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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동화] 풀잎배가 가는 나라 / 이희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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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378회 작성일 20-12-1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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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시냇물에서 물장구치고 놀던 어린 시절이 있다.

시냇가에서 노는 모양은 모두 제 각각이었을 것이다.

누군 물고기 잡고 누군 멱을 감고 누군 물 동그라미를 그리고

누군 풀잎배를 띄웠을 것이다.

풀잎배를 기다리는 동안 다리도 난도 함께

둥둥 떠 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마루를 구르며 노는 어린 것 세상을 모르고 노나

어려운 시절이 닥쳐오리니 잘 쉬어라 켄터키 옛집.....'

포스터의 <켄터키 옛집> 가사처럼

철없이 물놀이 하던 아이들은

망망한 바다에 거친 파도를 만나는 인생을 살게 된다.

살아봐야지 아는 인생 여정.

풀잎배와 내 마음이 함게 떠나가던 여정을 추억하며

아직도 내 마음에서 소리 내는 시냇물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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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배가 가는 나라




1
흘러가는 개울물에 풀잎배를 띄우려고 신혜는 쪼그려 앉았습니다. 폭 좁은 개울에 걸쳐 있는 작은 섶다리(개울 위를 가로지르는 나무와 풀로 된 다리)에서 몸을 낮춥니다. 다리는 낮아서 몸을 숙이면 개울 속으로 손목이 들어갑니다. 신혜는 간지럼주며 흐르는 물길의 느낌을 잠깐 느껴봅니다.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눈망울 굴리며 송사리 떼가 지나가고 잠수부처럼 개구리가 물속을 가로지릅니다.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여기서 삐죽 저기서 삐죽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가끔 물방개가 뜬금없이 물 위로 떠오르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물풀 속으로 쏙 숨어버리곤 합니다.
개울물 속이지만 이곳에도 많은 생명들이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개울물은 맑고 ‘졸졸졸’ 싱싱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습니다.
신혜는 꼼짝도 않고 개울물만 내려다봅니다. 푸른 하늘이 개울물 폭 만큼 담겨 있고 하얀 구름도 개울물 폭 만큼이나 잘려서 흐르고 있습니다. 개울물 속의 생명들, 그리고 하늘, 구름. 이 모든 것이 개울물과 함께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제자리에 그냥 있는 것이라곤 바닥의 조각돌뿐입니다.
신혜는 개울물을 뚫어져라 보면서 서서히 자기 몸도 움직임을 느낍니다. 개울물의 방향과는 반대로 자꾸만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혜는 갑자기 슬퍼졌습니다. 개울물 속의 아름다운 것도, 나도, 모두 아주 가버릴 것만 같아서입니다. 맘을 주고 정 붙이고 싶은 모든 것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를 신혜는 바랍니다. 간다는 것은 바로 이별. 헤어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헤어짐을 막을 수 없다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일이라면 어떡할까.
신혜는 그래서 개울물 속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두 눈을 부릅뜹니다.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신혜는 섶다리와 함께 더 빠르게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혜는 현기증을 느낍니다. 눈을 감습니다. 순간 개울물, 하늘, 구름 모두가 사라지고 마구 올라가던 자기의 몸도 딱 정지해 버립니다. 모든 것이 정지되자 깜깜한 생각 저 뒤편으로 스멀스멀 지난 일이 떠오릅니다.


“신혜야, 느 아빠 배가 우째 안 나타나노?”
옆집 순아 할머니의 모습이 보입니다.
“참말로 요상스럽데이, 딴 배는 다 돌아왔는디 와 하필 느그 아빠 배만 안 돌아오냐 그 말이여.”
어구창고(고기잡이에 쓰는 도구를 모아둔 창고) 앞에서 쪼그리고 앉은 신혜를 보고 순아 할머니는 또 물어댔습니다. 순아 할머니는 기억이 없으신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신혜에게 똑같은 말을 물어봅니다. 순아 엄마가 뛰어왔습니다.
“어유, 어머니요. 좀 집에 가마이 계시소마. 우짜 불쌍한 신혜를 자꾸 울긴단 말이야요. 참말로 속상허네요.”
순아 엄마는 할머니의 등을 떠밀고 갑니다. 신혜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아 어구창고 문고리를 잡고 흐느낍니다.
‘아빠, 정말 아빠 배는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제가 보고 싶지도 않으세요?’
아빠와 단둘이만 살던 신혜는 외로움의 고통만 커져 갑니다.



2
신혜가 눈을 떴습니다. 세상은 다시 밝고 개울물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신혜는 이제 풀잎배를 띄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혜가 풀잎배를 띄우기 위해선 먼저 미루나무작은수풀까지 뛰어 가야 합니다. 물길을 따라 뛰면 20분도 넘지만 지름길로는 5분도 채 안 됩니다.
개울물은 <사랑의 집> 뒤편 언덕을 휘감아 흐르다가 미루나무작은수풀에서 잠시 모습을 감춥니다. 미루나무작은수풀에서 빠져나온 개울물은 들판을 구불구불 흐릅니다. 개울물이 섶다리에 오기까지는 여러 곳을 통과해야 합니다. 개울 옆으로 풀이 우거진 풀숲을 지나고 물살이 센 여울목을 지납니다. 여울목 턱에서 개울물은 한동안 맴돌다가 넓은 물웅덩이를 거칩니다. 다시 폭이 좁아 물살이 세지는 물길을 타다가 논밭에 물을 대고 빼는 통나무 다리 속으로 들어가 한바탕 뒤집어지다 흐릅니다. 통나무 속을 빠져나온 여울물은 곧장 흐르다가 커다란 갯버들 나무가 있는 곳까지 옵니다. 길고 가느다란 갯버들 줄기가 개울 아래로 뻗어 물길과 함께 흔들립니다. 물길은 거기에서 갑자기 직각으로 꺾어집니다. 그리곤 마치 고속도로나 탄 것처럼 섶다리를 향해 죽 흘러내려 갑니다. 섶다리를 지난 개울물은 다시 구불구불 개울 길을 타고 내려가다가 마을이 끝나는 동구 밖으로 자취를 감춥니다.
미루나무작은수풀로 단숨에 달린 신혜는 비닐봉지에서 풀잎을 꺼냈습니다. 풀잎 10개. 이름을 아는 풀잎보다 모르는 풀잎들이 더 많습니다. 길쭉한 잎, 동그란 잎, 갈래가 여러 개 난 잎, 삐죽삐죽한 잎, 아기 손바닥 같은 잎. 큰 잎, 작은 잎, 좁은 잎, 넓은 잎들.
“자, 이제 내가 너희들 물 위에 놓을 거야. 내가 저 아래 다리에서 기다릴게. 무사히 와. 열심히 달려도 좋아. 하지만 정말 꼭 정말인데 아무 일도 없어야 해. 무사히만 와줘. 알았지!”
신혜는 손바닥에 있던 잎들을 개울물에 털고 지름길을 달립니다. 풀잎배보다 늦게 섶다리에 도착하면 안 됩니다. 마치 100미터 육상선수나 된 것처럼 전력 달리기를 합니다. 지름길이라고 해도 풀잎배를 띄우고 나니 새삼 먼 느낌이 듭니다. 다리까지 도착한 신혜는 한참이나 가쁜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합니다.
오늘도 열 개의 풀잎을 신혜는 기다립니다. 가쁜 숨이 조금 진정되자 아직 풀잎배가 도착하기엔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신혜는 그 시간을 기다림으로 사용합니다. 신혜의 눈은 다시 개울물을 바라봅니다. 자기 몸이 또다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머리가 약간 어지럽습니다. 눈을 감습니다. 기억의 조각들이 아물거리다가 점점 뚜렷하게 모양을 갖추고 신혜 앞에 나타납니다.


