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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꽁트] 어업인의 날 / 이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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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262회 작성일 20-12-1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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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인의 날





2013년 4월 1일 강원도 속초시 어업조합 앞 공터에서는 삼십여 년 묵혔던 ‘어업인의 날’ 행사를 다시 한다며 요란했다.
오랜만에 관(官)에서 벌인 어업인의 날이다. 선주(船主)들은 자기 배 선원들을 거느리고 속속히 모여들었다. 선원들은 가솔까지 부추겨 같이 왔다. 속초고등학교 밴드부 학생들이 금 수술이 치렁치렁 달린 복장을 하고 무대 오른쪽에 자리 잡았다. 어느새 꼬마들도 큰 구경났다며 어른들 틈에 끼워 앉아 재잘거리고 있었다. 쌀쌀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머리 위로 드리운 만국기를 팔랑팔랑 춤추게 했다. 행사장은 그럴 듯했다.


1950~60년대만 해도 속초항에는 500여 척의 어선들이 드나들었고 하루에 잡아 오는 명태가 15만 톤에 달했다. 그 시절 대한민국 집집마다 생태 몇 마리쯤은 싼값으로 손쉽게 먹고 살았다.
명태잡이 어부들은 12월에서 3~4월까지 불과 서너 달 작업해서 일 년을 살았다. 겨울 동안 번 돈으로 야트막한 윗방 천장에 닿도록 쌀가마를 쟁여 놓곤 했다. 쌀가마의 높이는 곧 그 어부 가정의 힘을 상징하는 잣대였다. 그 쌀가마 수량에 따라 다가올 춘궁기에 배 곯지 않으며 여름 오징어 철까지 걱정 없는 살림살이가 예견되었다. 명태뿐이겠는가. 오징어도 개락으로 잡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속초 어부들 대다수가 함경도 사람이고 북강원도 사람이 약간, 경상도 사나이도 가끔은 껴 있었다. 경상도 사람들은 해방 전국에 잠시 남북으로 오가던 화물선 선원이거나 겨울 명태 철에 돈 벌이 차 함경도로 갔다가 38선이 막히면서 북에 눌러앉았던 선원들이다.
춘(春)태바리가 끝날 무렵 공치잡이 준비를 한다. 공치 잡이는 명태잡이나 오징어잡이보다 어구 비용이 대단하다. 아무나 공치 배를 탈 수 없다. 성실할 것은 기본이고 오랜 바다 경험이 몸에 밴 사람만이 선주의 택함을 받아 조업에 나선다.
휴전 직후라 속초 일대에는 국군과 미군 부대(軍部隊)가 여전히 많았으므로 묘한 흥청거림이 있었다. 마치 미국 서부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처럼, 금광을 찾아 서부로 서부로 달려간 사람들의 신흥 도시를 방불케 했다. 북에서 남하한 피난민 말고도 전쟁 통에 뿌리 뽑힌 민초들이 올망졸망 새끼들 손을 잡고 찾아와 기대 살아내기에 만만한 고장이었다.
당시 어로저지선은 북위 38도 26분으로 반포했었다. 1957년 11월 16일 고성군 거진 이남으로 제한했던 동해안 어로제한선을 휴전선까지 북으로 확장하여 최대한 어획고를 올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선 피랍사건이 문제였다. 피랍 어부들은 사상적인 것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지만 북한 당국이 호시탐탐 우리 어선을 납치해 갔던 것이다. 지금처럼 배 마다 GPS가 달려 있지 못했다. 고의로 월북하는 것이 아니라 어군을 쫓다보면 월선은 어느새 한순간이었다. 혹은 해류의 흐름을 미처 가늠 못 하는 경우도 그랬다.
북한은 납치한 선원들을 강제하여 북의 지령을 세뇌시켜 다시금 남한에 돌려보내 그들의 첩자로 삼는 데 목적이 있었다. 순진한 어부들일수록 북에서 쳐 놓은 공갈에 주눅이 든다.
