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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수필] 둥지 외 1편 / 박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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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221회 작성일 20-12-18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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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




친정집은 빨간 벽돌에 지붕이 슬레이트다. 현관 앞에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있는데 좁은 처마 아래에 제비집이 네 개나 있다. 내가 어릴 때도 제비는 초가집 처마 밑에 집을 짓곤 했다. 제비는 해마다 새집을 지었다. 전에 지어진 둥지에서 새끼를 낳으면 될 텐데 힘들게 짚과 흙을 물어다 다시 짓곤 했다. 전에 지은 집에 둥지를 틀어도 그냥 들어가지 않고 고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봄이면 부화한 새끼 제비들이 지지배배 거리고 어미 제비는 곤충을 잡아다 새끼들의 입에 넣어 주느라 분주했다. 비 오는 날 마루에 앉아 제비집을 관찰하였는데 어미 제비는 새끼들에게 순서대로 먹이를 가져다 주었다. 새끼 제비는 어미가 올 때쯤 되면 입을 벌리고 서로 울기 시작하지만, 신기하게도 돌아가면서 입에 먹이를 넣어 주었다.


봄에 엄마와 3박 4일을 보냈다. 엄마는 제비 소리 듣는 것이 낙이라고 한다. 제비 소리가 들리면 안심이 된다는 거다. 난 제비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엄마는 제비가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라고 한다. 팔순이 넘는 엄마보다 내 귀가 더 밝을 것 같은데, 왜 나는 안 들리는 것일까?
어릴 때 우리 남매와 엄마의 모습이 제비의 모습과 겹친다. 엄마는 우리 남매를 키우던 그 시절을 떠올리는 거다. 엄마가 일 갔다 돌아오길 기다려 학비 달라고 조르던 우리가 그리운가 보다. 지금은 엄마 혼자 계시는 집이 싫은 거다. 가을이 되면 제비는 남쪽으로 날아가 버린다. 텅 빈 제비집을 보는 게 두려운가 보다. 언젠가 전화로 말씀하셨다.
“너희들 위해 돈 벌 때가 가장 행복한 날이더라. 따뜻한 사랑을 주지는 못했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먹이고 학교 보내야 해서 앞만 보면서 살았던 그때가 행복이었고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더라. 그때는 힘들었을 텐데, 돌이켜보니 그 시절이 그립다. 너도 지금 자식이 옆에 있을 때가 행복인 줄 알아라.”
엄마가 행복했던 시절은 우리를 위해 돈을 벌 때라니 놀랐다.
내가 고등학교 때였다. 엄마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늦게까지 일하고 체해서 두통에 시달리면서 퉁퉁 부은 얼굴로 공장 다닐 때였다. 고1 때 친구 집에서 단편 전집을 빌려 읽었는데 그중에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도 있었다. 김 첨지의 아내가 조밥을 먹고 체해서 약도 못 쓰다 죽었다는 내용이 엄마의 상황과 같았다. ‘엄마도 저러다 죽겠구나’ 싶었다.
그 당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학교였다. 학교 가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캄캄함을 느낄 때였는데도, 학교를 그만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오랜 세월 부모님을 원망했다. 학교 갈 때마다 차비를 못 주겠다는 엄마, 자식이 소풍 가는지, 졸업을 하는지, 한겨울에는 코트도 없이 학교를 다녀야 했는데도 춥겠다는 말 한 번 건네지 않는 부모가 싫었다.
결혼해서 십 년 동안, 내 마음에 엄마는 들어오지 않았다. 사랑을 모르는 엄마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친구들 엄마와 너무나 다른 엄마. 오로지 돈을 벌어 자식들 공부시켜야 한다는 엄마의 마음을 보기보다는 돈을 좋아한다고. 그런 엄마가 있어 우리가 살 수 있었는데. 그건 능력 없는 부모의 책임이 더 크다고. 엄마가 그립다거나, 혼자 계시는 엄마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가졌다. 자식이라는 의무감만이 있었다.
부모님은 내가 오빠와 남동생을 위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돈 벌기를 바랐다. 난 굽히지 않고 맞섰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자식 중 내가 가장 키우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나에게는 상처였다. 키우기 힘들었다는 말을 내가 소중한 자식이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지금의 엄마는 지난 시절을 종종 떠올린다.
