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호2019년 [시] A4용지에 베이다 외 9편 / 김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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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여기까지 올라온 조각탑 내 삶에서
고운 것들 하나씩 가만히 빼내어
달아나는 세월
그때마다 삐그덕 기우는 소리를 마음으로 듣는다
빠지고 무너진 공간으로
가을바람 숭숭 드나든다
어떤 단호함으로도 이길 수 없는 전쟁
아무렇지도 않은 듯 중얼거린다
당연히 겨울은 오는 것이니
당연히 봄이 오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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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용지에 베이다
손가락을 베었다
금세 붉은 선이 열린다
바람보다 빠른 무사
어느새 칼집에 꽂았는지
그저 청순가련 얇고 창백한 얼굴이다
정작 인간의 모난 눈빛과 언어는
이 한 장의 종이보다 가벼운 무기인가
일회용 밴드로 어림없는
깊고 오래 덧나는 상처
아무것도 아니다
누가 더한 무기를 들이댄다 해도
이 쓰린 핏발 열리듯 드러나는
지나간 내 죄의 시간들
양심 어디쯤을 가로지르며
천천히 지나가는 A4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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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판의 맨발들
비명을 배경으로 몰고 온
바람에게 들었다
맨몸으로 강을 건너던
서럽고 추운 이들
하나 둘 셋 넷. . .
빨갛게 언 맨발들 모여와 끌어안고
멈추어 선 한복판
슬픈 무게를 견디다 못해
비명으로 내려앉은 얼음장
고개 허리 번듯하게 편 적 없는
목울대 체한 사람들
발바닥에 그려진 평생의 이력
얼음판에 찍으며 한꺼번에 몰락하다
그 유언 받들고 바람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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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
마지막 신호
저 긴 유언은 누가 읽는 것일까
은하수 너머 그의 생애를 기억하는
지구별 누군가가
마을 산비탈에 꽃을 심는다
꽃들 피어나 반짝이던 우리 별
언젠가
긴 유언의 신호로 사라져 갈 때
저 하늘 어느 별에 사는 누가
그 마을 산비탈에 꽃을 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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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물 가재
별들과 바람의 길은
얼마나 높고 먼 것일까
눈비는 얼마나 멀리 다니다 내려오며
저 달빛은 어디까지 비추는 것일까
반쯤 물에 잠긴 채
밤하늘을 본다
뿌리도 날개도 없는
산골 개울가 까만 조약돌
그래도
애기 민물 가재 한 마리
내 밑동에 모래집 짓고 산다
자주 바뀌는 물살에
중심 잡는 일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애기 가재는 몰라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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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찾기
사랑했던 사람을 땅에 심은 사람들
그 흔적 바람에게 들려 보낸 사람들도
그들이 그리워질 때는 하늘을 본다
착한 사람들은 모두 하늘나라로 떠난 게 분명하다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별들은 길을 따라 반짝거리고
커다란 눈을 만든 천체과학자들은
어쩌면 천국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그리운 사람 몇 저 하늘에 있어
저물면 저문 대로 별밤 늦도록
목울대 늘여 두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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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 서서
바람에게 묻지 마라
강물에게도
그들에게서 들을 것은
네가 원하는 네 안의 대답일 뿐
바람의 길을 따라가지 마라
강물의 길도
그들이 다다른 소멸의 끝은
또 다른 이름의 시작이 되는 곳이다
해는 급하게 떠서 지고
가속으로 달리는 세월
그날의 바람
그때의 강물도 아닌 강가에
저기 아직도
허리 굽은 사람 하나
남은 귀 하나로 서성거리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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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해를 삼키고
얼마나 가슴이 뜨거워야
불덩이 같은 해를 낳을 수 있는가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라야
저 위대한 힘을 밀어 올릴 수 있는가
화진포 지나 백두대간으로 해를 낳아 보내고
동해는 다시 내일의 해산을 위해 뒤척이고 있다
내 나라 허리 아픈 한반도
총칼 녹여 만든 보습으로
묵정밭 갈아 씨 뿌리는 봄날
삼천리 마을마다 아이들 노래 가득한 그 날
넉넉한 노인들의 웃음을 위해
한강 남강 젖줄을 대고
금강산 저리 고운 앞섶을 풀고 서 있다
새날의 아침
저 타오르는 불덩이 해 하나 삼키고
단숨에 내달려 백두대간 청봉에 서면
서슬 푸른 질문엔들 어찌 답이 없으랴
아침이 오지 않는 마을
아침이 오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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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보다 힘이 센
태양을 큰 산맥 너머로 던져 버리자
땅거미와 그림자들도 차례로 죽어 갔다
잠시 항거하던 불빛들마저 눈을 감고
숲도 마을도 입을 다물었다
인간들을 가두고 눕히는 데 걸리는 시간은
잠깐이면 되었다
가장 힘이 센 밤 두 시
막다른 골목길 담장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엄마, 엄마 우는 나이 많은 남자
그를 해독하기 어려워
쩔쩔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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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산의 눈물은 바다로 간다
직선으로 바다에 다다른 강물은 없다
혼자서 바다로 가는 강물도
울지 않고 바다로 간 강물도 없다
밀어내면 먼 길 돌아 흐르고
이 골짝 저 골짝 낯선 물길들 끌어안고
쫓겨나면 끝 모를 절벽
비명으로 뛰어내렸다
모든 산들의 눈물은 그렇게 바다로 갔다
바다와 사람의 눈물이 짠 것은
두 생애의 본성이 닮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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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바람은 별들의 길을 탐하지 않고
새는 바람의 길을 꿈꾸지 않는다
누가 바람의 그림자를 보았는가
날아가는 동안 새는
자신의 그림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지구나 달이 가끔
서로에게 제 그림자를 얹는 것은
따뜻한 안부
정중한 입맞춤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아
누구의 기억에도 없으나
빛 만큼이나 빠른
정중한 침묵
멈추어 뒤돌아 서서
평생 내 뒤를 떠받쳐 온
그림자를 본다
어쩌면
외로울 수도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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