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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시] 장칼국수 외 9편 / 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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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1,133회 작성일 19-12-30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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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미루던 운동을 시작했다.

영랑호 길을 거의 매일 걷다 보니

못 보던 것들이 보이고,  안 들리던 것들이 들리기도 하지만

들리던 것이 들리지 않기도 한다.

고요, 내 안에 가득 담아 돌아오면 새로운 언어가 되어 흐른다.


내 안에 고요라니


고요가 노래라니


전에는 알 수  없었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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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칼국수



상처 없이 아린,
겹겹이 싸인 옷 단숨에 들어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 파내는
차가운 말
보내는 말이나 받는 말이나
언 말, 그 뒷모습에
따끈한 장칼국수 한 그릇 퍼주고 싶다


후후 불며 먹다 보면
언 말도 스르르 녹아
따뜻해진 말로 배불러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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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1



눈 감고
규칙적인 심장 곁 지나
췌장 어디쯤 쪼그리고 앉는다
흐르는 핏줄기 따라
태아 시절로 되돌아보는
고요한 존재만으로도 사랑인 그때
이젠 누군가가 아니라
누구든 사랑해야 할 나이다


나이는 든다고 한다
나이와 함께 들 것이 있다면
이런 고요한 사랑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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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2



숨 따라
단전 그 어디쯤 둥지 틀고
지금을 천천히 흘려보낸다
오랫동안 아린 얼굴들 하나씩 날려보내고
씨 되어 뿌리 내린 말들도 후두둑 뜯어 보낸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서운함
마냥 끌어안고 무겁게도 살았구나


숨 따라
둥지마저 필요치 않을 때까지
흘려내야 할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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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3



그림보다는
십자고상 걸면 딱 좋을 자리에
신기하게도 어울리는 십자가 오셨다
기뻐서 감사를


누구는 용서라는 말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차가운 지적에 감사를
미흡한 행위에도 감사를
기대에 못 미치는 사랑마저 감사로


용서, 싫음, 서운함, 이기심 그리고 사랑까지
고요에 오랫동안 발효시켜 얻은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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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4



고요를 사랑하기로 했다


사랑한다는 건
함께하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건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함께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건
끊어내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건
남아 있는 뿌리마저 온전히 도려내는 일이다


고요,
함께한다고 함께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도려낸다고 도려내지는 것도 아닌
잉태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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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5



생각해 보면
엄마는 외로운 여자였다
정을 그리워한 여자였다
평생 퍼내도 마르지 않을 우물을 품고 있으면서도
목말라 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무한히 주면서
유독 내 정만 엄마 것인 양 쓰고 싶어 했다
모르셨나보다
나에게도
내가 쓸 웅덩이 하나쯤 남아 있어야 한다는 걸


평생 본인한테는 넉넉히 쓰지 않으시던
그런 엄마
아직도 호기롭게 정을 꺼낼 때 제일 행복한


고요한 백 살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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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6



잠시 눈 감고
하루 동안 세상에 무슨 소리 보탰는지
마음 세운다


좋은 소리 구하지도 거부하지도
아픈 소리 더더욱 내뱉지 말고
안에서 휘몰아치다가 스스로 분쇄되어
사라지게 두자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냥 두자
그냥 두자


그냥 두자


고요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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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7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있기나 한 걸까
진심으로 사랑한다와
사랑한다는 무엇이 다를까


-수식어가 많다
확인받고 싶은 욕망이 커서이다
신뢰 적은 불안이 커서이다
라고 흐릿한 연필로 꾹꾹 눌러 써 본다


-언어의 과대 포장
자존감 낮을수록 비대해진다
아닐지도 모른다며 지우개로 빡빡 문지른다


고요가 깊어 갈수록
수식어들 떨어져 어둠으로 쌓인다


오늘 그냥
사랑이란 말 하나에
온전한 신뢰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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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8



산불이 언제 났냐는 듯
참새들 꽃식사 한창인 벚나무 밑에
빈 꽃송이들 뎅그랑 떨어진다
타버린 먹이 대신 꿀 즐기는 꽃식사
숯바람결이라도 향기 되어
가벼이 날아가
싱싱한 초록빛 물고 오길
숯숲에 꽃송이처럼 심어 놓길


봄날,
영랑호길에는
참새들 아침 꽃식사가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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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9



그래,
벌들도 있었구나
그래,
딱따구리도 있었구나
검게 탄 가슴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벚나무에
너희들이 떼로 몰려와 노래 부르고 있구나
숯숲 딱따구리 너도
작은 구멍으로 깨워 주고 있구나


그래,
넌 나무야, 나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