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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수필] 부고 김일성 / 이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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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325회 작성일 20-12-18 15:43

본문

오래 살았습니다.

오래 산다는 것이

내 의지와 소망으로 되는 일 아니겠지만

살아 낸 세월이 그저 고맙고

살아갈 세월이 미리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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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訃告) 김일성




1994년 여름, 그날 우리 집 네 식구는 모두 집에 있었다.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과일을 깎을 때였다. 난데없이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가 마을 안을 들쑤셨다. 웬 사이렌? 늘 해오는 반공 연습이거니 했지만, 여느 때와는 다른 걸 알아챘다. 달력을 봤지만 반공 연습 날은 분명 아니었다. TV를 켰다. <김일성 사망>. 얼핏, 잘됐다 싶었다. 그런데 아빠는 금세 얼굴이 굳어지며, “이 일이 결코 좋아할 문제만은 아니다” 하였다. 경보 사이렌은 계속 울리고 아나운서는 격양된 목소리로 대국민 보도를 하는 것이다.
‘국민 여러분들은 자기 자리를 지켜 달라. 절대 동요하지 말 것’
총 칼로 눌러 온 독재정권, 독재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북한 당국의 내분과 소요로 말미암아 섣부른 판단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결과까지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아빠의 판단이다. 통일을 갈망하지만 이런 식 통일은 막대한 희생과 더 나아가 전쟁의 발발로 번질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몇 해 전의 일이 생각났다. 우리가 서울 정릉 3동 집에 살고 있을 때 일이다. 여름 방학 중이라서 작은아들과 막내딸 그리고 나까지 셋이서 집 그늘에 자리를 깔고 숙제, 책 읽기, 바느질을 하던 날이었다. 그날도 난데없이 공습경보에 라디오를 틀었다.
‘중공군 비행기 한 대가 남한 땅 ○○곳에 내려앉았다.’


일단은 ‘불시착’이라 했지만 당국에선 그리 간단한 사안으로 보지 않았다. 진짜로 기체 이상이나 기상 이변으로 불시착한 건지, 아니면 불시착을 가장한 정찰 비행 중이었는지? 첩보 아니면 민심 교란 목적이 있었는지? 그때도 라디오에선 격양된 아나운서 멘트가 반복적으로 들렸다.
‘중공군기 한 대가 우리나라 ○○ 지역에 착륙, 모든 국민은 동요하지 말고 각자의 자리에서 다음 보도를 따라 행동해 주길……’
‘앗! 또 전쟁?’ 나는 순간 아찔,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약간 현기증을 일으켜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눈을 감았다.
“엄마 왜 그래?”
초등학교 2학년 막내가 내게 다가왔다.
“엄마 또 아파?”
중학 2년생 작은아들도 다가와 내 허리를 싸안았다. 그 순간 아이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그 짧은 순간에 내 눈앞에는 6.25 전쟁통에 보았던 온갖 잔혹함이 두서없이 뒤섞여 아른거렸다.
나는 6.25 전쟁을 함경남도 흥남시 서호진과 홍원에서 겪었다. 나는 그런대로 세상을 이만큼은 살았다. 이제 죽는다 한들 별일이 있겠냐마는, 이 어린 것들을 어찌하면 좋겠나? 피난을 간다한들 지금의 전쟁은 그 옛날의 전쟁과는 양상이 다를 것이니 어딘들 피난처가 되겠으며 어떤 수단으로 옮겨 다닐 수 있으랴?
남편은 직장에 가 있었다. 전화는 연신 통화 중이었다. 하긴 통화가 된다 한들, 전시 하에 공직자가 제 식솔을 건사할 수가 있었던가? 해 질 녘에 가서야 비상경보 해지 사이렌이 울렸다. 라디오 방송에서 중공 비행기는 ‘불시착’이 분명해서 본국으로 무사히 송환시킨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소련과 중국은 북한과 우리의 적국이었다. ‘냉전 시대’라고 말했다. 적국의 비행기를 송환시키던 날, 나는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저녁에 가족들이 다 모였을 때 나는 비장한 어투로 한 이야기했다.
“전쟁이 터지면 큰오빠는 사관생도니까 제일 먼저 참절할 것이고 ‘숙’이는 다 큰 처녀라서 제일 걱정된다. 그러니 어디서건 집에 올 생각 말고 ‘현지입대’ 하도록 해라. 전시 하에는 군인만이 신변보장이 가능하다. 애들은 내가 맡으마. 그리고 끝으로 꼭 명심할 것이 있다. 전쟁이 끝나고 흩어진 가족을 만나는 방법은 부산 영도다리에서 가장 가까운 ‘다방’에서 만나자. 쪽지를 남기거나 하루 두서너 차례 들리는 거나.”
그날 이후 나는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어떤 형태로든 금붙이를 몸에 지니고 살도록 나눠 주었다. 비상시 생명줄이 될 마지막 수단으로 생각했기에 꽤 오랜 기간 그렇게 했었다.