“신혜를 저렇게 놔둬선 안 되겠어요.”
“그러게요. 빈 집에 계속 저렇게 혼자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아직 어린앤데……”
동네 아주머니들의 말소리가 신혜의 두 귀를 마구 뚫고 들어왔습니다. 신혜는 뒤집어쓴 이불 속에서 마구 부르짖습니다.
‘아빠, 안 돌아오시면 어떡해요. 아빠가 안 계시면 전 이 세상에 혼자뿐인 걸 아시잖아요.’
“아이고, 이장님 오셨군요.”
끊임없이 파고들던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순간 상냥한 소리로 낮아졌습니다.
“어유, 아주머니들 모두 나와 계셨군요. 안녕들 하셨습니까?”
“이장님.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요?”
“아주머니들 염려 마세요. 일이 아주 잘 됐습니다. 아주머니들의 진정서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아주 좋은 곳이 나타났습니다.”
“참말로 잘 되었군요. 고맙습니다. 이장님.”
신혜가 더욱 꼭 틀어막은 두 귀에 이장님의 말소리가 폭포 소리처럼 세게 들어왔습니다. 신혜는 있는 힘을 다해 두 귀를 틀어막고 몸부림쳤습니다.
“신혜 방에 있니?”
이장님이 방문을 열었습니다. 신혜는 뒤집어쓴 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신혜야. 웬 낮잠이냐? 일어나거라. 이장님 오셨다.”
같이 들어온 순아 엄마가 이불을 제치며 억지로 신혜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신혜는 일어났지만 이불자락 한 귀퉁이에 얼굴을 가린 채 놓지 않았습니다.
“신혜 너 다 들었구나.”
이장님이 말에도 신혜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혜야, 이장님께 인사드리지 않고 뭘 하고 있니. 이장님이 얼마나 수고한지 아니?”
순아 엄마가 이불자락을 꼭 쥔 신혜의 손가락을 풀면서 말했습니다. 신혜는 그제야 머리를 숙인 채 겨우 말을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 장……”
신혜는 더 말을 잇질 못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굵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기 때문입니다. 이장님은 신혜의 손을 가만히 잡았습니다. 이장님의 손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순이 엄마가 왔습니다.
“신혜야, 어딜 가든 니 맘먹기에 달렸어야. 슬퍼 지낸다고 뭐가 달라지는 게 있것냐. 새 맘 먹고 열심히 니 인생 살아야 되지 않컸냐.”
순아 엄마는 신혜의 머리를 곱게 따주었습니다. 신혜는 눈을 감은 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혜의 머릿속에는 지금 수많은 장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아빠와 살면서 행복했던 그 날들.
“신혜야, 아빠 갔다 올 테니 밥 잘 챙겨 먹어라.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젤이야. 아빠는 이 세상에서 너밖에 없어.”
그날, 아빠는 바다를 향해 배 타고 떠났고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빠. 지금 어디 계세요. 아빠가 영영 안 오시면 전 다시 이 집에 오지 못해요. 이 집은 아빠와 저만의 행복의 보금자리예요. 여길 떠난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신혜의 얼굴에는 주룩주룩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두 손에 받쳐 든 새 운동화와 노란 머리핀 위로 눈물이 똑똑 떨어졌습니다.
이장님과 신혜가 마당에 내려섰습니다. 순아 엄마랑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두 눈을 붉혔습니다.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미 말이 필요 없다는 걸 다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아주머니들은 가끔 감정을 참으려고 손을 안에서 밖으로 내 저은 채 머리만 끄덕이며 빨리 가라는 몸짓을 보냈습니다. 신혜는 아주머니들의 맘을 다 알지만 목이 콱 막혀 인사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이장님의 손에 이끌리어 뒷걸음 걸으며 손을 가슴 높이에서 살래살래 흔드는 것만이 신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을 어귀를 나오며 신혜는 아빠와 살던 집을 자꾸만 돌아보았습니다. 이젠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우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러면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신혜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3
두어 시간 직행버스를 타고 갈아탄 마을버스가 어느 삼거리 시골길에 신혜를 내려놓았습니다. 신혜가 살던 바닷가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온 것 같았습니다.
햇빛이 유난히 쨍쨍 내리쬐었습니다. 넓은 논벌 위에 바람이 불 때면 바다와 같이 녹색의 물결이 출렁거렸습니다. 멀리 작은 산들이 벌판을 감싸고 있었고 오른쪽에 조그만 마을이 밤나무 숲 그늘 밑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습니다. 왼쪽 눈길이 머무는 끝에 동산이 있었습니다. 동산은 자그만했지만 늘씬한 나무들이 빙 둘러서서 울타리 숲을 이루고 그 속에 하얀 집이 언뜻 보였습니다. 신혜는 삼거리에서 하얀 집으로 향하는 황톳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햇볕이 가득 쏟아지는 황톳길은 금빛같이 빛났습니다.
신혜와 이장님은 말없이 그 길을 걸었습니다. 신혜의 이마에 송송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이장님은 가끔씩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습니다. 황톳길이 끝날 때였습니다. 신혜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습니다.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였습니다.
“야. 시냇물이다!”
신혜는 뛰어갔습니다. 작은 다리가 개울물 위에 걸쳐 있었습니다. 세게 뛰면 다 넘을 수 있는 조그만 섶다리를 신혜는 처음 보았습니다.
“물이 너무 맑아요!”
신혜는 다리에 쪼그리고 앉아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싶었습니다. 신혜는 몸을 숙여 개울물을 잡았습니다.
“물이 너무 시원해요. 이장님. 세수하고 가셔요.”
신혜는 기분이 조금은 좋아져서 말했습니다. 이장님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도무지 말을 안 할 작정인 줄 알았던 신혜가 뜻밖에 또렷한 목소리로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장님은 엉겁결에
“어,어 그래. 그러자꾸나.”
하고 말을 더듬으면서 황급히 섶다리에 앉아 개울물을 한 움큼 담아 올려 얼굴에 뿌렸습니다. 신혜도 세수를 하려고 두 손을 내밀고 얼굴을 개울물에 더 가까이 들여댔습니다.
“졸졸졸……”
그때 신혜는 개울물 속에 작은 속삭임들이 들어 있는 걸 알았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결코 들을 수 없는 비밀스런 목소리라고 할까. 바로 그런 소리로 느껴졌습니다.
신혜는 개울물의 소리가 무슨 뜻일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분명히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에게만 하고 싶은 말이 개울물에게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 이렇게 명랑하고 정감 어린 소리를 낼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처음 만나는 개울물의 이야기를 신혜로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개울물 속에 들어가야만 개울물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진실한 이야기는 상대방을 잘 이해할 때 들린단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신혜야, 그만 가자.”
이장님이 부를 때까지 신혜는 개울물 위에 코가 닿도록 엎드려 있었습니다. 아쉬운 듯 일어서는 신혜는 갑자기 뭔가 잃어버린 게 있다는 착각을 했습니다. 당장은 생각나지 않지만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가다 뒤돌아보니 개울물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속삭임 대신 반짝반짝 햇빛을 되받아 보내고 있었습니다.
‘개울물아. 다시 보게 될 거야. 꼭.’


