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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시] 킬리만자로 외 9편 / 장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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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1,269회 작성일 19-12-30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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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월 말 평생 몸담았던 직장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자유로워졌습니다. 알게 모르게 부담이 되었던 책임감으로부터 어깨가 가벼워졌음을 느낍니다.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 생각하며 버킷리스트를 만지작거리는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건강하게 활기차게 살자고 한 새 삶이 순조롭게 이어지길 기대해 봅니다. 선한 영향력을 주변에 나눠주는 삶의 방향을 늘 고민하겠습니다. 열심히 읽고 쓰며 감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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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



풍요의 열대 우림
절제의 관목숲 지나
마침내 다다른 사막
광야에 납작 엎드린 채
별 향해 꽃 받쳐 든 에버래스팅(영원)


거기 그렇게 산이 서 있다
심호흡으로 다가선 봉우리 바람 끝에서
푸른 빙하가 속삭인다
극한을 견뎌내고서야
우훌루(자유)를 만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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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줄



엊저녁
바람 불고 눈보라 쳤다고
외롭고 무서웠다고
떨리는 목소리
그 전화 타고
짠한 마음이 왔다


남쪽에
붉은 동백꽃
노란 산수유
흰 매화도 피었단다
그 소식 타고
님 오신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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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깨달음



입맛이 없어도 밀어 넣기
생각이 다른 말도 밀어 넣기


어떻게든 소화하여 밀어 내기
담대하게 정리하여 밀어 내기


높은 산을 오르려면
천천히
꾸준히
밀어 넣기
밀어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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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카맣게



아프리카 간선도로변에 서 있는
흰 자루 가득 채운 검은 것들
뭘까 계속 궁금해하며 다니다
문득 세렝게티 평원에서 풀 뜯다
흠칫 놀라는 톰슨가젤들에게 묻는다
먹고살 만하냐고


먹이를 물고 있는 하이에나와
그 주변 어슬렁거리는 쟈칼들에게도 묻는다
외롭진 않냐고
옹고롱고로 천국 같은 분지 속에 갇혀 살면서도
태연하게 하품하는 사자에게도
묻는다 행복하냐고


불꽃과 연기 속에 새카맣게 구워져
팔려 가길 기다리는 노점 숯덩이들처럼
우린 새카맣게 잊혀지지 않기 위해
문득문득 계속 묻는다
살만하냐고
외롭진 않냐고
행복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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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희망이란 본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라 한다*
좁은 길이 고속도로가 되면
시원하겠다던 젊은 날 한 줌 생각이
이젠 구름처럼 흩어져
터벅터벅 흙길 맨발로 걸어보기가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도로가 확장되는 주변엔 건물들이 쑥쑥 올라간다
작은 산들이 허물어지고 함바집이 성업인데
새 도로가 비켜 지나간 시골 마을은
고요한 전설로 회귀 중이다
도로 때문에 희망을 잃었다는데
나에겐 잃어버린 고향을 도로 찾은 느낌이다


길에서 길을 물으며 살았던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잠시 길을 잃고 멍해지는
저 자욱한 광야를 생각한다
사방이 사막인 생각의 늪에서
틈새로 빼꼼히 고개 내밀고
신록 넘실대는 산자락 꿈꾸듯.


❇루쉰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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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막국수



배고프던 시절부터 이어온 습관
고개 넘어 숨차고 외로울 때
그 치욕과 분노로 뜨거워진 머리를
메밀껍질 베개에 누이고 식혔다


추억과 열정으로 들끓던 청춘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말아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나니
정겨운 봉의산 시야에 들어왔다


뜨거운 것들이 밀고 올라올 땐
난 어김없이 경춘선을 탄다
소양강물에 손 집어넣으면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
목울대 가득 메밀꽃 향기 채우고
비로소 난 다시 삶의 전장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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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우연에 대한 질문



오늘 난 생전 처음
생각지도 못했던
눈썹 문신을 하고 머리 파마를 했다
아침엔 파리 노틀담 사원이 불붙어
첨탑 넘어가는 장면을 꿈인 양 보았고
바로 5년 전 오늘엔
황열병 주사를 맞고 오는 길에
바다에 가라앉는 세월호 뉴스를 들었다


무수한 사건들이 오늘을 지나갔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벚꽃 화창한 축제 같은 이 날에
속절없이 보고 듣고
느낄 뿐이다


눈 감고 귀 막을 것인가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논쟁할 것인가
이른바 전문가들의 의견에 동조할 것인가
그냥 침묵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구속받지 않을 자유를
즐기며 스스로 위로할 것인가
살아남은 자로서의 고뇌에 감사할 것인가
회개하며 반성할 것인가
술이나 마시자는 친구의 권유에

망설이는 자신을 자책할 것인가?


신은 인간에게 시련을 주지만
악마는 우리를 유혹한다*
하루하루 마주치는 성스런 일상들!


❇서양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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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더부룩할 때마다
바닥에 엎드리시며
등 좀 밟아라 하시던 아버지
어이 시원하다
그래 그래 그렇게 자근자근 밟아라
세상 향해 손이 발이 되도록 빌기도 했었을 당신
살얼음판 같은 세상 어디를 밟고 다니며
한평생 살다 가셨는지요


두엄지고 산길 오르며
바닥을 단단히 디뎌야 미끄러지지 않는다 하시던
당신에게 산비탈 밭 한 뙈기는 하늘이었겠지요
너른 세상 다니며 지금도 나는 묻습니다
어디를 어떻게 다녀야 미끄러지지 않을까요
하늘을 만날까요


발에는 눈이 없지만
가끔 티눈 들어
가는 곳 보려 하지요
가끔 세상일로 속이 더부룩해질 때면
난 등 밟아줄 믿음직한 발을 찾는답니다
자근자근 밟히며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해보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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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지처럼
―우진만ㆍ김지혜 신랑ㆍ신부에게



칠십억 사람들 중
우리를 만나게 한 건
초록별 지구에서
함께 살자 다짐케 한 건
어떤 인연이었을까
어떤 상서로움이 우리 손을 이끌어
운명의 실타래로 묶어 놓았을까


서로를 모른 채
다르게 살아온 세월도
거름 되어 우리의 뿌리를 덥히리
아껴둔 내 순백의 정열도
새로 돋아난 푸른 가지 곁에
촉촉한 빗소리로 걸어두리
남김없이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소중한
영원한 하나가 되리
변함없는 사랑나무 연리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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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교실
― 공짜는 없다는데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라 하면 눕고 싶어 하는 게
사람들 마음이라는데


어느 연세 드신 분이 점잖게 말했다
청년수당을 현금 지급하는 건
독약을 나눠주는 것이라고


미국의 인디언 지도자 한 분이 힘주어 말했다
보호구역에 갇힌 채 현금복지를 수용한 결과
많은 젊은이들 치열한 생존 노력을 포기한 채
술과 마약과 도박에 찌들어 공부하지 않으니
전통은 끊어지고 언어는 잊혀졌다고


시골의 작은 학교일수록
교과서는 물론 연필 지우개 교복까지
무상지급이 보편화 되다 보니
단돈 천 원을 내라고 해도
왜 내느냐 항의가 빗발친다는데
이 학생들 사회인 되어
납세자의 의무를 다할 수 있을까


세상에 변하지 않는 철칙
공짜는 없다는데
공짜로 길들여진 아이들이 걱정되네
제발 쓸데없는 기우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