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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시] 봄 외 4편 / 장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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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649회 작성일 19-12-30 14:07

본문

가을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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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세 가까이 된 할머니


지팡이 짚고 나오셨다


봄이다


아기같이 아장아장 걸으신다


할머니 눈부시다


지천으로 피어난 쑥들도 모두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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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개



화사한 꽃마당에
망토를 걸치고 털퍼덕 누운 개가
지나가는 나를 가엾게 쳐다보네
아주 교만한 얼굴로
목덜미도 세우지 않고
짖지도 않고
한없이 남루한 나를
두 번도 아니고 단 한 번만
힐끗 쳐다보네
잠시 후 어디선지
검은 승용차가 그 개를 태우고
강남 애견미용샵에 가는지
개는 은목걸이 한 목만 내밀고
나의 부수수한 머리와
삼선 슬리퍼를 비웃으며
유유히 사라지네
나는 한 모의 두부 같은
고시원 독방으로 황급히 돌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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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 노릇 한다는 게
쉽지 않다
하루종일 얼굴에 철판을 깔거나
똥칠을 해야 한다
등허리가 휘어지도록
굽실거려야 한다
그래야 일용할 양식이 생긴다
농부 할아버지는
방아깨비처럼 분뇨 냄새 나는 땅에다
수없이 절을 하였다
자동차딜러 김 과장은
차 한 대 팔려고
절구공이처럼 수백 번 허리를 찌었다
노인들의 굽은 등은
모두 그런저런 사연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할아버지 할머니를
우습게 보면 안된다
우리도 슬프지만
등허리가 굽어질 것이다
죽어서도 등허리 이야기를 잘해야
천국의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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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가리



시냇물 한가운데
자작나무처럼 꼿꼿이 서 있는 왜가리



말똥말똥한 눈으로
하늘 한번 올려다보고
물속 한번 내려다본다


끊임없이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함께 흐르다
구름 사이로 노을이 얼굴을 내밀면
오늘도 물이 되지 못했다는 듯
날개를 털고
지상으로 다시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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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영화를 보며



나 세상 떠날 땐
영화 한 편 보면서 가고 싶다
손과 발이 자유롭지 못하니
순한 눈만 깜빡거리면서
마지막 영화를 되새기리니
삶을 돌이키면
먼지밖에 남은게 없었으므로
지켜보는 이 없는 침상에서
주인공들이 치고받는 세상이
먼지뿐이라니
나 비겁하여 싸움도 사랑도 못 해봤으니
눈 내리는 설원의 닥터 지바고 같이
사랑과 혁명을 이야기해다오
나 이제 눈감는 행인이 되어
맘껏 주인공들의 사랑을 응원해 주리니
그 장면들 속에 삶의 애환이 있었으니
그것은 폭포에 내리치는
거친 물세례이었다고
영화같이 살고 싶었으나
끝내 영화롭게 살지 못했다고
지루한 인생이 전부이었노라고
그리운 이름들을 나직이 불러보며
말없이 하늘로 돌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