신혜는 감았던 눈을 떴습니다. 기억 속의 지난 일들이 재빨리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 풀잎배들이 도착할 시간입니다.
“아, 풀잎배가 온다. 온다.”
신혜는 소리쳤습니다. 오늘은 풀잎배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개울물결을 따라 촐랑촐랑 거리며 떠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신혜는 반가워 얼굴에 웃음을 활짝 피웠습니다.
“어서 와, 어서!”
신혜는 반가운 사람이나 만난 것처럼 말했습니다. 마치 아빠 배가 항구에 들어오는 것을 볼 때처럼 기쁜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에 제일 기쁜 것은 바다에서 돌아오는 아빠를 만나러 뛰어나가던 그 일이었습니다.
오늘 제일 먼저 들어온 풀잎배는 달개비 잎이었고 그 다음이 강아지풀 잎이었습니다. 풀잎을 띄울 때마다 풀잎배가 도착하는 차례가 다르긴 하지만 매끄럽게 생긴 잎, 원형이거나 둥근 잎, 몸통이 작은 잎들이 먼저 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용케도 센 물살만을 타고 오는 풀잎들이 가장 먼저 도착하곤 했습니다. 개울물이 소용돌이치는 곳이나 맴도는 곳. 또 구부러진 냇가에서 장애물 따위에 걸리면 풀잎배는 더디 오거나 아예 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웃기는 건 어떤 풀잎배는 아무 장애물도 없는데 느릿느릿 떠내려오기도 합니다. 개울물 가장자리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온 풀잎배가 바로 그렇습니다.
신혜는 어느 풀잎배가 먼저 도착하는 가에도 흥미가 있었지만 열개 씩 띄우는 풀잎이 모두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열 개의 풀잎배가 다 도착한 때는 거의 없었습니다. 언제나 한두 개의 풀잎배는 오지 않았습니다. 신혜는 그것이 무척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다리 위에서 기다립니다. 하지만 풀잎배는 신혜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 맘대로입니다. 신혜는 그래도 끝까지 풀잎배를 기다립니다. 아주 한참 만에 오는 풀잎배를 만나면 고생했다고 말도 해 줍니다. 그러나 끝까지 영영 오지 않는 풀잎배는 늘 있습니다.
신혜는 그것이 항상 의문입니다.
‘풀잎배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신혜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많은 배들 중에 돌아오지 않는 딱 한 척의 아빠 배가 떠오릅니다.
오늘도 여덟 개의 풀잎배들은 별로 시간 걸리지 않고 도착했는데 두 개의 풀잎배는 오지 않았습니다. 신혜는 오늘도 두 풀잎배가 올 때까지 기다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습니다. 아빠 배가 항구로 돌아오는 것을 수많은 날 속에 기다린 신혜였기 때문에 까지껏 한두 시간 기다리는 건 자신 있습니다. 신혜는 잠깐 허리를 피고 하늘을 봅니다. 뭉게구름이 거품처럼 하얗게 피어오르고 해님이 잠깐씩 뭉게구름 뒤 그늘에서 몸을 식히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갔습니다. 아직 다리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개울물만 내려다보는 신혜의 뒤로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갔습니다.
신혜는 이미 깊은 생각에 잠기고 있었습니다. 머릿속에 기억의 바다가 넘실대기 시작했습니다. 풀잎배를 기다리는 때마다 밀려오는 거센 물결, 기억은 밀물이 되어 신혜를 향해 다가옵니다.