김일성 부고가 전해지던 날, 나는 어린 두 아이들과 전시 하에 살아갈 제반사를 골똘히 짚어보기로 했다. 메모지와 펜을 들고 탁자에 앉았다. 일단 우리 건물 지하 보일러실에 거처를 잡고 있다가 상황에 따라 어디로든 이동할 셈이었다. 바닥에 매트리스를 두툼하게 깔고 이부자리를 옮겨놓고, 지금은 여름이지만 두꺼운 옷 한두 벌씩은 예비로 챙길 것. 먹을거리가 제일 큰 문제다. 연기가 새 나가선 안 되니까 탁자용 프로판 가스레인지와 휴대용 가스 한두 박스, 물통은 되도록 많이 확보하고, 북한산 약수를 가득 채울 것, 약수는 수돗물보다 오래 두어도 썩지 않는다. 끓이지 않고 먹을 수 있으려면 햄 통조림 같은 가공식품, 건빵, 미숫가루, 과일은 잘 썩지 않은 사과 아니면 그것도 통조림 과일로 한다. 용변은? 거기에 가서 막혔다. 요강을? 아님 기저귀?
정신없이 써 내려가다 돌아보니 아빠는 어느새 거실에 없었다. 언제 자리를 뜬 걸까? 우리들이 빼고 더하고를 계속하느라 정신이 팔린 틈에 아빠가 어디로 사라진 것이다. 우리의 리스트는 계속해 나갔다. 방독면은 어느 회사 제품으로, 누가 사러 갈 것인가?
어느덧 어둑해졌다. 사위는 조용했다. 아무런 소요가 없는 마을 길엔 종종걸음으로 보퉁이를 들고 걷는 아낙네가 가끔 보일 뿐이다. 그런데 이 양반은 말도 않고 어딜 갔길래 저녁밥 생각도 없나? 시장하지도 않나?
우리의 궁금증은 더해졌다.
안방에서 낮잠을? 뜰에서 정원수를 다듬을까? 큰길까지 비질을 하고 있을까? 그새 물통을 챙겨 북한산 약수터로 올라간 걸까?
아무 데도 아이들 아빠의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실내에 전등을 밝히고도 한참 뒤에 아빠가 현관 안에 들어섰다. 거렁뱅이였다. 온몸에, 얼굴과 모자에 온통 숯 검댕이며 하얀 페인트가 함부로 튀고 묻고 말라붙었다. 한 손엔 깡통, 다른 손엔 페인트 붓을 들고 있었다. 곧 쓰러질 듯 휑한 눈과 다리 휘청거림을 우리는 보았다.
“아빠 이게 뭐에요오?”
“응, 지하실에 있었어. 다 해놨어.”
얼마 전 우리 집 지하실 기름보일러가 고장 나서 벽이 온통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아빠는 ‘김일성 부고’가 마치 ‘대남선전포고’인 양 대비책을 재빨리 하는 것이었다. 여차하면 가솔을 우선 지하실에 안전히 피신시키고 다음 횡보를 결정할 마음이었다. 아무 조력자도 없이, 혼자서 소리 소문없이 왼 종일 페인팅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아빠도 참, 그깟 지하실이 뭐 그리 피난처가 될 거라고.”
아이들은 한심하다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눈물겨운 가족 사랑이다. 진저리쳐지는 전쟁의 망령이 살아난 것이다. 아빠는 충분히 그리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당신은 17세 어린 나이에 졸지에 부모와 이별, ‘인민군학도병’으로 전장에 내몰렸다가 평양전투에서 낙오됐다. 국군 포로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다시금 대한민국 국군으로 현지 입대하였고 인제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 대한민국 중사로 제대한 후 갈 곳 없는 고아로 10여 년간 춥고 배고픈 세월을 살아냈다.
아빠에게 전쟁 트라우마가 깊이 각인 되어 있다는 것을 살면서 곳곳에서 알 수 있었다. 평생 돈벌이를 쉬지 않았다. 벌어들이기만 할 뿐 당신만을 위한 일에는 한 푼도 못 쓴다. 옷은 누가 사 입히기 전엔 팬티 한 장 양말 한 켤레도 제 손으로 사 온 일이 없었다. 좋은 옷은 꽁꽁 묶어서 높은 선반에 올려 놓고 허름한 것들을 주로 입는다. 심하면 내가 빨래 바구니에 담긴 것을 버려 없앴다. 버렸다는 말에 화를 낸다. 때론 남사스럽다.
“나랑 같이 외출할 때는 그렇게 옷 입고 나서지 말아요. 당신의 매무새가 나의 자존심이란 것 몰라요?”
내가 핀잔을 주면 그때 뿐이다. ‘만약에’란 그 막연한 불행의 날들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남편을 가두고 있는 그 ‘만약’이란 올무는 전쟁이 아니어도 ‘가족 중 누가 아프면, 애들 커가며 늘어나는 학비를 못 챙기면, 당신이 사고로 더 이상 일을 못 하게 된다면…….’ 그런 일상의 것들이다. 그러다 보니 아빠는 늘 자기를 가난 속에 가두고 산다. 이젠 좀 그 불안증에서 벗어나도 되련만 못 그런다. 항상 가난이 겁나는 남자, 평생 전쟁의 망령에 사로잡혀 사는 남자, 허연 머리카락이 성긴 이 나이에도 그의 통장과 현실 생활엔 괴리가 크다. 그렇다고 그 돈이 모두 고스란히 쌓인 것도 아닌 것이 아내의 투병생활은 지금도 끊임없이 병원에 목돈을 갖다 바치기 때문이다. 노인이란 특권이 있어서 이제는 어디든 공짜로 입장이다. 밥도 무료급식, 이발도 자원봉사의 손에서, 목욕 역시 시에서 운영하는 논공단지 내의 목욕탕에서 무료다. 돈 쓸 곳이 퍽 줄었지만, 당신 사후에 남겨질, 병약한 아내의 남은 생을 염려해서 또 못 쓴다고……
김정은 부고는 어떤 모양으로 전해올까? 국가의 비상사태가 터질 때마다 우리 가족은 언제나 <현지 입대, 부산 영도다리 근처 다방에서의 재회>를 상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