“동무들이 여기서 지령받고 온 사실을 남한당국에 고지곧대로 실토하는 날엔 동무들 가족은 두말할 것 없고 사돈의 팔촌까지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인즉……”
남한에 이미 심어 놓고 있는 고정간첩들 손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그 무시무시한……
우리 수사기관의 집요한 추적으로 북에 포섭되어 활동하는 사실이 발각되는 사례가 드믈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도 그 사실을 간과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보니, 납포됐다가 돌아온 선원들의 신상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한번 북에 끌려갔다 돌아온 선원들의 일생은 너무나 험한 길이 되고 말았다. 북에서 취조를 받으며 모진 매를 맞고, 송환돼 돌아오는 기쁨도 잠시, 대한민국 수사기관에 불려가 또 취조로 모진 고문까지 받고 나면 육신과 정신이 온전할 수 없었다. 중년의 아버지라면 그의 생명과도 바꿀 자식이, 청년이면 그가 사는 날까지 연좌제란 족쇄를 벗지 못했다. 세상천지 어디에서도 그들을 채용해 주는 곳이 없었다. 대를 이어 뱃사람이 되거나 날품을 팔거나 장사를 해서 살아가야 했다. 목숨 걸고 남한 땅에 피난 왔건만 불의의 사고로 피랍 되고 돌아왔다는 그 한 사건으로, 폐인이 되거나 몇 년씩 감옥살이를 하고서도 영원한 떠돌이가 되는 설움으로 일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동해안 어촌에는 참 많았다. 그뿐만 아니다. 아직도 납북 어부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많다. 힘없는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억울함을 나라가 해결해 주지 못하는지 안 하는지 모를 일이다.
뜻 있는 인사 몇 사람이 있다. 빨갱이란 죄목으로 몇몇 해씩이나 감옥살이를 하고 출옥한 사람의 명예 회복을 위해 평생을 바쳐 애쓰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족쇄가 풀리기는 요원하다. 세월은 늠씰 곁눈 한번 주지않고 흘러간다.
1959년엔 어로제한선이 다시 남하되기도 했다. 그 후로 현재는 성어기 한 철에 제한적으로 ‘저도어장’ 조업이 허용된다. 이 시기엔 어로순시선은 물론 해안 경비정 까지 철저한 감시와 지원을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그렇게 흔했던 명태며 오징어가 어느 때부턴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어선들 역시 톤수를 높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어군은 점점 더 멀리에 떠돌고 20톤 미만 통통배로는 감당이 되지 못했다. 노후 어선들은 자연 폐선, 화목으로 분해되고 크다는 배들 역시 감척의 길로 들어섰다. 자연스럽게 속초의 호황은 옛말이 되고 전국 각처에서 잇속 찾아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차츰 빠져나갔다. 지금은 속초가 어항의 도시라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속초를 대한민국 제일의 어항으로 키웠던 ‘청호동 아바이’들은 거의 저세상 사람이 되었고 그의 2세대들 마저 선장이던 사람이 아파트 경비원이 되었거나 선주 노릇하던 사람이 관광객 낚시꾼들 배 몰이를 한다. 망망대해를 주름잡던 사나이들이 겨우 ‘조도’ 근처나 ‘외용치’ 앞에 닻을 내리는 현실이다.


오래전에 흐지부지 없애버렸던 ‘어업인의 날’ 행사라니? 웬 뚱딴지같은? 진즉에 이런 행사를 갖고 어부들의 절실하고도 시급한 애로사항을 타결해 주었어야 맞다. 그렇더라도 오늘 열리는 이 대회는 아주 의미 있는 것이다.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보호망이 열악하기 그지없은 세월이 꽤 오래였다. 어부들에겐 그 흔한 보험도 등을 돌릴 정도였을 때가 있었다. 엔진오일도 얼음덩이조차 부족해서 출어를 못 하는 배들이 많았다. 그런 시기에 이들에게 후원, 보호, 기술혁신에 국가는 소극적이었다. 일본과 바다 영역을 놓고 가를 때도 우리 어부들 입장에서 보면 전적으로 불리한 협상인 것 같았다. 해수 면적은 넓으나 고기떼가 지나다니는 길목은 다 일본 쪽에 치우쳐 들어간 것 같았다. 널따란 공터가 사람으로 빈자리가 없을 만치 되었다. 저마다 이웃을 부르거나 오래간만에 만났다며 반가워 인사를 주고받느라 벌떼같이 웅성거렸다.