4
언덕 위의 하얀 집.
이장님이 신혜를 데리고 간 집입니다. 통나무로 엮은 정문 앞에는 <사랑의 집>이라 쓰여 있는 간판이 한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에 십자가 탑이 있는 교회당과 아담한 이층집 세 채, 그리고 교실 같은 건물 몇 개가 있었습니다. 건물 앞으로는 포근하게 보이는 잔디밭 마당이 펼쳐져 있고 군데군데 황금빛 금송화가 무리를 지어 피어있었습니다. 담 밖으로는 미끈한 키를 뽐내는 자작나무가 집을 에워쌌습니다. 담 안에는 키 작은 전나무들이 촘촘히 자리 잡고 있어 마치 숲속에 들어온 느낌입니다.
신혜가 <사랑의 집>에 들어서자 놀이터에서 놀던 꼬마 셋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신혜가 눈을 맞추니까 꼬마들은 화들짝 놀라 황급히 집 뒤로 모습을 감춥니다. 신혜가 원장실로 들어가면서 뒤돌아보았더니 꼬마들은 집 뒤에서 얼굴만 쏘옥 내민 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장님 따라 원장님 방에 들어서기 전 망설임. 들어섰을 때 다리가 후들거리던 일. 너무 똑똑하게 생겼다며 첫 마디에 칭찬을 해 주던 일. 이제 새 생활이 시작되니 여기서 즐겁게 살자. 여기 있는 어른들이 이젠 너의 아빠와 엄마가 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다 기억할 수도 없는 많은 말을 신혜는 들었습니다.
이장님과 원장님이 서로 작은 소리로 신혜를 보며 이야기할 때는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온몸을 휘감던 일. 이장님이 신혜에게 몸 건강히 잘 지내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을 때 밀려오던 서러움. 그리고 외딴곳에 버려진 외로움. <사랑의 집> 아이들 앞에서 우리 집에 딸 하나가 생겼다면서 신혜를 소개하고 이젠 한 가족이 됐으니 서로 사랑하며 잘 지내길 바란다는 말과 박수 소리가 어지럽게 머릿속을 뒤흔들던 일. 아까 집 뒤에 숨어 있던 꼬마들이 제일 앞줄에 서서 생글생글 웃는 귀여운 모습이 보였을 때 신혜는 미소를 짓다 말고 눈앞이 흐려오던 일. 신혜는 이날의 모든 일들이 꿈을 꾸는 것 같이 아련하기만 했습니다.
신혜가 살아야 할 <소망의 방>에 들어 설 때까지 꼬마들이 따라오며 새로 온 누나가 되게 이쁘다, 아니다, 착하다, 아니다 안 무섭게 생겼다. 하고 말씨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뒤 한 번 쳐다보지 못한 신혜였습니다.
<소망의 방>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두 언니가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5학년이라면서?”
“같이 살게 되어 좋아.”
두 언니들이 신혜의 양쪽에서 손을 잡았습니다. 신혜는 아주 멋대가리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잠시 후 젊은 선생님 한 분이 들어왔습니다.
“내 이름은 김선애야, 만나서 반가워. 이 <소망의 방>은 내가 맡고 있단다.”
창백한 얼굴 때문에 조금은 쌀쌀하게 보였지만 말소리는 부드러운 김선애 선생님이었습니다.
“이 방 이름에 ‘소망’인 것처럼 앞으로 모든 일에 소망을 가지고 살았으면 해. 좌절이나 포기, 불평이나 낙심은 멀리 보내 버리고 용기와 사랑, 희망과 기쁨을 기대하면서 소망으로 사는 거지.”
김 선생님은 씽긋 웃었습니다. 가느다란 입술이 예뻐 보였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신혜는 <소망의 방> 언니들과 함께 누웠습니다. 눈을 뜨면 창밖에 자작나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눈을 감으면 풀벌레 소리가 잠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긴 하루도 다 있을까?’
아주 깊은 밤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김선애 선생님이 방에 들어오는 걸 자는 척하고 보았습니다. 김선애 선생님은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시고선 커튼을 바로 하고 방충망과 삐져나간 이불도 다시 잘 덮어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머리맡에서 조용히 머리 숙이고 있다가 소리 없이 나갔습니다.
다음날부터 신혜에게는 모든 일이 다 힘들었습니다. 익숙지 못한 일이라 당연했습니다. 단체로 생활하는 일, 규칙에 맞게 시간을 보내는 일, 자기 수준에 맞는 근로의 일, <사랑의 집> 안에서의 학교생활, 그리고 제각기 사연을 가지고 부모님과 살고 있지 못하는 평범치 못한 처지의 아이들 30여 명이 형제자매로 새롭게 인연을 맺는 일.
신혜는 일곱 살에서 열여섯 살까지 아이들이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랑의 집>에서 원장님과 여섯 명 선생님의 보살핌과 학업을, 그리고 여러 직원들로부터 살아가는 데 도움을 받고 있는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신혜가 가장 놀란 것은 아이들 모두가 즐겁고 명랑하게 생활하고 있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신혜는 중학교 2학년 정화, 1학년 소정 언니를 따라 맡은 일과 공부를 열심히 해 나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언니들도 신혜를 정말 친동생처럼 이끌어 주었습니다. 신혜는 아직 생활이 힘들었지만 모두에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나를 가족처럼 다정하게 마음 편하게 지내게 해 주는 곳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꽉 막혔던 신혜의 마음은 오래가지 않고 금방 봄눈 녹듯이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신혜는 점점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 앞에 닥치는 일을 담담히 잘해 나갔습니다. 마냥 슬퍼하며 살 순 없다는 걸 신혜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혜는 모든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일에 적극적이다. 일 잘한다. 맡은 역할도 짱이다. 인사 잘하고 예의 바르다. 아주 괜찮은 아이다.’라는 칭찬을 서서히 달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신혜 자신도 놀라면서 가끔씩 잘하고 있는 자기의 얼굴이 보고 싶어 거울을 보며 웃기도 하고 격려도 해 주었습니다.
“강신혜, 아주 잘하고 있어요. 맨 날 울기만 하더니…… 호호.”
그러나 마냥 그런 날이 계속되지 않는다는 걸 신혜는 차차 알게 됩니다. 그건 틀림없이 불길한 징조입니다. 맨눈으로 볼 수 없는 바이러스가 아무도 모르게 사람 몸에 들어와 무슨 까닭인지도 모르게 사람을 아프게 하고 몸져눕게 하는 것처럼, 신혜에게는 바로 그런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움이라는 생각의 씨앗이 신혜의 머릿속에 싹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해서 변한다는 사실을 어린 신혜는 아직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런 법칙은 어김없이 신혜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신혜가 <사랑의 집> 생활을 시작한 지 두어 달이 넘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부터 오후가 되면 견딜 수 없는 허전함에 빠지고 맙니다. 그럴 때면 어디라도 박차고 나가고 싶습니다. 신혜는 며칠이 지나면 괜찮으리라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참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오후. 신혜는 기어코 <사랑의 집>을 벗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의 집>을 나설 때는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함에도 신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딱히 허락을 받을 만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인행동을 하는 것은 <사랑의 집>에서는 가장 큰 잘못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는 신혜입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에게 <사랑의 집>에 올 때 만났던 개울물이 너무 보고 싶다고, 내 마음을 빼앗아 간다고 하면 이유가 될까요. 그 말을 들은 선생님들은 어떤 표정이고 아이들은 또 어떤 표정일까. ‘그래 외출하고 와’ 하고 허락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라는 건 신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렇지만 밖으로 나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신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자 완전히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신혜는 <소망의 방>을 나와 뒷문 앞에 섰습니다. 모두들 자유롭게 쉬고 있는 오후였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와 서 있는지 신혜 자신도 모를 지경입니다. <사랑의 집> 뒷문은 사람 하나 겨우 드나들 아주 작은 문입니다. 하지만 신혜는 뒷문을 열면 원래 살던 익숙한 세상이 자기를 쏴악 빨아들일 것만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신혜는 손바닥을 문에 대고 살짝 밀었습니다. 문은 쉽게 열렸습니다. 자물쇠가 달려 있었지만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5
<사랑의 집> 뒷문을 열자 언덕 아래로 이어진 오솔길이 보였습니다. 신혜는 오솔길 따라 언덕으로 내려왔습니다. 언덕 밑엔 예상대로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신혜는 개울물을 따라 걸었습니다. 개울물은 <사랑의 집> 언덕 아래를 반쯤 휘감더니 키 작은 미루나무들이 모여 있는 미루나무작은수풀 속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신혜는 미루나무작은수풀이 끝나는 곳까지 걸었습니다. 미루나무작은수풀을 벗어난 개울물은 여전히 찰랑거리며 흘렀습니다. 신혜는 계속 개울물을 따라 걸었습니다. 미루나무작은수풀을 지난 개울물은 들판으로 흘러가다 논과 밭이 펼쳐진 마을 앞을 향해 한참을 구불구불 흐릅니다. 마을을 벗어나면 큰 갯버들(개울 옆에 자라는 버드나무의 일종. 버들피리를 만드는 재료가 됨)이 서 있고 ㄱ자로 물길이 꺾이는 곳에서 물살이 빠르게 흐릅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섶다리까지 일직선으로 곧장 흐릅니다. 물길 따라 걷던 신혜의 걸음도 빨라지다 이젠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신혜가 달리면 개울물은 둑길을 끼고 더 빠르게 흐릅니다. 신혜는 물살에 뒤질세라 있는 힘을 다해 달립니다. 한참 달리다 보니 저만치 아래에 섶다리가 보였습니다. 낯익은 다리. 이장님과 함께 <사랑의 집>으로 올 때 세수하던 다리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반대 방향에서 보고 있는 게 다를 뿐입니다.
신혜는 달음박질을 멈추고 섶다리를 향해 천천히 걸었습니다. 햇빛이 눈부신 그날. 괴로운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다리에 앉았던 그 시간. 그때 만났던 개울물. 개울물의 졸졸졸 속삭임. 개울물이 살아있는 걸 처음으로 느낀 그 시간.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풀잎배 하나가 주던 짜릿한 느낌. 신혜는 그날의 장면을 머릿속에서 다시 끄집어내며 섶다리 위에 섰습니다.
‘내가 여길 왜 다시 오고 싶어 한 걸까.’
해답은 금방 나왔습니다. 풀잎배를 띄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신혜는 풀잎배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를 띄우고 싶었습니다. 외롭지 않게. 풀잎배의 모양도 다 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모양 저런 모양, 항구에 가지각색의 배가 떠 있는 것처럼.
신혜는 주변에 있는 들풀의 잎을 하나씩 땄습니다. 신혜는 풀잎들을 쥐고 큰 갯버들 앞까지 달려왔습니다.
“자, 너희들은 이제 풀잎배가 되었어. 떠난다. 내가 저 다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누가 빨리 오는지. 누가 늦장 부리는지 다 보고 있을 거야. 그러니 한눈팔지 말고 와야 해. 자 출발!”
신혜는 손바닥에 있는 몇 장의 풀잎을 개울물 위에 뿌렸습니다. 풀잎들은 작은 배가 되었습니다. 개울물에 몸을 싣고 동동 떠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신혜는 풀잎배보다 먼저 섶다리에 서 기다리려고 힘껏 달렸습니다. 신혜가 섶다리에 앉자마자 개울물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아, 안 돼, 벌써 오면. 물살이 너무 빨랐어.’
이미 풀잎배 두 개가 다리 밑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신혜는 너무 가까운 곳에서 풀잎배를 띄우고 기다리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에는 더 위에서 풀잎배를 띄워야 하겠구나.’
신혜는 아쉽지만 섶다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시간이 좀 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신혜는 종종걸음으로 개울물을 거슬러 다시 <사랑의 집> 뒷문까지 왔습니다. 뒷문은 신혜가 오길 기다리기나 했는지 아주 살짝 밀었는데도 부드럽게 열렸습니다. 신혜는 살며시 <사랑의 집> 뜰에 들어왔고 재빨리 <소망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휴-’
감쪽같은 작전 성공이었습니다.
오랜 망설임 끝에 나가 본 개울물. 규칙을 어기고 나간 죄책감에 아직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지만 기분은 너무도 개운했습니다. 꽉 막혔던 가슴 속 덩어리가 스르르 풀어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대가는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망의 방>은 비어 있었습니다. 정화, 소정이 언니는 보이질 않았습니다. 가슴 졸이고 책상에 앉아 아무 책이나 펴들고 앉았습니다. 책 속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이내 개울물이 흐르고 풀잎배들이 떠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신혜야.”
두 언니가 언제 왔는지 신혜를 불렀습니다. 신혜는 화들짝 놀라 언니들을 쳐다보았습니다.
“어디 있었어. 찾았는데. 김선애 선생님이 방 안에 가구를 옮기는 데 도와 달라고 해서 갔다가 왔는데.”
언니들의 표정에서 전혀 다른 낌새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신혜는 속으로 안심하며 겉으론 배시시 웃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대꾸를 하진 않았습니다. 언니들은 숙제를 한다고 책을 펴고, 신혜도 같이 덩달아 공부한답시고 책을 폈습니다. <소망의 방>은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다음 날. 신혜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생활을 했고, 어느 누구도 어제 어디 갔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혜는 기분이 좋아 며칠을 잘 보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가슴이 답답해 오는 걸 느꼈습니다. 가슴 속의 작은 알갱이가 다시 뭉치기 시작하는 걸 느꼈습니다. 문득문득 개울물이 생각나고 풀잎배가 떠오릅니다.
토요일 오후. <사랑의 집> 모든 일과가 끝나고 오후부터 자유시간에 들어갑니다. 신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사랑의 집> 뒷문 앞까지 왔습니다.
- 출입 금지 -
지난번엔 분명히 없었던 팻말이 문 앞에 붙어 있었습니다. 신혜는 흠칫 놀라 잠시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내가 나간 걸 알고 있구나.’
신혜는 뒷걸음을 쳤습니다. 몇 걸음 뒤로 가던 신혜는 그래도 뒷문을 한번 열어보고 싶었습니다. 다시 다가가서 뒷문을 살짝 밀었습니다. 뒷문은 전처럼 아주 부드럽게 열렸습니다.
‘뭐야. 이건. 출입 금지라면 문을 잠그던지 아니면 나갈 수 없게 하든지 해야지.’
참 이상한 일도 있다고 생각하다
‘이건 내가 나가서 ‘출입 금지’라고 쓴 게 아닐 거야. 나와는 상관없이 붙인 걸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쪼그라졌던 용기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신혜는 뒷문을 열었습니다. 언덕길을 내려서고 개울물가로 걸어갔습니다. 미루나무작은수풀 옆을 지날 때 물오리 두 마리가 꽥꽥대고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신혜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오리가 꾸짖는 것 같았습니다.
‘넌 나쁜 애야. 밖으로 나갈 때는 허락을 맡아야 한다는 규칙을 어긴데다 이젠 출입 금지 팻말도 무시했어. 벌써 두 가지나 규칙을 어겼어. 넌 정말 큰일 날 애구나.’
신혜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아니야. 이건 어쩔 수 없어. 내 말을 믿고 누가 허락을 하겠어. 그럼 난 어떡하고…… 미치겠는데. 차라리 도망갈까. 이건 도망가는 것보단 낫잖아. 그냥 개울물에서 시간 조금 보내고 오는 것뿐이야.’
신혜는 자신을 마구 두둔합니다. 이미 규칙을 한 번 어겼을 때보다 뱃장이 더 커졌습니다.
신혜는 다시 개울물을 따라 걷습니다. 신혜는 가는 길에 풀잎을 땄습니다. 같은 모양이 아닌 잎을 따느라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며 걸었습니다.
‘이곳이면 풀잎배를 띄우고 달려가도 충분할 거야.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는 거야.’
신혜는 미루나무작은수풀 아래 개울물이 조금 넓어지는 여울목에서 풀잎배를 띄웠습니다.
“자, 너희들 이제 출발. 다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니 모두 무사히 잘 와줘. 알았지!”
신혜는 농로(농사에 이용되는 길)를 가로지르는 지름길로 달립니다. 신혜는 단숨에 섶다리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곤 쪼그려 앉아 풀잎배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립니다. 아직 시간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신혜는 개울물에 손을 넣었습니다. 개울물이 손가락 사이로 간지럼주며 흐릅니다. 잠시 뒤 둥둥 신혜의 몸이 다리와 함께 개울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사랑의 집>에서는 생각나지 않은 이 생각 저 생각이 쉽게 떠오릅니다.
“야! 풀잎배가 오는구나.”
신혜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드디어 제일 먼저 오는 풀잎배가 보입니다. 이름은 잘 모르지만 둥근 잎이었습니다.
“야. 또 온다. 또 와.”
신혜는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얼굴 가득 띠고 소리칩니다. 풀잎배가 자기를 찾아온다는 거, 나를 잊지 않고 찾아온다는 거, 약속을 지키며 찾아온다는 거, 신혜는 잠시 동안이나마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풀잎배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물길 따라 동동 행복해하는 신혜 앞으로 계속 떠내려왔습니다.


