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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시] 그럴지라도 외 9편 / 이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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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452회 작성일 19-12-30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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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 때까지도 우리 집안에 독립유공자가 계신 줄 몰랐다

얼마나 힘들었고 고통스러웠으면 금기사항처럼 입에 올리지도 않으셨을까.

자유당 시절 정부에서 광복절에 포상을 해 알게 되었다.

할머님께선 사 남매를 키우셨지만 결국 막내이신 내 부친께서 삼대독자 되신 이유

왜경에게 맞아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님.

독립운동하시러 집 나가신 아들들보다 집을 지키시며 모진 세월 꿋꿋이 견디신

할머님이 더 장하고 훌륭하셨음을 늦게나마 기리며 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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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지라도



늘그막에
어처구니없이 당한 억울함
정신을 갉아 먹혀
흠집 투성이 났다


약지 못한 자
손해의 벌 받아야 하고
정의롭지도 공평하지도 않은
법은 믿을 게 못 되고


속이고 감추는 지능 뛰어난 자
좀벌레 기생충 같은 놈이
잘 사는 하늘에
달은 왜 저리도 맑은지


또 한 켜의 삶을 기록한다


험한 세상 그럴지라도
살아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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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아지지 않는



바람 찬
텅 빈 밤에
주저앉아
달빛을 맞는다


치렁치렁한
저 은사슬에
묶여


그렁그렁
이토록 아픈
그리움이었던가


묵혀도 묵혀도 삭아지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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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 빛으로 온 가을



시월의 초하루가
젖어서 왔다


이튿날은 비를 숨기고
회색 얼굴을 하고
초사흘 달도 숨겨서
깜깜한 밤이었다


가을이 돌아와
닷새가 되어도
하늘은 마냥 울고 있다


근심 걱정에 흔들리는 건
논밭 뿐이 아니다
일만 근심의 슬픔이
사람과 짐승에게 곤충에게도
무거운 바윗덩이 되어
습지에 갇혀 있다


세상 돌아가는 게 꼴사나워
가을은 먹물 들인
수의(壽衣)를 걸치고 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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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을날에



청동거울 같은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아침을
만났을 때
말을 닫았고


맑고 맑기만 해서
시려운 눈은
침묵했다


숲이나 들꽃들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아직 곱다면서도
하나씩 벗어 내놓았다


“공짜로 가져가세요
자선 바자회입니다”


가을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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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냉이꽃



진흙 바닥이라도 좋아요
그댈 기다릴 수만 있다면


텅 빈 논바닥에서
모진 추위도 견딘 걸요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 되면


당신의 눈부신 날개 빛깔로
흰 꽃을 피워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겠어요


사무치는 그리움이여
한 오백 년이라도
외발로 서서
그대를 기다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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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
― 백만 가지 사연



임오년 생 밀양 박씨
우리 할머님


속이 다 썩어
텅 빈 고목의 웅얼거림 늘 하셨다


마른풀 바스러지는
아픈 비명이었다


한밤중
꼬부랑허리 웅크리고 앉아


장죽에 실담배 쟁여 피워 물고
내쉬는 한숨
백만 가지 사연


식민의 원통함을 삭히시느라 내는
침묵의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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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 없는 영웅
― 백만 가지 사연 2



충남대덕군기성면 가수원리 63번지


내 아버지 태어나신 곳
백부님 식민의 회오리 속
파란만장한 삶 마감 하신 곳
호랑이 할머님 평생을 사신 곳이다


슬퍼도 슬프지 않게
억척을 부리며 사셨다


은비녀 은가락지 빼주고도
아들의 이름 석 자
입에 올리지도 못하셨을 모정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을
억울하고 모진 세월 견뎌야 했던
헌신의 힘은
광복의 날을 간절히 바람이었으리
반드시 되찾을 내 나라에
삶을 바치신 우리 할머님은
훈장 없는 영웅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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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웅얼거림
― 백만 가지 사연 3



울아버지 세 살 적에
청상과부 되시어
사남매 혼자 기르신
여장부 우리 할머님


머리엔 무명수건 두르시고
꼬부랑허리 광목치마 차림으로
논밭일 늘 하셨다


목화밭 매시다가
밭두렁에 나앉으시면
언제나 눈은 멀리 내려다보이는
신작로(新作路)를 향하셨지


보고 싶어서도
기다려서도 안 될
장남을 그리며 살아오신
젊은 날의 그 모습 그대로
장죽을 입에 물으셨다


목화 꽃 빛깔의
담배 연기 내뿜으시며
산비둘기처럼 구슬픈 소리로
백만 가지 사연을 토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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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자금 모집 책 李康夏
― 백만 가지 사연 4



나라를 빼앗긴 백성 누군들
어떤 즐거움 무슨 기쁨 있었으랴


어느 여름 그믐달이 설핏할 무렵
삽작문 기척 없이 들어온 장남
반갑기 앞서
가슴이 철렁하셨던 어머니


사흘들이로 찾아와
아들 소식 캐는 일본 순사는
저승사자였다


양정고보 학업 중단하고
청년외교단 조직
임시정부 군자금 지원 모집책
격문 배포 등 독립운동의 열망은
죽어도 죽어서는 안 될 각오였지


상해로 건너가
임시사료회에 합류
안창호 선생 밑에서 한일관계사료
전 4권을 편찬 발간한 업적
계룡대 국립묘지 순국선열의 묘
146호에 새겨져 있다


군자금 좀 내라는 아들
먹을 양식도 없는데
무엇이 집에 남아 있겠냐는
슬픈 어머니


아들은 쇠스랑을 들고 와
구들장을 치며
“나라가 없으면 어머니도 아들도 없는 겁니다
나라는 꼭 다시 찾을 겁니다.”


그래 나는 죽어도 좋으니
너는 살아서 해방을 꼭 보거라
닷 마지기 논문서 내주셨다


일본 순사 조심하라며 배웅한 아들
몇 달 후 대구 감옥소에 있다는 기별은
쓰리고 아픈 속병을 만들어
매일 소다 한 숟갈씩 드셨다는
우리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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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부랑 할머니
― 백만 가지 사연 5



나라 빼앗긴 이 땅에
통곡하도록 억울하지 않은 백성 있었으랴


아들 다녀간 소식
일본 순사 귀에 들어갔는지
곤봉 찬 순사 두 놈이 와서
아들 어디 있느냐
무엇 하러 왔었느냐
욱박지른들
여장부 울 할머니
꿈쩍도 않으셨다


독이 오른 놈들은
삽작 앞 오동나무에
앞으로 묶어 놓고 등을 내리쳤다


반나절 만에 풀려난 몸
가누지 못하시고
보름을 넘게 앓아 누었어도
아픈 허리는 고부라져 펴시지 못하셨다


조국의 독립이
어머니 보다 가족 보다
우선인 아들 지키시려다
꼬부랑 할머니 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