시장을 비롯 단상엔 아직 아무도 이르지 않고 군중들만 아우성이다.
그때 단상에 나타난 사나이가 있었다. 그가 단상에 오르자 군중은 멋도 모르고 박수부터 요란하게 쳐댔다.
“오늘같이 좋은 날 식전 행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회자는 속초에서 나고 자란 피란민 2세 ‘H’ 씨이다. 그는 속초예총 산하 연극협회장이다. 극단을 꾸리고 전국 연극제에서 입상한 바 있다.
“저는 오늘 진행을 맡은 H라고 합니다. 내빈과 관계자분들이 아직 미참한 시간에 우리끼리 옛이야기를 완전 함경도 말로 들어보는 거 어떻겠습니까?”
“좋소 …… 좋소 …… 좋소 ……” 또다시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밴드지휘자에게 신호를 보냈고 곧 경쾌한 행진곡이 좌중을 집중하도록 했다.
“제일 먼저 나오실 분은 ‘청호동 신포마을’에 좌상인 ‘이 광주리’ 아재올시다. 모두 박수치오.”
짝짜짜 …… 아재는 계면쩍어하며 느릿느릿 단상에 올랐다. 아재는 ‘어험’ 목청 한번 가다듬고 말문을 연다.
“나는 오느레 ‘도르매기’를 놓고 한 말씀 하겠습네다. 요지간에 와서는 뭔느므 괘기덜이 시도 때도 모르고 나는가 말임매. 이게 예산일이 아이잔쏘? 월래 가아덜은 춥어서 손끝치 아리게 시릴 적에 나게 되있던 아덜이 아이요? 지금이 사월달에 들어섰는데, 동삼이 다 지나간 지 얼맨데 엿태 잽히니, 이런 병고가 또 어드메 있단 말이오. 그러이까 제값을 받능가 말임매. 어저는 날이 덥어서리 굴비처럼 엮어서 말리자 해도 골아 터지고, 맛도 제철거 맛이 아이잰소? 값시 똥갑씨니 하다못해 ‘고성수협’에서는 냉동 창고에다 잔뜩 쟁여놨다 아이하오. 그래가지구서리 가슬이면 농사꾼들의 싸르 농님부에서 나라돈으로 싸 주덧시 전국에 ‘도르매기 파라주기운동 인가를 한다잰쏘? 어저는 ‘러시아 멩태’를 저장해야 될 시기니까디 창고를 비워야 한단 말임매. 도르매기가 여간 골칫거리겠소? 내 생각 같아서는 이 속초시에서도 ‘엑쓰포’ 물가에서 해마다 무슨 축제니 어쩌구 쌩 도늘 쳐드려서리 폭죽이나 펑펑 터칠게 아이지비. 그래봣자 아아들만 전다지로 구경하라 모이지 우리 같은 사램덜이 가기나 하오? 청초호두 그렇소 그 만턴 새덜이 어디 보이기나 하오?
쌍다리 아래에 째재꼬막케 생게난 갈대숲에 어쩌다 몇 놈이 와가지고 제에구나 둥지를 틀어 새끼를 키우다가도 그 폭죽 터지는 소리에 혼비백산 날라가고 말지비. 그런 새덜은 다시는 돌아오지 안을기 뻔한 이리 아이겠소? 그런 돈 있으면 여기 속초도 냉동창고라던가 건조 어물 보관창고를 더 만이 맹그러서리 어민덜에게 괘기 값시나 지케주는 편이 올타고 여기는 바이오. 여러분덜 생각은 어떳소 내 말이 올타고 생각되면 박수칩새.”
짜짜짜 …… 사람들은 일제히 요란하게 박수치고 ‘광주리’ 아재는 줄달음으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자 자 여러분 조용히 하십시오. 다음 사람이 또 있으니까요. 이번엔 ‘신포마을’ 중에서도 ‘짜꼬찌’ 사람 ‘김 쪼삣때’ 아즈바이 올라오시기요.”