초저녁 상큼한 반달이 곱게 떴습니다. 신혜는 금송화 핀 마당 벤치에 앉아 달을 쳐다봅니다. 낮에 띄운 풀잎배를 생각합니다. 짧았지만 신났던 그 시간. 맘껏 소리치던 일이 생각납니다. 다만 2개의 풀잎배가 오는 걸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신혜의 풀잎배를 띄우기는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처음 <사랑의 집> 뒷문 나갈 때는 스릴이 있었지만 이젠 당연한 것으로 생각 없이 드나듭니다. <사랑의 집> 가족으로서의 책임과 본분을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오직 개울물로 달려가는 일에 빠져 다른 판단은 무뎌지고 말았습니다. 신혜는 정말 중요한 사실을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집> 규칙을 무시하고 공동체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 본분(마땅히 지켜야 할 일)을 망각(어떤 사실을 잊어버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생님과의 소통, <소망의 방> 언니들과의 소통이 점점 어렵게 되고 있다는 사실. 남의 눈을 속이고 다른 행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모든 것은 다 변하고 있다는 일을 신혜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세상은 그대로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변하면 변할 수밖에 없는 세상인 것을 신혜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성장해가면서 가장 필요한 그걸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신혜는 모릅니다. 눈치 빠르고 생각 깊었던 신혜. 그러나 그런 신혜도 한 곳에 정신이 빠지자 점점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신혜는 풀잎배 놀이를 통해 기다림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았습니다. 틀림없이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기다림이란 얼마나 신나는 일인 것을 풀잎배를 통해 인식했습니다.
풀잎배는 개울물 길에서 물살을 잘 만나면 손쉽게 빠르게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애물에 걸리면 풀잎배는 쉽게 떠내려가질 못합니다. 냇가에는 장애물이 많습니다. 개울물로 뻗어 나온 거친 나뭇가지. 냇가에 모여 있는 쓰레기더미. 긴 팔로 물고 늘어지는 물풀. 어디로 튀게 할지 모르는 소용돌이. 제자리에 맴돌게 하는 여울. 그리고 영영 빠져나오기 힘든 깊은 홈(물체에 오목하고 길게 팬 자리)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풀잎배들은 이런 난관을 다 이기고 신혜가 기다리는 섶다리로 떠내려옵니다.
풀잎배는 기다리는 신혜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면 꼭 나타나 줍니다. 풀잎배는 신혜를 기쁘게 해 줍니다. 기다림이란 헛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신혜는 풀잎배를 기다리다 보면 자연히 아빠 배를 연상합니다.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아빠. 아빠와 살던 집엔 이제 아빠도 신혜도 다 없는 기억 속의 집. 하지만 풀잎배가 동동 떠 오듯이 아빠 배도 둥둥 떠서 항구로 돌아온다면, 악몽 같은 모든 일들이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갈 텐데.
신혜는 풀잎배에다 자기의 맘을 담습니다. 풀잎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아빠 배도 언젠가 신혜 앞에 기쁨이 되어 오리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풀잎배를 기다리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기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모락모락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풀잎배를 띄울 때 한두 개의 풀잎배들이 꼭 신혜의 바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신혜를 다시 아프게 합니다.
‘왜 풀잎배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신혜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사람 살아가는 데도 모두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은 신혜도 잘 압니다. 자신도 그런 처지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낱 풀잎배에게도 그런 사실이 적용된다는 걸 신혜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왜 여러 개 중에 꼭 빠져야 하는 것이 있어야 된단 말인가. 왜 오지 못하는 풀잎배가 있는 것일까. 그런 이치는 이 세상에 꼭 존재해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아빠 배도 그런 이치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신혜의 맘속에 찬 기쁨과 즐거움은 점차 사그라지고 있었습니다. 신혜는 이제 풀잎배에 집착(어떤 것에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하게 되어갑니다. 돌아오지 않는 풀잎배를 악착같이 기다립니다. 십 분이 이십 분이 되고 이십 분이 삼십 분이 됩니다. 어젠 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앞으로는 두 시간도 마다하지 않을 신혜입니다. 개울물에 띄운 풀잎배가 모두 떠내려와 신혜를 만나는 그날까지 신혜는 절대 포기하지 않기로 맘먹습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만나는 게 중요합니다. 무슨 일이든 꼭 한두 개가 빠지는 그런 이치를 깨고 싶었습니다. 신혜는 수선화 전설의 나르시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소년-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하다가 빠져 죽어서 수선화가 되었다 함)처럼 <사랑의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고 개울물만 쳐다봅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함께 떠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 번에 풀잎배 모두가 신혜 앞으로 떠내려온 일은 없었습니다.



