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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시] 4월의 화신火神 외 9편 / 권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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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489회 작성일 19-12-3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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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4월 4일 밤 건너편 산에 해일 같은 붉은 파도가 출렁거렸다. 화신 火神 들이 선전 포고도 없이 속초, 고성 지역을 점령하였다. 재앙이다. 영랑호 영산홍들이 유서쓸 여가도 없이 불에 몸을 던져 버렸다.


여름을 보내며 공주, 부여를 답사했다. '백제금동대향로' 지상 최고의 정교한 예술에 경이로움을 금치못했다. '정림사지 절터'에서 천 년 전 별들의 휘파람 소리와 바람 소리를 들었다. 지고지순한 백제인들의 혼과 숨결에 전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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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화신火神



4월 밤, 미시령 바람이
봄날 산과 들에 피어나는
화신花神을 시샘하여
선전포고도 없이 숲과 마을에
화신火神을 보냈다


익룡翼龍 같은 불의 신이
몸에 불을 달고 허공을 날아다니다가
산 능선을 건너뛰며
붉은 파도가 되어 출렁이더니
숲을 태우고 마을을 태웠다


검은 수의를 걸친 소나무들이
불을 밟으며 산비탈을 내려오고
서까래 내려앉은 집들이
주검처럼 도로변에 즐비하다
전쟁 아닌 전쟁을 참혹하게 치른, 봄밤
영랑 호숫가 영산홍들이
유서 쓸 여가도 없이 불에 몸을 던지고
벚나무들은 비명을 지르며 실신을 한다


4월을 견뎌 온
바닷가 사람들 몸에 화근 내가 난다
죄명도 모른 채 그들은 울먹이며
캄캄한 밤을 부평초처럼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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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봄날



희곡 작가가 머물던 한옥 흙집에 갔다
처마 높은 빈집 입구에
싸리문 대신 금줄 같은 새끼줄이
흙담 양쪽에 쳐 있다
번쩍이는 작품으로 명성 높던 작가가
왕곡마을*에 들어와 자연과 몸 섞으며 살다가
생을 마감한 집이다


비질이 잘된 마당엔 봄 햇살이
소복소복 모여 수다 떨고
흙담 아래 봄꽃들이 앞 다투어 핀
환한 봄날, 꽃방석 위에 똬리 튼
“화사花蛇!”
붉은 혓바닥을 내민 채 꼿꼿이 고개 들고 있다


꽃으로 문신한 초록 등짝에
햇살이 작살처럼 내리꽂히는 정오
작가의 부음을 듣고 문상가지 못한 내 속내를
비수 같은 세모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꽃뱀


오금이 저리다,


❇ 왕곡마을: 북방식 전통가옥 오십여 채를 간직하고 있는 강원도 고성에 있는 민속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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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갇혔다



스무 살 얼굴이 없다
니캅* 속 눈동자만 별처럼 빛난다
검은 옷에 가려진 그녀의 몸속에
연둣빛 새싹과 꽃구름이
봄처럼 피어나는데
분홍 입술과 볼이 세상과 차단되었다


부르카*속에 갇힌 여자의 몸이
물푸레나무처럼 자라고
스무 살 가슴에 피어나던 장미가
제 홀로 피고 지고
봄 햇살이 그녀에게 정중히 손 내밀다가
돌아선 자리에 꽃향기 만발하다


몸에 검은 천을 두른 여자들이
수 세기 동안 감옥처럼 갇혀 있다
빛이 차단된 녹슨 사원 안에서
그들은 부르지 못한 노래를
소리 없이 목청껏 부르고 있다.


❇니캅(niqab) : 무슬림 여성들이 눈을 제외하고 얼굴을 가린 베일
❇ 부르카(burqua) : 검은 천으로 얼굴과 몸을 가린 아랍계 무슬림 여인들이 입는 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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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초록 잔디 외등 아래
줄무늬 나비 시체가 즐비하다
번쩍이며 손짓하는 야광 불빛에
무작정 달려든 부나방들
몸과 마음 화상입고
진디 위에 흰 종잇장처럼
추락해 있다


일확천금, 감언이설에
희망을 가장한 불빛 속으로 뛰어든 부나비
까맣게 스스로를 태우고 자멸해버렸다는
지인 소식을 접한 우울한 아침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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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