“난 너희 키우면서 밥을 먹는지? 학교에 가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자식들 성격도 모르고, 자식들 키우는 재미를 느껴 본 적도 없고. 아침에 나갔다가 밤에 들어오면서 돈을 열심히 벌었는데 내 손에는 한 푼도 쥐어 본 적도 없고…….”
육 남매를 키우면서도 자식 키우는 기쁨을 느낀 적이 없다는 말씀이 아프다. 난 아들이 두 명이지만 그 아이들과의 추억 보따리를 밤새도록 풀어도 못 풀 텐데. 내게 가장 큰 선물은 아이들이고 기쁨이라고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는데. 목이 메서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아픈 목을 가다듬고 침을 삼키고 태연한 척한다.
“하루 두 끼 먹을 때도 있었지만 두 끼 먹었다고 우리 남매 아픈 사람 없잖아요.”
엄마를 위해 더 말해야 할 것 같다.
“엄마, 욕구 중에서 먹는 욕구가 일차적인 것인데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먹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대요. 그런데 난 먹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요. 왜 그럴까 생각했는데, 엄마는 가끔 생선이 많이 날 때면 생선을 자루로 사 와서 실컷 먹게 했잖아요. 양미리나, 도치, 오징어는 질리도록 먹었어요. 그래서 지금 먹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럼 아직도 채우지 못한 것이 공부니?”
“엄마, 아버지가 공부 못하게 한 응어리가 남아서가 아니라 지금은 공부를 그냥 취미로 해요.”
예전 같으면 공부 좀 작작하라고 했을 엄마가 아무 말 없다.
엄마의 말 중에서 무엇보다 자식 키우는 재미를 몰랐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엄마는 그랬다. 늘 일만 했다. 설악산 수학여행단 밥해 주러 갔을 때였다. 학비를 내지 못해 선생님 눈치를 보던 나는 이제는 학교 다니기 힘들다는 판단을 했다. 자율학습을 빠지고 엄마를 찾아갔다. 장화 신은 엄마의 모습. 보톡스가 없던 그 시절에 마치 보톡스 부작용으로 퉁퉁 부은 듯한 얼굴. 참담한 마음으로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려는데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곧 학비를 마련해 줄 테니 조금만 참으렴”. 난 살면서 엄마가 안쓰러울 때보다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는데 결혼하여 아이들을 키우면서 엄마가 우리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말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퉁퉁 부은 얼굴로 “곧 돈 마련해 주마 조금만 참으렴.”했던 엄마의 가장 큰 사랑과 희생을 떠올린다.
살면서 이 말이 내가 버틸 힘이 되었던 것 같다. 부모는 나에게 사랑은 주지 않았고 구박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의식에는 엄마의 큰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이 말을 떠올리면 목이 따갑도록 아프다. 중간에 태어나 내 학비 마련하느라 더 힘들었을 엄마다.
어미 제비가 새끼들이 독립할 때까지 벌레를 물어다 주듯이 엄마도 우리가 스스로 독립할 때까지 먹이고 공부시키느라 힘겨운 삶을 살았다는 것을 난 내 자식 키우며 알았다. 사람은 태어날 때 저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속에는 부모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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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라면?




작년 동 기간보다 혼인율이 20%나 줄었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만은 아닌 듯하다. 결혼을 해도 자녀를 낳지 않는 부부들이 늘고 있어 정부는 저출산 대책을 세우고 있는데, 혼인율까지 줄어들다니…….
내가 가르치는 중ㆍ고생들 대부분은 ‘결혼하지 않겠다’에 한 표다. 만약 결혼해도 아이는 낳지 않을 거라고. 고1 담임 선생님이 결혼 여부를 물은 적이 있는데, 한두 명만 결혼하겠다고 했다니, 무엇이 아이들의 인식을 바꾸었을까?
김해원 작가가 쓴 「가족입니까?」 수업을 할 때면, 가족과 결혼을 주제로 담화를 나눈다. 아내의 애완견으로 사는 것이 결혼의 목표라는 아이가 있었다. 처음에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능력 있는 아내를 만나서 사랑받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고 싶단다. 또 가정주부로 살면서 자녀 양육도 잘 할 수 있다고 하는 남자아이도 있었다.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양육도 하겠다는 구체적인 말을 들으며, 한 번쯤은 깊이 생각했구나 싶었다. 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남자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가사와 양육을 남자가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남자 요리사들이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고, <슈퍼맨이 돌아왔다> 프로그램은 아빠가 자녀를 돌본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접해서인지 성 역할의 변화가 낯설지 않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 결혼이나 출산을 거부하지 않을까?