6
출입 금지
<사랑의 집>에서는 신혜가 뒷문으로 나간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습니다. 정화와 소정이가 제일 먼저 알았습니다. 신혜가 나간 첫날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꼈지만 두 언니들은 서로 비밀로 하기로 하고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나갈 때 확실히 알았습니다. 정화와 소정이가 신혜의 뒤를 몰래 밟아 미루나무작은수풀까지 갔습니다. 멀리 섶다리까지 달려가는 신혜를 보자 정화는 망을 보고 소정이는 급히 <사랑의 집> 에 달려와 김선애 선생님께 알렸습니다.
“뭐라고?”
하얀 얼굴의 김선애 선생님 더욱 창백해졌습니다. 김선애 선생님은 소정이와 함께 달려 나갔습니다.
“아 아니 쟤 쟤가 저기서 뭐 뭘 하고 있는 거야.”
김선애 선생님은 말을 다 더듬었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개울물 위에서 머리를 숙인 모습만 아련하게 보였습니다. 마치 동상이나 된 것처럼 꼼짝도 안 하는 신혜가 걱정스럽게 보였습니다. 한참 지나자 신혜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쪽 미루나무작은수풀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얘들아, 숨자.”
김선애 선생님은 아까보단 조금 진정된 표정을 하며 정화와 소정이를 데리고 미루나무작은수풀 뒤편에 몸을 숨겼습니다. 신혜의 얼굴이 미루나무작은수풀을 지날 때 똑똑히 보였습니다. 환하게 펴있고 웃음기까지 먹은 생기 있는 표정이었습니다. 그 표정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거의 두 달을 표정 없이 살던 신혜가 맞는지 김 선생님은 헷갈렸습니다.
신혜가 <사랑의 집> 뒷문 밖에서 잠시 머뭇대더니 날렵하게 들어갔습니다. 정화와 소정이, 김 선생님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습니다. 김 선생님은 검지를 입술에 댔습니다. 정화와 소정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신혜는 물론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는 선생님의 신호였습니다. <사랑의 집>으로 들어온 김 선생님은 투명한 비닐 받침에 매직펜으로 ‘출입금지’라고 굵게 썼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안 볼 때 살짝 뒷문에다 고리를 만들어 걸어놓았습니다.
다음 날 김선애 선생님은 신혜를 부르기 전에 먼저 정화와 소정이를 만났습니다.
“선생님. 신혜가 완전 달라졌어요. 잘 자고 잘 웃고 잘 먹고 그래요.”
김 선생님은 또 한 번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신혜에게 연속으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얘들아, 내가 오늘 신혜에게 할 말이 있는 거 알지? 그런데 하지 않겠어. 왜냐하면 신혜가 저렇게 행복해하는 걸 깰 자신이 없어.”
김 선생님은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그러니까 좀 더 관찰해보자.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나쁜 짓도 아닌데 무조건 막고 벌을 준다는 건 그렇구나. 모른 체해두었다가 기회가 되면 얘기하자. 그 대신 너희들도 함께 도와줘.”
“네, 선생님”
정화와 소정이가 시원하게 대답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신혜는 다음 날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사랑의 집>에서 맡은 자기의 일(동생들 학습 돌보기, 도서관 도서 열람 활동 돕기 등)을 신바람 나게 잘했습니다.
‘저렇게 즐거워하고 생기 있는 얼굴을 하는데 못 나가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김 선생님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토요일 오후가 왔습니다. 김 선생님은 아침부터 긴장했습니다.
‘오늘도 오후엔 신혜가 나가겠구나.’
정화와 소정이 역시 가슴에 숨긴 비밀이 얼굴에 나타날까 봐 힘들어했습니다.
토요일 모든 일과가 끝나고 자유 시간이 되었을 때 예상대로 신혜가 뒷문으로 나갔습니다. <사랑의 집>에서 세 사람이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신혜는 빠져나갔습니다. 세 사람은 조금 뒤 미루나무작은수풀까지 내려가 멀리서 섶다리에 앉아 있는 신혜를 지켜보았습니다. 지난번 보다 신혜가 일어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김 선생님은 다시 얼굴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김 선생님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은 놀라거나 충격받으면 그렇다는 걸 이미 정화와 소정이는 압니다.
“선생님. 이만 들어가세요. 저희들이 지켜보고 있을게요.”
“아니다. 너희들이 들어가라. 한꺼번에 모두 사라지면 <사랑의 집> 선생님이나 다른 아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오히려 김 선생님은 정화와 소정이를 <사랑의 집>으로 먼저 들여보냈습니다.
한참 만에 일어난 신혜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김선애 선생님은 전처럼 미루나무작은수풀 뒤에 몸을 숨겼습니다. 신혜가 콧노래까지 부르며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김 선생님은 숨을 죽이며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고민하였습니다.


