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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시] 언제 한 번 밥 먹자 외 9편 / 김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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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681회 작성일 19-12-30 14:27

본문

'시(詩)가 시(屎)된다 된똥도 아닌 묽은 똥 된다 이 말이렸다'


박제영 시인의 시 「시답잖은 시론」의 한 구절이다.


요즘은 그 똥 같은 시도 쓰기 힘들다.

그러다 문득 그 똥 같은 시도 좋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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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한 번 밥 먹자



어제 저녁


살아생전
헤어질 때마다
언제 한 번 밥 먹자
빈말로 돌려세웠던 그를
국화꽃 둘러싸인 사진 앞에서
절 두 번 하고
그동안 못 먹은 밥값 대신
눈물 밥값 조금 더 넣어 보냈습니다


오늘 저녁


그동안 빈말로 돌려세웠던
몇 사람 불러내
따뜻한 돌솥밥 한 그릇
같이 먹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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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길 땅속
익어가는 김치 항아리가 뱉어 내는
눅눅한



아홉산 대나무 숲
댓잎 위로 흘러가는
푸른 바람의


박제된 석탄박물관
막장의 갈비뼈 사이로 뿜어내던
그 뜨거운


구좌읍 청보리 같은 파도 위
길게 터지는
해녀 할머니의


날마다 터지는
우리 모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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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개구멍



부비부비
살 부비다
사람은 가고
마음 한 줌만 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깊이깊이
스며드는
천년의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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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바위



높새바람
소금기에 삭아


힘들게 버텨온
시간들을
칭칭 동여맨 채


아직도
바람을 일으키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아주 오래된
부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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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오전 8시


종일 콩콩대고 벅벅거리던
위층 사람들을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면
환하게 웃는 일이다


오후 13시


오래전
눈 흘기고 뺨 붉힌 일로
평생 보고 싶지 않던
사돈의 팔촌을
조카 결혼식장에서 마주치면
욕지기를 참으며
자연스럽게 손을 내미는 일이다


오후 18시 30분


아주 오랜 옛날
5년 동안 부었던 내 첫 적금을
몽땅 떼어먹고
삼십 년 만에 후줄근해 나타난
동창생 놈에게
그저 쓴웃음 한 번 건네는 일이다

같잖은 하루에


몇 잔 걸친 취기를 핑계로
청호동 앞바다를 보며
야~ 그게 사람답게 사는 거라고
에라이~ 개똥이다
고작 소리 한 번 지르고
비척거리며 돌아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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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1km



벚꽃 소식이
제주도에서 속초 목우재까지
올라오는 걸음
하루 22킬로미터
단풍이
설악산에서 한라산으로
내려가는 걸음
하루 25킬로미터
자연의 시속은
평균 1킬로미터
나는 무엇이 그리 바빠
볕 좋은 이 가을날
속도계 120이 넘어가도록
밟아대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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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우산



문창반 수업하러 가는
어스름길
흐린 하늘 올려다보며
우산 하나 집어 들었다


빗방울 돋는 길 위에서
작은 산 하나 펼치며
고마움에 자꾸 올려다봤다


돌아오는 길
맑아진 하늘 탓에 그를 잊었다


햇살 환한 아침
식구들 모두 나간
서재에 앉아
책 한 페이지를 넘기며
시나브로
나도 잊어버린 우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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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노을



보내야 할
버려야 할
잊어야 할 것들


너무나 잘 알면서도
차마 그러지 못하는


부끄러운 마음과
익어가는 세월이


저녁 산
바알갛게 걸린
아름다운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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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발과 막국수



눈물을 보이지 말아야 할
젊은 시간을 지나
툭하면 눈물이 솟는
세기 싫은 나이를 지나면서도
오랜 시간
소리 내어 울 수 없었다


발목에 채워진
남자라는 족쇄


가슴 시퍼렇게 울고 싶은 오늘
매운 족발을 먹으면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을
함께 훔쳐내며
막국수 차가운 국물로
시린 가슴을 더욱 시리게 씻어 내린다


문득
발목이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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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금정 파도 소리



바다가 드나들 때마다
거문고 울림통이었던
돌산은 깨지고 부서져
속초항 방파제 밑돌이 되고


뿌리만 남은
영금정 너럭바위


깎인 바위는 괘가 되고
패인 바위는 명주실 현이 되고
파도는 술대가 되어


바다가 풀어내는
저 아스라한
거문고 산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