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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시] 발 없는 말 외 10편 / 송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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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17회 작성일 19-12-30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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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사리 속을 드러내지는 않는 강

그 깊은 속을 알기까지

난 얼마나 더 속을 채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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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말



한때 변두리 단독주택에
둥지를 튼 적 있다
핸드폰이 잘되지 않는 그 집은
밖에 나가 통화를 해야만 했는데


그럴 때마다
별명이 방송국이라는
이장 아줌마와 마주치는데
마치 부정한 여자를 보듯 야릇한 눈빛은


실체 없는 외문으로 전파를 타고
불 지핀 사람의 존재조차 묘연해
아니 땐 굴뚝에 연기만 피워 냈고


풀지 못한 변방의 숙제는
지금도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을
발 없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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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낙엽



늦가을 내린 비에
젖은 낙엽들
비질에도 쓸리지 않는
애매한 존재


푸른 날의 혈기는
세상을 다 품을 듯
왕성했지만


역류할 수 없는 시간은
퇴색된 무늬 속에
앙상한 잎맥만 남겼을 뿐


아빠
이제 젖은 낙엽 되지 말고
엄마한테 잘 하세요


아무렇지 않게 흘려들었던 말이
내 안으로 젖어 들어
허물을 내려놓은
빈 가슴에 노을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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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정선행



이 길 갈 때면 언제나 설렌다
오봉댐 지나 목계리 수령 깊은 나무
우두커니 앉아 있는 평상에 눈길 던지고
삽당령 구 빗길을 흔들리고 흔들리며
임계 어디쯤에 시름을 내려놓으면


놓아 주지 못해 떨고 있는
아우라지 갈대들
나만큼이나 너도 아프겠구나
어쩌려고 버리지 못한 너를
여까지 데리고 왔는지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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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에 닿을 듯
떠 있는 얼레빗 하나


반듯한 가르마
하얀 모시 적삼
가만가만 발소리도 고우시던
내 어머니


올 추석에도
성묘조차 오지 않는
무심한 막내딸 보시려고
낮달로 오시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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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기억



꽃 빛도 야윈
여름 한 철


피고 지고
폈다 지며


몸 열어 파열하는
꽃 주머니들


그 꽃잎 찧어
손톱에 올려놓고


주름진 세월 풀어
가만가만 동여매면


덩달아 물이 드는
내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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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



입추이건만
물러가지 않는 여름


산뜻한 바람 안으며
샘터 가는 길


적요를 깨우는
풀 벌레들 일제히 가을을 부르는데


밤새
안부를 주고받는 사람들과
물 한 모금으로 몸을 깨우는
모노 골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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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꽃



이슬 내린 논두렁
초록 카펫 깔고 앉은
분홍치마 그녀


처음으로
서울 간
아홉 살 계집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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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6



바람도 숨죽인 한낮
진초록 꽃분홍 입술로
송이송이 불 밝힌 꽃등들


한으로 깊어진 지독한 그리움
붉은 문신을 남기고
그 사랑 얼마나 깊었길래


눈부신 봄날
툭 툭 송두리째 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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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7



꽃 피던 날
눈부심에 눈을 감았고


꽃 지던 날
볼 수 없어
외면해버렸다


비명도 없이
생을 투신한


꽃물 든 가슴은
왜 이리 먹먹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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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9



내 안에 너를 들였던 시간


아픈 만큼 아파야 한다는
담을 허물며


약속이 어긋난 자리
밤새 담아둔 애틋한 말


꽃으로 피어나
무심히 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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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10



굳이 보내지 않아도
이별이 된 사람


잊어야 함과 지워야 할
날들을 아프게 지나왔는데


아직 보내지 못해
그 이름 담아놨지만


그 사람
내 속에 드리지 못한
옹이로 앉힌
폐허 그 가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