“얘들아, 점심 먹고 밖에 산책 나갔다 올 사람?”
다음 날 일요일. 김 선생님은 화사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소망의 방>에 들어왔습니다. 화사한 옷을 입으니 얼굴 하얀 김 선생님이 더욱 예뻐 보였습니다.
“네. 선생님.”
눈치 빠른 소정이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주일날은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나면 자유롭게 자기 취미활동을 하거나 쉬게 됩니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사랑의 집> 아이들은 담당 선생님들과 여러 가지 가벼운 소일거리(그럭저럭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심심풀이로 하는 일.)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실 아이들은 그 시간을 제일 기다립니다.
“네, 선생님. 신혜야 너도 갈 거지?”
정화가 신혜를 쳐다봅니다. 신혜는 머뭇거립니다.
“신혜야, 멀리 안 가. 이제 여름도 끝나 가는데 여름이 가기 전에 우리 동네 여름 들판은 한 번 보고 여름을 보내야 되지 않겠니?”
김선애 선생님은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소정이가 이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참 좋겠어요. 신혜야 너도 같이 가자.”
신혜는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김 선생님과 정화, 소정이 얼굴에 안도감이 비치는 걸 신혜는 알지 못했습니다.
“와~ 밖에 나오니 참 좋다. 새소리도 좋고, 물소리도 좋고, 우아, 시원하게 부는 바람은 얼마나 좋니!”
김선애 선생님은 들뜬 소녀처럼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 들판 한 바퀴 돌고 빵 먹으로 가요. 삼거리 찐빵집 정말 죽여줘요. 히히히.”
정화가 익살스럽게 웃었습니다.
“아, 그게 좋겠다. 벌써 침 넘어간다.”
소정이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습니다. 신혜는 표정 없이 물끄러미 세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신혜야, 넌 뭐가 좋니. 혹시 어디 가고 싶은 덴 없니?”
“……”
신혜는 말이 없었습니다. 슬그머니 자기도 모르게 섶다리 방향으로 눈동자가 돌아갔습니다. 김 선생님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신혜야, 가고 싶은 곳 말해봐. 우리 같이 가자.”
신혜는 머뭇댔습니다.
“신혜야 얼른 말해. 어딜 갈 건데.”
소정이가 다그쳤습니다. 신혜는 한참 생각하더니 손가락을 가리켰습니다.
“뭐, 저길?”
김 선생님과 정화, 소정이는 놀라서 당황했습니다. 당연히 개울가. 섶다리. 미루나무작은수풀. 다시 말하면 신혜가 남몰래 가는 지정코스라고 생각했는데 섶다리를 지난 개울물이 마지막으로 흘러가는 곳. 바로 동구 밖 시냇가였습니다. 섶다리와는 완전 반대 방향입니다.
“와, 저긴 좀 먼데. 버스 타고 가야 할 거야.”
정화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럼, 다른 데는 관두고 찐빵 먹고 신혜가 가자는 곳으로 가 보자.”
김선애 선생님은 얼른 분위기를 바꾸었습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신혜의 뜬금없는 손가락 하나에 자칫 비밀을 털어놓을 뻔했던 순간을 선생님은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아이들과 김 선생님은 삼거리 찐빵집에서 실컷 찐빵을 먹으며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찐빵이 왜 찐빵인지 알아?”
정화가 불쑥 말을 꺼냈습니다.
“그거야 쪘으니까 찐빵이지.”
소정이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그럼 구운 빵은 굽빵. 말린 빵은 말빵이게?”
김 선생님이 호들갑떨며 말했습니다.
“아으 썰렁 개그. 선생님!”
정화와 소정이가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김 선생님도 허리를 잡고 웃었습니다. 신혜도 어느새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그럼 왜 찐빵이 된 거야.”
김 선생님이 정화에게 물었습니다.
“사실은 제가 이유를 붙인 건데요. 찐 ~하고 눌러요.”
“찐~? 그게 뭔데.”
“아 좋은 거 있으면 전기가 찐~하고 통한다고 하잖아요.”
“맞아. 나도 찐~하고 통하는 거 있는데.”
소정이가 날쌔게 끼어들었습니다.
“나도, 너희들하고 찐~하고 통하잖아.”
김선애 선생님은 정화와 소정이를 보다가 슬쩍 신혜를 바라보았습니다. 신혜는 눈을 깜빡거렸습니다.
“삼거리 찐빵은 정말 전기가 통할 만큼 맛있어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찐빵의 의미를 정했어요. 크크.”
정화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듣고 보니 말 되네 정말. 찐빵. 전기가 통할 듯이 찐~하게 감동 주는 빵. 깔깔깔”
김 선생님이 다시 크게 웃었습니다. 아이들도 또 한 번 까르르 웃었습니다. 신혜 입에서는 웃음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입술 끝이 많이 올라갔습니다.
“자, 이제 배도 부르니 슬슬 강줄기나 보러 갈까?”
그때 신혜가 얼른 말했습니다.
“선생님. 다음에 가요. 오늘은 배가 너무 불러 더 못 걷겠어요.”
신혜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정화와 소정이는 웃다 말고 다시 입을 멍하니 벌리고 말았습니다. 정화와 소정이의 짐작이 이번에도 빗나갔습니다. 사실 신혜는 섶다리에 가고 싶었지만 자기만의 비밀 세계를 다른 사람과 함께 간다는 게 싫었습니다.
“그래, 그럼 다음에 가지 뭐. 그런데 온 길을 또 가려니 좀 그렇다. 가다가 섶다리를 거쳐 우리 <사랑의 집> 뒷문으로 들어가는 게 어떠니.”
“좋아요. 좋아요.”
정화와 소정이는 아예 합창을 했습니다.
“……”
신혜는 당황했지만 금방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남이 모르는 자기만의 비밀 장소를 시치미 떼고 간다는 것도 일종의 짜릿한 즐거움으로 느꼈습니다. 신혜는 상큼하게 발을 내디뎠습니다.
네 사람은 노래도 부르고 폭 좁은 개울을 건너뛰기도 하며 걸었습니다. 서편 하늘로 기울어진 해가 <사랑의 집>을 뒤에서 환하게 비췄습니다. <사랑의 집> 그늘이 미루나무작은수풀에 얹히고 미루나무작은수풀 아래에 가려진 개울물에서 햇빛이 반짝였습니다.


