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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2019년 [시] 서점 여행자의 노트 외 9편 / 김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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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02회 작성일 19-12-30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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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갈뫼 문학기행을 공주 부여권으로 다녀왔다. 연 두 해를 제주도로 했는데 한 분이라도 더 참석하면 좋겠다는 회원님들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백제 문화의 숨결을 느끼며 동인들의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기회였다. 이 문학기행에 몸이 불편한 이충희, 이은자 두 분 누님이 함께 해주어서 내 개인적으로는 매우 뜻깊은 여정이었다. 사십 여 년 전 비슷한  시기에 함께 입회한 두분 누님들 모시고 오래도록 이런 시간 같이 할 수 있기를 빌어 본다. <갈뫼>의 울타리 안에서 참으로 많은 꽃을 피우고 지우던 날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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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여행자의 노트



대숲에서는
진열장들이 키를 키운다.
신간 발매 팻말 앞에
돌돌 감겨 있던 죽순의 페이지가
작자 미상의 시리즈를 펼쳐내고 있다.


앞에 내놓은 백과사전 한 권
바람이 뒤적거리다가
오늘도 몇 쪽의 부록으로 풀꽃을 올렸다.


대리석으로 만든 저자 표지판 뒤
너의 할아버지가 남기신 여행기와
너의 할머니가 쓴 자서전이 오늘의 추천 도서
눈을 감아야 한 줄 읽힌다.


댓잎 날개를 단 딸 아이는
나비의 눈빛 렌즈로 녹화 중이다.
들판에서는 쉬어라.
접은 날개 위에는 이슬도 앉으리.


초판본 단 한 권만을 진열한 서점
커피는 무한 주어지는 곳
누군가 가슴 울컥 책장을 넘기고 있을
그쯤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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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부리



아내여, 돌부리에 채였다고
탓하지 말라.


몸체는 산짐승이었고
무늬석 비단이었을 때
두 손 모으고 빌고 가던 사람들.


용맹스런 눈썹 하나둘 빠져나가고
무늬는 절리로 갈라지더니

몸뚱이는 주먹만 하게 됐다네.


둘러보면 사방이 돌부리들
공룡도 비켜 다녔다고
몽돌 하나도 소리치고 있는데


집안 구석에 숨죽이고 사는
힘 빠진 돌부리 하나에
행여 채였다고
하루의 재수를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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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강



저만치 앉아 있는 산
구부렸다가 펴길 수없이 하더니
지금은 내 앞이다.


오름길 따라 오르니
연한 산 근육의 센스는
서두르면 쥐가 난다고
잠시 쉴 곳을 만들어 놓았다.


급하게 쏟아낸 말들은
웬만해서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굳어진 돌무더기는
알 듯 말 듯한 얼굴로 강이 되었다.


날 선 돌 모서리들 비벼대며
비스듬히 누워 있는 강
이끼 뒤덮은 돌강을
이제야 밟고 간다.


깊이도 모르고
끝나는데 더욱 알 수 없어
그저 눈길로만 넘나들던 강


생강나무 몇 그루가 손 내미는
산허리 휘감은 강을
종종걸음치며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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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북에 둔 자식 보고 싶다.
평생 고향 그리다 가신
장모님 산소에 제비꽃 한 줌이다.


혼자 감당하시던 이산의 죄
조금씩 푸른빛으로 벗어 내려고
양지달음 중이다.


눈가에 담고 있던 물기
맑은 이슬로 올리더니
겹겹이 품었던 한스런 마음은
여러 갈피의 색깔로 나누어 놓았다.


눈길이 자꾸 가는 건
늘 젖어 사셨던 분
가벼운 몸짓 보았기 때문이다.