한때 나도 독신을 주장했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을 처음 뱉은 게 초등학교 5학년쯤으로 기억한다. 결혼보다는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남매 중 가운데에서 성장하다 보니 소외감을 많이 느꼈다. 무엇보다 인정에 대한 욕구가 컸다. 공부에 매달리는 나에게 아버지는 결혼을 재촉했다. 강제로 선을 보게 하고 결혼을 준비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피할 수 없으면 배우자는 내가 선택하고 싶어서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지금은 ‘살면서 가장 잘한 선택이 결혼이다’고 말한다.
내 아이도 결혼보다는 일이 우선이다. 연구실에 여학생은 없느냐고 물으면 조직을 망칠 수 있어서 연애하면 안 된다고. 그럼 나는 말한다. 결혼은 안 해도 아이를 낳아 데리고 오면 키워주겠다고. 누구 인생 망칠 일 있느냐고 반박이다. 자신들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해야 하는 3포 세대에 살고 있다며 내가 현실성 없단다. 3포 세대를 넘어 N포 세대(포기해야 할 특정 숫자가 정해지지 않고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세대)에 살고 있다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사람들은 기성세대이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딛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보다는 절망을 안겨 주는 언어로, 시작도 못 하게 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래서 요즘은 방법을 바꾸었다.
“지금까지 내가 가장 잘한 선택은 결혼이고, 더 잘한 일은 너희들을 낳은 일이야.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지 않으면 그 집안은 희망이 없고, 망하는 집안이다. 너희들이 태어나서 더 열심히 살았고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고, 그러다 보니 저절로 빛이 우리 집에 들어오더라. 너희들이 있어 내가 잘 산다. 너희들 덕에 많은 일들이 술술 풀렸다.”라고 주저리주저리 말한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결혼하라고 하면 전보다는 심하게 거부하지 않는다.
지인들 자녀 결혼 소식을 들으면 부럽다. 손주가 태어났다고 하면 더 부럽다. 얼마 전, 친구 손녀 돌잔치였다. 친구 딸은 둘째를 낳겠다고 했다. 그런데 친구는 하나로 만족하란다. 자식 키우는 게 힘이 드니 그만 낳으라는 것이다. 친구 말이 지금 우리 사회 분위기이다.
정부는 11년 동안 저출산을 해소하려고 126조 원을 출산장려금이나 양육수당으로 사용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2019년 9월 3일 <내일신문> 양재찬 칼럼 ‘지금까지 이런 저출산 국가는 없었다’ 인용) 그렇다고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 아이가 자라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서툴고 부족한 엄마가 아이를 혼자 키우기는 쉽지 않다. 때로는 이웃의 도움으로. 부모, 형제, 친척들의 관심과 보살핌으로. 지인들의 애정이 깃든 말, 자존감 살려주는 선생님의 말, 거리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아직 공동체 문화이다. 이 문화를 잘 활용하여 분위기를 바꾸면 가능하지 않을까.
6월에 조카 아들 돌잔치가 있었다. 내가 고모할머니가 되었다.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어서 돌 반지를 들고 찾아갔다. 결혼할 때는 한 명만 낳기로 했다더니 더 낳을 거라는 기특한 말을 한다. 조카가 임신하여 걱정할 때, 난 시어머니께 들은 말을 그대로 했다.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 저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나더라. 존재 자체만으로 감사하게 여기고 지켜보기만 하면 잘 크더라. 부모의 욕심으로 키우지 않으면 잘 자랄 거야.”
시작도 전에 부정적이고 좌절감을 주는 언어를 쏟아내는 사회라면 누가 아이의 탄생을 축복으로 여기겠는가. 사회 분위기가 저출산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집 장만하는데, 아이 키우는데, 노후에 들어갈 돈이 얼마여야 한다는 수치들이 앞길을 막는 것은 아닌지.
말은 살아 있다. 뽑아도 밭을 덮는 바랭이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쑥쑥 자란다. 부정적인 말일수록 전파가 크다. 참된 어른이라면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희망의 언어가 우리 아이들의 인식을 바꾸어서 빨리 결혼도 하고 나에게 손주들을 안겨 주었으면 좋겠다.
결혼은 안중에도 없던 나에게 아버지는 내가 결혼하는 것이 소망이다고 했다. 그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이제는 내가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데, 난 아직 부족한 어른인가 보다. 우리 아이들은 내 말보다 사회 분위기에 더 영향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