시원한 바람 불어와 랄랄라 랄라라
우리는 손을 맞잡고 랄랄라 랄라라
즐거운 마음 흥겹게 랄랄라 랄라라
내 마음 하늘로 올라요 두둥실 두둥실.


김선애 선생님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맑고 고운 목소리였습니다. 신혜는 선생님이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 줄 몰랐습니다. 정화와 소정이는 양쪽에서 신혜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팔을 내 흔들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김선애 선생님의 멋진 원피스 자락이 바람결에 날리고 정화, 소정이, 신혜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말려 올라갔습니다. 네 사람이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초록 들판 위에 신기한 풍경으로 보였습니다. 섶다리를 지나 갯버들 앞으로, 갯버들 지나 여울목으로, 여울목 지나 미루나무작은수풀로. 미루나무작은수풀 지나 언덕 오솔길로. 잠시 후, 네 사람은 <사랑의 집> 뒷문을 열었습니다.


신혜는 밤잠을 설쳤습니다. 너무 슬퍼도 잠이 안 오지만 너무 기뻐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김선애 선생님과 언니들과 함께한 산책은 신혜가 경험한 가장 멋진 산책이었습니다. 한 번도 그런 문화에 살지 못했던 신혜. 남에게 관심도 못 받아보고 오로지 혼자 기와집을 짓고 허무는 신혜의 생활에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혜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잠을 못 이룬 더 큰 이유는 신혜의 깊은 마음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선생님과 언니들. <사랑의 집> 공동체 모두에게 비밀이면 비밀이고, 속임수라면 속임수가 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혜는 갈등의 폭이 점점 커지면서 다시 무거운 짐을 짊어진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김선애 선생님과 언니들이 다정하게 대해 줄수록 마음속 행복의 마당은 넓어져 갔습니다. 신혜는 자기에게 찾아온 그런 행복을 포기하기 싫어졌습니다. 하지만 풀잎배를 띄우는 일은 더욱 애착이 갑니다.
거기엔 아빠가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신혜의 가슴속에는 이 두 개의 커다란 물결이 부딪히고 있었습니다. 신혜는 다시 힘든 시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괴로운 이중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괴로움 속에서도 오직 풀잎배 기다리는 일이 우선임을 신혜는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김선애 선생님은 신혜의 맘이 돌아서서 현실 생활에 어서 빨리 충실해 주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신혜의 행동에서 불길함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김 선생님의 마음도 조용히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신혜의 일을 알고 난 뒤에 떠안게 된 짐 때문이었습니다.
신혜가 밖으로 나가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랐지만 좀처럼 멈추지 않는 신혜의 행동에 김선애 선생님은 낙심이 되어 갔습니다. 신혜의 버릇을 사랑으로 감싸고 깨닫게 하여 바뀌어지기를 바랐던 김 선생님이 처지가 점점 우습게 되고 말았습니다. 상황이 완전 달라져 갔습니다. 김 선생님은 <사랑의 집>에서 신혜의 행동을 모두 눈치챌까 봐 이젠 신혜의 문밖 출입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으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감시자가 오늘의 방관자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김선애 선생님은 원장 선생님이나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니 김 선생님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중대한 규칙을 어긴 신혜는 <사랑의 집>에서 쫓겨나고 말 것입니다. 김 선생님은 정화와 소정이의 도움을 받아 신혜의 바깥출입이 탈이 나지 않게 시간과 생활표 등을 조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의 사고를 대비하여 김 선생님은 신혜가 나간 뒤에는 늘 미루나무작은수풀에 나가 신혜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신혜는 오늘도 풀잎배를 기다립니다. 아직까지 오지 않아 애태우던 엉겅퀴 잎이 막 도착했습니다. 신혜의 오늘 기다림은 끝났습니다. <사랑의 집> 뒷문 앞에 섰을 때 가슴 속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이 망치가 되어 가슴 속을 칩니다.
‘오늘은 정말 꼭 문이 잠겼겠지.’
하지만 문은 변함없이 열렸습니다. 아무도 그 문을 잠그지 않았습니다.
‘대체 뭐야.’
‘띵!’ 하고 오늘도 신혜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꼴입니다. 신혜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말도 있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벌써 여러 번 이 문을 통과했는데 <사랑의 집>에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내가 나간다는 것은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들키고 말 것이라는 예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문은 열렸으니 이젠 신혜가 서서히 충격을 받기 시작합니다. 차라리 문이 잠겨 있었다면 오히려 후련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은 언제나 열리므로 신혜가 겪는 놀라움은 매일 커져 갑니다. 마땅히 호되게 혼나는 일이 있어야 하는데……
잠자리에 누운 신혜는 모처럼 하나의 낙오 없이 다 흘러와 준 풀잎배들을 생각하며 기분 좋았습니다. 그때 밖에 인기척이 나더니 김선애 선생님이 들어왔습니다. 김선애 선생님은 신혜의 침상 머리에 살며시 걸터앉았습니다. 향긋한 향기가 났습니다. 김선애 선생님은 숨을 몇 번 깊게 쉬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후, 김 선생님은 신혜의 두 손을 조용히 모아 쥐었습니다. 김선애 선생님의 손은 보드랍고 따스했습니다. 신혜가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지만 엄마의 손길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혜는 자기 몸이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 좋다!’
신혜는 그만 눈을 뜨고 선생님을 바라볼 뻔했습니다.
“우리 신혜 맘을 누가 그리 빼앗고 있을까.”
김선애 선생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선생님은 한참 동안이나 신혜 옆에서 머리 숙이고 있었습니다.
“주님. 우리 신혜의 갈 길을 인도해 주세요. 신혜가 길을 잃고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주님. 도와주옵소서.”
들릴까 말까 하는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신혜는 목이 막혀 숨을 쉬기가 힘들었습니다. 김선애 선생님은 기도를 마치고 신혜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조용히 방문을 나갔습니다. 신혜는 막혔던 목이 갑자기 뚫리고 기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기침을 몇 번 하고 나니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신혜는 엎드려 소리 없이 흐느꼈습니다


토요일이 왔습니다.
아침부터 바람 한 점 없는 뜨거운 날씨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름이 끝나 가는데도 무더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랑의 집>에서는 이날 축제일로 대청소가 있는 날입니다. 오전에는 대청소, 오후에는 축제 공연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신혜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청소했습니다. 일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신혜는 청소 잘하기로 <사랑의 집>에서는 알아줍니다. 신혜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이리저리 닦으며 즐겁게 일을 했습니다.
<사랑의 집> 사람들 역시 열심히 청소를 한 까닭으로 빠른 시간 안에 <사랑의 집>은 말끔해졌습니다. 어린 세 꼬마들부터 어른들까지 자기 몫의 일을 열심히 한 결과입니다.
점심시간 전, 마지막 작업이 남았습니다. <소망의 방> 소녀들은 금송화 화단을 손질했습니다. 김선애 선생님은 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