힘들다 아프다 엄살 부리지 말고

건강한 오늘에 감사하며 길을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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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탑 위에 봄



남자가 돌탑을 쌓는다.
평평한 밑면을 거부하고
꼭짓점으로 세우기를 고집하는
남자의 탑은
무너지고 다시 서기를 거듭하다
각진 모서리가 바닥이 되고
날 선 머리 위 둥근 돌이
모자가 되어 앉아 있다.
 
아슬아슬한 중심 잡기


꽃샘바람에도 쉽게 무너지는
몇 번의 봄을 보내고
긴 겨울의 터널에 갇혀
쓰러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다
중심 잡기의 달인이 되었다는 남자


그 남자의 돌탑 위에
속도와 무게를 읽을 수 없어
중심 잃은 나의 봄이
슬쩍 올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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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그늘



사월을 밝혀 주던 수선화
하나둘 시들어 갈 때
곁 지키던 철쭉
붉은 꽃잎 서둘러 피운다.
 
철쭉꽃 활짝 핀 화단은
꽃가루를 나르는 벌들로 분주하다.
그렇게 환한 봄날도 잠시
갑자기 찾아든 더위에
붉은 옷 서둘러 벗고


철쭉이 만들어 준 그늘 속에서
키 작은 패랭이꽃 무리지어 피어난다.


스치듯 지나가는 젊은 날
꽃이 피든 꽃이 지든 계절은 가고
누군가 놓고 간 그늘 아래
색깔 고운 꽃들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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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우물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를 올려다보며 웃고 있는
아이가 있다.
 
오늘은 웃고 있지만
심통이 나면 돌팔매질을 하거나
떼를 쓰며 우는 아이


두레박 내려 주며
이제 그만 나오라고
어르고 달래도
아이는 도리질을 친다.


물이 다 마르면 나오겠지
퍼내고 퍼내도
좀처럼 바닥을 보이지 않는 우물
    
성장을 멈춘 기억 속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 나
우물 속에서도 아직 목이 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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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놀이



햇살이 눈부신 아침이었어
색색의 꽃잎 뜯어다
서둘러 툇마루 끝에 밥상을 차렸지
지난밤 소리 죽인 엄마의 흐느낌과
끊임없이 피워 올리던 아버지의 담배 연기가
너를 떠나보내기 위한 준비라는 걸
어렴풋이 알았던 게야
사금파리 위에 곱게 차려진 아침상을 보고
오늘은 소꿉놀이하면 안 된다고
일곱 살 언니가 울며 나무랐지만
아니라고 소꿉놀이가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어
하얀 광목에 싸인 상자가
아버지 지게 위에 올려지고
오열하는 엄마와
대문 가로막고 흐느끼는 언니 뒤에
오도카니 서서 말하지 못했어
 
- 명희야 밥 먹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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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因緣)



헝클어진 실타래를 푼다.
어디서부터 엉켰는지
헤집고 더듬어도
보이지 않는 실마리
가위 들어 싹둑 잘라 버렸다.
 
가벼워진 마음은 잠시


허공을 떠돌며 이명으로 울던
잘려 나간 기억들
서로를 엮어 실타래를 만든다.


마디마다 옹이가 들어앉은 실로
다시 옷을 짠다.
손끝에 옹이가 잡힐 때마다
고개 드는 속울음


옹이를 달랜다.
가위질 함부로 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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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는 나비



봄을 기다리던
서른여덟 푸른 꿈
강나루에 내려놓은
나비 한 마리
 
흔들리는 젖은 날개
무겁게 펄럭이며
강을 건넌다.


한 달 후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큰아들이
동생 손 꼭 잡고
나비를 배웅한다.


이별을 배운 적 없는 형제는
암과의 투병 중
물비늘로 출렁이던 나비의 눈물을
내일 또 볼 수 있는 별빛이라 여기며
고사리손을 흔들고


강 한가운데 멈춰선 가녀린 나비
등 떠밀던 겨울바람
강물과 함께 상주가 되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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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미



초록빛,
반짝이는 아크릴 실로
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쓸모 있는 무언가가 되어
사랑받으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나의 주인은
반짝이는 까칠함과
화사한 초록의 장점을 엮어
내 생을 결정지어 주셨죠.


그때부터 내 자리는 싱크대 위 구석진 곳
주인이 나를 버릴 때까지
오염돼서 돌아오는 그릇들을 말끔히 닦아
다시 일터로 보내는 게 나의 일


늘 반복되는 일상이 힘겨울 때면
빨리빨리 낡아져서 쓰레기봉투 속에
생을 묻고 싶을 때도 있지만


떠나는 것도 머무는 것도
이름을 주신 그분이 결정하실 일
세제 거품 흠뻑 물고 오늘을 설거지하는
내 이름은 수세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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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아프다



꽃들이 콜록거린다.
온통 희뿌연 하늘이
일주일 내내 미세먼지 나쁨
경고음을 울려대고
 
먼지 씻어 줄
봄비를 기다리던 며칠
소리 요란했던 천둥번개가
소낙비 대신 가랑비만 살짝 뿌리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래도 봄은 봄
홍매화, 산수유 만개한 산사를 찾은 사람들
눈 깜박이며 꽃을 반기고
꽃구경하던 아이가 엄마에게 묻는다.
“꽃에서 왜 향기가 안나요?”


꽃향기 죄다 먹은  마스크
멋쩍게 웃으며 아이의 눈치를 보고
콜록거리던 홍매화와 산수유
파르르 몸을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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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낙엽



다갈색 얼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질 것 같은 아버지가
딸의 행방을 찾는 전단지를 나눠 준다.
 
대교 위에 신발 벗어 놓고
유언 한 줄 없는 다이어리 한 권 남겨둔 채
푸른 잎으로 반짝이던 스물아홉, 바다에 던진
딸을 찾고 있다는 아버지
행여 그 딸 만나게 될까
곱게 웃고 있는 모습 가방에 넣어 두었다.


함께 투신한 남자의 주검은 물 위로 떠올랐지만
딸의 주검을 찾지 못한 경찰이 사망에서 실종으로
수사의 방향을 바꾼 뒤 아버지는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마을 곳곳에 현수막을 걸고 전단지 나눠 주며
딸을 찾아다니는데
다이어리에도 남기지 못한 마지막 말들
무수한 소문으로 시골 마을을 떠돌고


길 위를 배회하던 젖은 낙엽 서둘러 길 떠나던 날
곳곳에 걸어 두었던 희망을 접은 아버지는
허공을 떠도는 딸의 미소를 거두어
가을을 따라 떠났다.


겨울을 몰고 온 바람은

빛바랜 현수막을 찢을 듯 흔들어 대는데
가방 속에 넣어 두었던 스물아홉의 푸른 잎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를 보고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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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의 말



수식 없는 투박한 토닥임


괜찮다고 다 지나간다고


따듯한 손이


차가운 눈물 닦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