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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시] 저무는 봄밤 외 9편 / 최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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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64회 작성일 19-12-3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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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앞 전봇대에 앉아 있는 까치들을 보고

"얘들아 시끄럽다, 입 좀 다물면 안 되겠니?"

하면서 혼자 웃습니다.

아파트를 벗어난지 4년,

작은 마당에 꽃씨를 뿌리면

부르지 않아도 나비가 오고 벌이 오는

그런 호사에 기대서 오늘을 삽니다.

보이는 모두가 노래가 되고 시가 되는

무음의 말들이 참 좋습니다.

눈으로 말을 하는, 말 할 수 있는

그런 날들이 제게는 그냥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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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봄밤



창밖엔 눈이 내리고
나는 창에 기대서서 눈을 바라봅니다.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잠처럼
몸에 익은 것들 하나둘 곁 비우는 이즈음
빼곡히 들어찼던 욕망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관심도 떠나고
쓸쓸한 평안만 오롯합니다.
그 속으로 푸들푸들 적막이 자라지만
언젠가는 그도 저물고 만다는 걸
나는 압니다.
멀었으나 가까워진 오늘처럼
무거웠으나 가벼워진 지금처럼
저문다는 건 피어나는 일 다름없다고
내가 나를 다독이는 따듯해서 시린 밤
오면서 녹는 봄눈같이
스스로 흔적 지우는 연습을 하는지
남은 것들이 서로의 안녕을 눈으로 물으며
덤덤히 스쳐 가는 그런 밤입니다.
오면서 저무는 봄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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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사에서


영종각 앞
자유롭게 타종하라는 글에 당을 든다.
무엇을 기원하며 종을 칠까
망설이는 내 맘을 알아차렸는지
내려놓고 자유로워라 말씀을 건넨다.
때린 만큼 맞아 주는 범종
흩어진 종소리는 한동안 말이 없고
오롯이 남은 고요 속으로 들어가
또 다른 나를 위해 몸을 여는데
한 번 두 번
소실점처럼 멀어지는 종소리에
뜨거워지는 마음,
무거운 몸 돌계단에 얹으면서
나에게 너에게 또 세상 모두에게
살아내고 살아지는 일이 고맙고 미안해서
말을 닫고 천천히 걷는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강심이 보이고
고개 숙인 강아지풀도 마음에 들어오는
바람길 조붓한 처서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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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벌레들



내 몸에는 두 마리 벌레가 산다


아침에 나가면
한 마디씩 더 늙은 모습으로 귀가하는 벌레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그들은 내 숨구멍을 모두 막아 놓고 밥을 벌러 나갔다


하루 종일 그들을 기다리는 나는 집 벌레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내 몸을 열며 잘 있었지 웃는다
말없이 지친 그녀를 받아 무릎 위에 누인다


저녁 등이 켜지고
사람 냄새 밥 냄새 어우러지면
비로소 내 안에 도는 안도의 피


죽어 있던 시간의 태엽을 감으며
하루치 이야기를 풀어내는 우리는
카프카를 벗어난 먼 이역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운 벌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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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대
― 베어트리파크에서


향나무 정수리
초록 새 한 마리


주저앉지 않기 위해
어미 몸에 뼈를 박고
꼿꼿하게 서 있다


푸들거리는 날개를
수시로 잘라내며
부동의 깃을 치는
주술의 새여


피가 돌아 슬픈 너는
세상 어미의 아픈 손가락이다


허공에 갇혀 날 수 없는
너는 물컹한 자본의 시린 솟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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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



여기저기
화상 자국을 남기고
여름이 간다


살며시 와
상처 위에 바람을
발라 주는 가을


그 자리
잊은 듯
새살이 돋겠지만
새 살 돋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지겠지만


골목 어귀에서
서성거리는
등 굽은 여름


어디로 가는 걸까
사라지는 것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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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꽃



피는 꽃 슬쩍 밀어 올리며
지는 꽃 쓰윽 밀어 내리는
꽃들의 숨은 거래


밀지 마
밀지 마
시간의 무덤 속으로 떠밀리는
나를 추스르며


아직은 꽃이다
그래도 꽃이다


지난한 연민
통속처럼 피워 보는
지금은 나도 꽃


밀며 밀리며
사시사철 피어 있는
그래서 나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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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그때는 정말 미안했어
노란 애기똥풀 앞에
허리를 낮추고 가만히 속삭인다


선생님은 화장실도 안 간다고
믿었던 때
정말 꽃 속에 똥이 있을까


꺾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꽃이 아파하면 어쩌나 걱정하다가
재빨리 꺾어 냄새를 맡던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여리고 착한 것들만 세상에 사는 줄
순하고 곧아야만 잘 사는 것인 줄
믿었던 때가 내게도 정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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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물



그제는 꽃무릇 잎이 떠났습니다.
뜨거운 내력으로 꽃무덤 쌓으며
오늘은 능소화가 무리 지어 갔습니다.
굽은 소나무 선산 지키듯
소금기 첩첩 밴 여름을 뒤로하고
휘어진 오이와 성치 않은 호박이
말라붙은 어미의 가는 젖줄을
힘겹게 물고 선 팔월 끝자락
늙은 감나무 제 몸으로 그늘을 만든 뒤
손으로 가만가만 부채질을 해줍니다.
뜨겁고도 서늘한 풍경입니다.
문밖 갈바람도 마음 짠한지
선뜻 문고리를 잡지 못하는
끝물들의 눅눅한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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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심



잔기침 콜록거리는 유리창 아래
굳은살 도려내던 어머니의 가뭄 든 발


땅심은 갈아엎어야 기름지다 하시면서
당신 안엔 차곡차곡 걱정만 들이더니
몰래 나갈 길을 찾던 근심이
발끝에서 갈 길을 잃은 모양입니다


아버지 가신 후 무섭다 하시며
자식 많은 서울로 거처 옮기시더니
가도 적적, 와도 적적, 적적이 생이라시더니

이제 아버지 곁에서 편안하시겠지요


해마다 갈아드리지 못한 생의 밭
꽃신 속에 감추어진 굳은살은
자식이 심은 불황 작물이었습니다


캐도 캐도 먼지만 일던 묵정의 시간
건기 자욱한 땅의 반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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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사월



마의 근성을 버리지 못한 채
잊을만한 거리에서 다시 마을을 삼킨
저 악의 불꽃은 누구의 원혼일까


뼈만 남은 집터에서
까맣게 탄 볍씨를 헤집던 농부의 눈빛과
침묵으로 답하던 충직한 화법은
어느 신이 가르쳐 준 겸손일까


사라진다는 것과
살아진다는 것의 아뜩한 틈새에서
별일 없다는 것이 죄처럼 박히는
잔인한 봄밤
순교에 든 나무들과
가축들의 영혼은 또 무엇으로 달래나


검게 그을린 불구의 도시에서
꾸역꾸역 나는 또 밥을 삼키겠지만
수저 들기 미안한 날이 하나 더 보태진
무례한 사월


미쳐 날뛰는 불길을 지켜보며
데인 듯 쓰리던 몸
생각마저도 불이 붙었는지 내 머릿속에선
밤낮 굉음을 내며 소방차가 지나간다


- 2019년 4월 4일 밤, 속초 고성 대형 산불이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