천오백 년 어둠이 빛의 세계로 나왔다
향로를 떠받든 용이 만개한 연꽃을
입에 물고 용틀임 친다


향로 뚜껑 위 다섯 악사들이 연주하면
상상의 동물들이 신산神山 능선마다
꼬리 흔들며 몸 뒤척이고
산 정상 여의주를 문 황금빛 봉황이
횃불 밝히며 날개 펼치니
백제의 함성이 들리고, 사비성이 깨어난다


캄캄한 향로 열두 구멍마다 진동하는 향 내음
역사의 마디마다 부정한 것들은
연기로 빠져나가라, 연기로 빠져나가라


서기를 품은 봉황이 깃털 높이 날리며
선禪의 세계로 비상 하고
천오백 년 능산리 절터를 지키던 금동대향로
백제를 밝히던 장엄한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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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절터에서



절이 있던 자리
바람이 홀로 비질 하고
풀밭에는 별들의 발자국이 수북하다
뒤돌아보니 폐사지 빈 강당 독경 소리
나무 깎던 대패 소리, 정 소리, 목수들이 수런거리며
절 짓던 소리 가득한데
천 년 전 별들의 휘파람 소리 들린다
돌조각 떨어져 나간 오층석탑은
멸망한 도읍을 팔이 아프도록 떠받들고
연지蓮池에 얼비치다 사라지는 흰 구름은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계백의 얼이다
태워도 타지 않는 불국토
말발굽 소리 가득하다.


❇ 정림사定林寺 : 사적 제301호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정했을 무렵의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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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스님



궁남지* 연못가에서 스님이 노래한다
목탁 대신 마이크 잡고
천수경 대신 트로트를 부른다
세월 따라 천 년 연꽃은 피고 지는데


‘맛둥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궁남지를 만든 백제 무왕 서동은
신라 선화공주를 몰래 사랑하여
아내로 맞이했는데
스님은 여름과 가을 건널목에 서서
떠난 사랑 노래만 부르는가


가시연꽃이 쫑긋 귀 세우고 있는 연못가
스님의 회색 소맷자락엔 아직
떠나간 젊음이 손 흔들고 있는데
사부대중이 불전 대신 꼬깃한 지폐 한 장
마이크 앞에 놓고 간다


궁남지 수만 송이 연꽃으로 환생한
선화공주가
빙그레 염화시중 미소로 답하고 있다.


❇궁남지(사적 제135호): 백제 무왕(서동) 35년에 만들었다는 최초 인공연못
❇신라 향가 <서동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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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에서 원효를 만나다



눈보라 치는 토함산을 오른다
저만치 산비탈
고사목 뿌리가 던져져 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물 묻은 해골바가지다
곁에는 흰 지팡이가 걸쳐져 있고
큰 발자국이 나 있다
신 새벽 원효가 다녀갔나


우물처럼 움푹 파인 해골의 눈 속에
인간의 한 생이 그림자로 일렁이고
원효 지팡이가 죽비 되어
산바람 어깨를 내리치고 있다


석굴암 부처님을 친견하려
중생들은 끝없이 산길을 오르는데
원효는 눈보라를 뚫고
구름 속으로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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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대



휴전선 철조망 옆
장대 끝 나무 새 두 마리


허공 감옥에 갇혀 날지도 못하고
충혈된 눈으로
북쪽과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금강산 이산 상봉장
북쪽 딸과 남쪽 아버지가 혈육의 끈에 꽁꽁 묶여
통곡하며 떨어질 줄 모르는데
휴전선 넘나들던 바닷바람만
철조망에 찔려 비틀거리고 있다


장대 끝에 앉아
남과 북으로 날아가지 못하고
속울음만 삼키다가
입술에 피멍이든 두 마리 나무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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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다



달빛 창연한 여름밤
비몽사몽 잠에 취해 있다
베란다에서 누군가 슬쩍슬쩍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검은 망또 차림의 그림자가 흔들리며
쿵쿵 내 가슴을 밟고 지나간다
가위눌린 듯 허깨비일까
아니면 대체 누구일까
저승사자가 슬쩍 다녀간 걸까


새벽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편의 검은 바지와 자킷이
옥잠화 화분 옆 빨랫줄에 널려
출렁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요즘 헛것에 마음 팔려
실체를 보지 못한다
어둠 속 허깨비들까지
내 묵은 죄를 들춰내듯
여름밤 달빛 창연한 창가에서
나를 홀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