“내 밸매이 쪼삣대가 된 데는 내가 하도 살이 붙지 못하고 꼬꼿이 마른 때문에 붙은 것이지비. 청대산에 전다지 무성한 대나무 말입네다. 쪼삣대한개면 멩태낚시 150개나 끼었단 말입네다. 나는 우리 아버이 소느잡고 피란 나와서리 배를 타멘서 늘것쏘만 요맘 때며는 춘태바리, 그리고 나서 꽁치그물 손질해서 꽁치잡이를 했슴매. 여름이되며는 이까배를 탔지만 동삼에 하는 멩태바리 이상 돈벌이는 없었다이. 그 흔하던 멩태가 바이 쨉히지않은지 한참이나 되니 과연 페럽지비. 우리 고향 신포서는 멩태를 낚시로 잡는 벱이 없섯지비. 거저 그물 처서 와락 와락 퍼 올렸재이요. 속초에서 처음 멩태낚시 ‘쪼삣때’를 쓰멘서 가연 애자리 없어 웃엇슴매. 지금도 이북 아덜은 멩태잽이를 그물 가지고 할 게요. 어저는 이북 아아덜 배도 모자랐던지 중국 배덜까지 끄러디레 가지구서리 ‘쌍끄리’로 멩태를 잡아제친다 하니 남쪽 바다까지 그것덜이 당도하기 전에 거지반 다 잽히고 말 거시 뻔한 이리 아이겠소. 고성, 거진에서 해마다 동삼이면 멩태축젠가를 여는데, 그기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임매. 연극도 아이고 멩태가 없는데 허울뿐이지 실속이 바이없는 축제를 외지사람덜 모이게 하다니 낯 뜨겁지안쏘?
우리 하라바이덜 때에 멩태는 북에서 우리덜을 따라 왔던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슴매. 그 시절에 피난민 거렁뱅이덜이 그 멩태덕에 굶어 죽지 아이했지비. 요샛 사람덜이 몡태 함지가 먼지? 멩태 쪼삣대가 뭔지 바이 모르지만도 그 시절이 꿈만같습네다. 꾸벅 ……”
김 쪼삣대 아즈바이가 어떻게 말끝을 맺을지 몰라 어정쩡 하게 단상을 내려갔지만 박수 소리와 함성 소리는 여일하게 좌중을 흔들었다.
“이번에 모실 분은 가재미시케로 유명한 밤부득고개에 사는 다라이 아지미가 되겠습니다. 박수치오 짜 짜 짜 ……”
“내 이름이 있는데도 사람덜이 나르 다라이라고 하잼매. 뭐 그 말도 틀리는 말이 아이지비. 내가 지금 시케장사를 해서 큰도늘 벌기 전에는 자고새면 다라이를 이고 살았지비. 괘기장사 수십 년에 지금 장사 토대를 잡았스이까. 이 장사도 점점 어려버서리 ……
무엇보다 댕거지가루 값시 당해낼 도리가 없으이까디.
얼마 전에 ‘현대’라는 큰 회사가 유람선을 타고 금강산 구경을 가게 했을 때 우리 같은 사람덜이 얼매나 부애가 났언나 모르지비. 똑같은 바닷길인데 유람선은 가도 되고 정작 뱃사람 괘기잽이는 가면 안 된다니 앞뒤가 안 맞지 멈니까?
나이자신이덜 말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재이요? 배부른 사람덜 태운 유람선만 사람이고 어부는 사람도 아이란 말임매?”
앞자리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서며 “옳소, 옳소오, 모두 박수치오 짜짜짜.”
왁자지껄하는 가운데 관계기관의 높은 양반들이 하나둘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곧 정식 행사가 시작되려나 보다. 사회자의 칼칼한 목소리가 좌중의 웅성거림을 가라앉혔다.
속고 밴드가 팡빠레를 울렸다
“지금부터 30년 만에 열리게 된 ‘어업인의 날’ 기념행사를 거행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국기를 향해 서 주시기 바랍니다. ”
국민의례에 이어 어업인 희생자를 위한 묵념이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