마른 햇볕 한 줌 숨소리가
손끝을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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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음산



산 아래 다섯 동네
닭이 회치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소 울음소리를
웃는 얼굴로 들어주기


산을 오르는 사람의 가쁜 숨소리
내려가는 사람의 손바람 소리
이런저런 푸념도 담아 주기


사실은
산속의 새소리
바람 소리 천둥소리 물 흐르는 소리
산 울음소리
찬찬히 내려보내기


그 산 앞에 서서
뜨겁게 달아 있는 돌기둥들
무더기로 쌓아 놓고 사는 속내에
내 돌기둥 하나 얹혀 놓고 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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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없다



아버지는 평생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마디 말씀 없었다.
나도 너에게 할 말이 없다.


아들 넷 낳아 하나 남은 나에게
어머니도 어떻게 살라 하지 않았다.
나도 너에게 어떻게 살라 하지 못한다.


생각해보니 고비마다
아버지가 힘이었는데
내가 그런 힘 될까 생각하니
또 할 말 없다.


말은 할수록 벽이 되고
벽은 서로를 가로막고 서 있는 거
그저 낮은 벽 위에 핀
자그마한 꽃향기 한 줌 보내주는 거
그거면 된다.


그래서 또
나는 너에게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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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세 동안



우물집 어머니
백 세 생신날
술 한 잔 따르고
손잡아 드렸다.


사촌이 왔구나
이웃집에서 왔다는 말씀이다.


자네 엄마가 어른이지
하늘가서 기다리는 두 살 아래 친구도
챙겨 주신다.


꽃 저고리 곱게 입고
환하게 웃는 백 세 동안
어찌 저리도 정신 맑고 정정하실까.


백 세 생신 축하드립니다.


일어서는 나에게
정색하며 툭 던지는 말씀
내가 백 살이라고?


잊고 사시는구나.
시시한 나이쯤
까맣게 버리고 사시는구나.

나이 지워지니
그저 세 살배기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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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와 해국



오팔 년 개띠생입니다.
굳이 따지자는 건 아니고
이곳까지 올라오는 사람 중
이제는 어깨 툭 칠만한 또래가
귀합니다.


한때는 백 리 바닷길 비춰대며
뱃사람들 노질 도왔지만
항해도 자동 시스템인 지금
한물간 신셉니다.


바닷길로 넘나드는 사람들 통해
이런저런 동네 소식
솔숲 사이로 들으며
요즘은 해국 키우는 재미로 삽니다.


바다만 멀리 내다보다가
발아래 봅니다.
바위틈 사이사이
잔잔하게 불빛 뿌리니
고운 빛깔 해국이 피었습니다.


아직도 허리 꼿꼿한 신사
캄캄한 마음에 불빛 가득
오호항 무인 등대 앞에는
보랏빛 이야기가 한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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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현진 김 씨네



남쪽 어느 산골 마을이라는데
열여섯에 가출해서
평생을 공현진에서 사시다가
양지바른 곳으로 가신 아버지.


남긴 씨앗으로
딸 셋 아들 하나
사는 곳도 각각인데
공현진 김 씨네로 빠르게 통한다.


흰 머리의 첫째가
잘 피운 백합꽃 한 포기 돌리니
막내는 먹던 밥상도 올리고
나는 마당의 황매실을 보탠다.


두레반에 둘러앉아
한참을 재잘대다가
하나둘 나가버린 단톡방.


깃털도 없이 참 멀리들도 날아갔다.
공현진 김 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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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을 때 가시라



아침에 집사람이
큰 언니가 고향에서 살고 싶어 하신다고 했다.
늘 듣던 말이었지만
기분이 달랐다.


그쪽 살림 대충 정리되면
언젠가는 올 거라더니
그 살림은 정리될 수 없었다.


몸에 병이 들어앉아
이제는 떠날 수 없다.
병원에서도 허락지 않는다.


가고 싶은 곳 가지 못하는 아쉬움보다
떠날 수 있을 때 떠나지 못한 후회에
칠순의 언니는 목소리를 떤다.


북쪽 고향 평생 그립다 사시던
일 세대 부모님도 그렇게 떠나셨는데
착하게만 살던 실향민 이 세대
그 첫째 따님의 고향도 그토록 멀었구나.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단단히 묶여 있는 사람아
한 번은 가고 싶을 때 가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