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호2019년 [시] 집1 외 9편 / 채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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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픈 중 시를 생각했다.
그동안 시에 크게 의지해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다.
10여 년 전 페트라 계곡에 갔을 때 절벽에 새겨진
집과 신전을 보면서 화살이 가슴으로 날아왔었다.
그때부터 집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집 한 채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겼으며,
집이 곧 사람이고, 세상임을 알게되는 나날이다.
세상은 집과 집이 잇닿아 있어 아름답다.
내 시는 세상 절벽에 어떤 마음으로 새겨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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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1
저 매화나무에 물 줘라
선생께서 임종 전 한 말
일순간 적막
그 말씀 메아리로 가득한 고택
그 안에서 일어났던 하고많은 일들,
거기서 울려 퍼졌던 자잘한 메아리를 기록 중인
전집(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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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2
날 늘 바깥에 세워 두고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나요
나는 수몰되어 가고 있어요
길 끝에 서 있는 떼꾼한 나무
매일 짐 꾸려 떠나고 있는
한뎃바람 맞으며 말라가고 있는 나무
봄이 와도 꽃피울 줄 모르고
길모퉁이 돌아 집으로 가는 길을 잊은
여보,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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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3
허공에게 물어물어 설계를 시작하네
객지 떠돌며 고독이 꾸려온 집
가장 커다란 방을 서재로 하겠다는 꿈 버린 적 없는
너울 도서관이라 이름 짓고 혼자 웃게 되는
집보다 사과나무 모과나무 자두나무를 먼저 심은 뒤
당신을 가장 먼저 들이고 오랜만에 단잠 들은
노을 지는 풍경이 아름다운 집
마음으로 벌써 다 지은
빨강 우편함 곁에 수수꽃다리 서 있는
시 쓰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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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4
진눈깨비 내리는 내 생일날, 어머니께 들었지
그날따라 아랫목은 냉골이었고
마음 바빠진 아버지가 급히 담아온
화로에 냉과리로 눈이 아팠다고
찬 바람 불고 어둑해질 때 시작된
풍찬노숙
길과 길 사이에서
눈보라에 밀리고 거적때기 끌어올리며
시간의 발길질 견디다 못해
매일 유랑하는 생이여
햇살 양식으로 겨우 연명하는
평생 저잣거리에서 떠돌다 집으로 돌아가지만
노숙의 연속이라는 걸 알지 못한 채
오늘도 집으로 돌아가는 허기진 저녁
좁은 골목을 간신히 비추고 있는 겨울 가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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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5
그렇게 순하던 사람이 요양보호사를 후려쳤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끊임없이 중얼거리는데
잘 들어보면 집에 가야 한다는 말
견디다 못해 안정제를 투여했다
더 심해지면 요양원에서도 살 수 없다는데
이 상태로 집에는 더더욱 갈 수 없다
세끼 먹는 약 기운으로 흐릿한 하루가 간다
화장실 출입도 어려워 기저귀 차고
침대에 묶여 있다
자꾸만 헛것이 보이는지
면회 온 아들에게
리어커 태워 길가에 놔두고
어딜 갔다 이제 왔냐고 악다구니를 쳤다
사람을 쬐고* 싶은 것이다
가족 기다리다 움푹 꺼진 눈으로
먼 데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창밖으로 흰나비 한 마리 날아간다
❇유홍준의 시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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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6
아이의 일생(2000-2004)
죄지을 시간도 없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쏘다니던 집
깊어진 병으로 눈에서 쏟아진
피 묻은 이불 집 구석에 남기고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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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7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혼신과
지금을 버무려 펼친 집
시인이 세상 떠난 후에도
안간힘으로 남아
무량의 몸부림 울울창창 우거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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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8
기다란 테이블 사이에 두고 그녀에게
집을 갖고 싶었다는 말을 들었다
말을 해놓고 온몸 덜덜 떨고 있는 여자 손 위에
내 손을 얹는 한밤
밤바다엔 만삭의 달이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피차 만나기 전 객지가 많았던 터라
골 깊은 시간들 켜켜이 쌓이고 등은 헛헛해져
산등성이 바람에도 쉬이 막말을 섞고
서로 제 이야기에 골몰했던 날들
그렁그렁 고인 눈물 훔치며
식은 커피를 들었다 놓고는
다른 욕심은 없어요
둘이 마음 놓고 누울 집 이야기를 시작하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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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9
때까치들 어스름에 놀라
비스듬히 날아 깃들고
분꽃 화안하게 등불 켜 드는
서로 닿지 않는 게 없이
뜨거워지는 시간
부은 발목을 만져 주는 둥근 방
하루를 툭툭 털어 주는
문지방 넘어 흘러나오는 말에
귀 기울이는 봉긋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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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10
나지막이 웃으며
여름 골목을 밝히는
원추리꽃집
비바람 몰아치는 시간을 지나
오고가는 것들과
지나치는 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미처 오지 못한 것들과
가고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며
소리소문없이 찾아오기를
먼 길에서 지쳐 돌아오느라 늦어지나
조그만 인기척에도 단장하며
모퉁이 저쪽에서 손 흔들며 올 것 같은
길들여지지 않는 기다림의 해 질 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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