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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수필]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유 외 1편 / 권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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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278회 작성일 20-12-1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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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의 바다와 설악산 그리고 영랑 호수가 내 작품 노트다. 그 무한정한 노트에 글 쓰는 자유를 만끽하다가 조선의 여류시인 이옥봉과 허난설헌을 생각하면 명치 끝이 아려온다.

수채화를 그려 놓은 듯한 가을 아침이다. 항상 이맘 때면 습관처럼 '솔베이지의 노래'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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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수 있다는 자유



글을 쓴다는 것은 내밀한 자기와의 만남이다. 그 작업은 창작의 고통이라고 하지만 마음 안에 고여 있는 정화된 물을 끌어 올리는 작업이며 자신을 수양하게 하는 일이다. 살면서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 나는 글을 쓰는 순간만은 다른 일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한테 몰입이 되어 그 희열을 즐기고 있다.
원고를 청탁받았거나 영감이 떠올라 글을 쓰고자 할 때 어디서부터 내 마음을 풀어 놓을까 하고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러다가 베란다 티 테이블에 앉아서 도로변 풍경과 멀리 바다를 내다보며 노트북을 열고 글의 실타래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이십여 년 전 나의 간절한 소원은 글을 쓸 수 있는 공간과 내 책상이 하나 있는 것이 소원이었다. 스무 평이 조금 넘는 아파트에서 중고등 세 아이들의 책상이나 컴퓨터 둘 곳도 부족한데 나를 위해 글 쓰는 방 하나 갖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그저 식구들이 나가면 식탁이 유일하게 내 글 쓰는 장소가 되곤 했다. 지금은 시간도 있고 글을 쓸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졌는데도 가끔은 서성일 때가 있다.
나는 20여 년 전 서울에서 속초로 이사를 왔다. 그때만 해도 사계절 펼쳐지는 속초의 자연 풍광이 거대한 아이맥스 영화관처럼 느껴졌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동해바다와 설악산 그리고 영랑호수, 속초 사람들 살아가는 얘기가 모두 내 작품 노트가 되었다. 내 문학의 갈증을 채워 주는 그 작품 노트는 무한정하여 써도 써도 채워지질 않았다. 즉 서울에서 누리지 못했던 창작의 자유를 만끽하였다. 혈육도 친구도 없는 객지지만 외롭지 않았다.
그러다가 속초 설악문우회 <갈뫼> 모임을 비롯하여 강원도 여러 문인들을 만나 활동 영역을 넓혀가며 여러 동인지에 작품 발표를 하며 20여 년 글을 썼다.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무한정의 자연과 에너지를 제공해 주는 강원도와 속초에 감사드리는 마음이다. 오늘도 영감(靈感)을 찾아 눈이 시리도록 펼쳐져 있는 자연 풍광에 눈길을 주며 창작의 자유를 마음껏 즐기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남존여비 유교 사상에 젖어 있던 조선 중기 때 비운의 여류 시인 이옥봉과 허난설헌이 생각이 났다. 옥천군수 이봉의 서녀였던 이옥봉은 아버지한테 어릴 적부터 글을 배워 글쓰기를 좋아했다. 선조 때 승지 조원을 사랑하여 그의 소실로 들어갔다. 조원은 그녀한테 詩는 절대 지으면 안 된다고 약조를 한 후 옥봉을 소실로 받아들였으며 결국 그녀는 詩를 버렸다. 핏속에 들끓고 있는 시혼(詩魂)을 그녀는 얼마나 억제하기가 힘들었을까. 글을 쓰고 싶은 사람한테 글을 못 쓰게 하는 것은 형벌이나 다름없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소도둑으로 몰려 억울한 일을 당한 백정을 위해 옥봉이 관아에 올리는 글을 대신 써 주어 백정이 누명을 벗게 되었다. 그런 필화사건 때문에 남편은 옥봉이 자기와 약속을 어기었다는 이유로 아내인 옥봉을 내쳤다. 그 후 옥봉은 병이 들어 뚝섬에 초막을 짓고 남편을 그리워하는 통곡의 시를 수없이 썼다지만 그는 끝내 이옥봉을 불러 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쓴 시를 몸에 감고 기름종이와 노끈으로 몸을 묶은 채 바다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다. 훗날 명나라에서 바다에 떠다니는 옥봉의 시신을 건졌다. 몸에 두른 종이에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글이 명나라의 사신으로 간 조원의 전처 아들 조희원한테 전해져서 조선의 이옥봉인 줄 알았으며 시가 좋아 명나라에서 문집으로 엮었다고 한다.
아무리 남존여비 봉건사회라고 하지만 여자에게 글을 못 쓰게 하고 글을 썼다는 이유로 쫓아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시대에 저항하듯 결국 자신의 시를 몸에 감고 천 길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분명 여성에 대한 모독이며 인격 유린이다. 소름이 끼친다. 남편을 그리워하며 절절히 쓴 그녀의 시가 생각났다.


요사이 안부 묻사오니 어떠하신지요 / 창문에 달 비치니 / 이 몸의 한은 끝이 없사옵니다 / 제 꿈의 혼이 발자취를 낸다면 / 임의 문 앞의 돌길은 모래가 되었으리(近來安否問如何 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 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 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半成沙 문전석로반성사)
―「몽혼(夢魂)」


또한 조선 중기 허난설헌은 어떠했는가. 어릴 때부터 문장가 허엽의 딸로 아버지한테 글을 배워 글 쓰는데 재능이 탁월했다. 하지만 결혼 후 글에 재능 있는 며느리를 싫어했던 시어머니와 고부 갈등이 있었고 남편 김성립도 그런 아내가 탐탁지 않아 바깥으로 돌았다. 아버지와 오라버니 그리고 두 아이를 잃은 고통과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한(恨)을 시로 지으며 견뎌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시를 이미 3년 전에 써 놓았다. 그녀는 「유선사(遊仙詞)」 87수를 썼듯이 늘 그리워하던 천상의 세계로 27세에 갔다. 유언으로 자신의 시 200여 편을 불태우라고 했다. 그러나 동생 허균이 평소에 외우고 있던 난설헌의 시를 명나라 주지번한테 보내어 중국에서 허난설헌 문집이 발간이 되었다고 전한다. 죽음을 예견한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시를 읽으면 가슴이 저린다.


푸른 바다가 구슬 바다를 적시고 / 푸른 난새는 오색 난새에 기대었어요 ./부용 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 서리 위에 비친 달빛은 차갑기만 해요.(碧海侵瑤海 靑鸞依彩鸞 벽해침요해 청난의채난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부용삼구타 홍타월상한)


이옥봉과 허난설헌은 글에 대한 재능이 뛰어난 예인(藝人)이었지만 시댁과 남편한테 재능을 인정을 받지 못한채 한(恨) 많은 삶을 살았다. 옥봉은 몸에 詩를 감고 바다에 뛰어들었고 난설헌은 자신의 詩를 불태우라고 유언하며 생을 마감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중국 명나라에서 훌륭한 詩로 인정받아 그들의 최초 시집(詩集)이 중국에서 발간이 되었다. 천재적인 여류 시인들이 남존여비 봉건사회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해 재능을 마음껏 뽐내지도 못하고 불행한 삶을 마감했다. 여자라서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존엄성마저 박탈되었음은 조선 중기 문학사에도 큰 손실이다. 오늘날 같은 20세기에 태어났으면 마음껏 문학적 기량을 펼치며 좋은 글을 많이 썼을 것이다. 안타깝다.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悲運)의 두 여류 시인을 생각하며 창밖 먼바다를 바라본다.
통곡으로 시를 짓다가 시를 몸에 감고 천 길 바닷속에 뛰어든 옥봉이나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한 많은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며 자신의 시를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긴 난설헌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그들은 죽음으로 남존여비 봉건사회에 도전하며 항의를 했다. 두 여류 시인 옥봉의 예술혼은 마르지 않는 푸른 바닷물이 되어 출렁이고 허난설헌의 예술혼은 꺼지지 않은 불꽃이 되어 후대 여성 문인들 가슴에 빛이 되어 영원히 세상을 밝힐 것이다.
이옥봉과 허난설헌이 살았던 그 시대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 얼마나 호사를 누리며 글을 쓰고 있는가. 객지에서 공부하고 있는 딸이 한 번씩 집에 오면 노트북을 가지고 공부하러 카페에 간다며 나선다. 집이 도서관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왜 하필 시끄러운 카페로 가냐고 나무랐다. 그랬더니 딸이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공부하면 집중이 잘 된다고 했다. 요즘 카페에서 공부하는 족속들이라는 뜻에서 ‘카공족’이라는 신조어 생겼다고 했다. 이젠 나도 그들 모습에 익숙해져 있다. 글을 쓰고 공부하는 환경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무한한 자유로운 공간이다.
또한 현대사회는 얼마나 글쓰기가 좋은가. 가정마다 컴퓨터가 있어 필요한 자료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며 바로 자료를 전송하거나 복사할 수 있으니 말이다. 누구나 언제라도 쓰고 싶은 글은 무한정 쓸 수 있고 책도 출간할 수 있다. 이옥봉과 허난설헌이 살았던 그 시대에 비하면 감히 상상도 못 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오늘 청탁 온 원고를 노트북에 옮겨 쓰며 현대문명에 감사하고 아이맥스 영화가 돌아가듯 사계절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속초에서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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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 노래>, 그 눈부신 기다림



시선 닿는 곳마다 단풍으로 물든 벚나무들이 물그림자 되어 호숫가에 일렁이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이 그리워지는 가을 아침이다.
영랑 호수를 바라보며 노르웨이 소프라노 성악가가 부르는 시셀 슈사바의 <솔베이지의 노래>를 유튜브로 듣고 있다. 지난해 가을 그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KBS 아침마당에 출연하여 불렀던 노래이다. 초록 드레스를 입은 키 큰 금발의 미녀가 부른 이 노래는 부드럽고 애잔하여 심장을 파고든다. 페르퀸트 모음곡 24곡 중 제 2모음곡 마지막 곡이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소진되었던 세상의 모든 그리움이 불씨처럼 되살아나곤 한다. 저만치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청남 빛 영랑 호수가 마치 북유럽 노르웨이 어느 한적한 호수로 연상 되어진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나는 습관적으로 이 음악에 빠져들게 된다.
「페르퀸트」는 노르웨이 소설가 헨리크 입센이 설화를 소재로 쓴 희곡 제목이며 극 중 주인공 이름이다. 시극(詩劇) 「페르퀸트」에 삽입이 된 <솔베이지의 노래>는 입센의 부탁을 받고 북극의 쇼팽이라 불리는 그리그가 31살 때 작곡한 음악이다. <솔베이지의 노래>는 페르퀸트 모음 곡 전 24곡 중 제 2모음곡의 마지막 곡이다. 제4막에서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세월은 흘러도 언젠가는 당신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으며 아내 솔베이지는 평생 물레를 자으며 기다린다. 늙고 병든 초라한 모습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며 백발의 여인 솔베이지가 부른 노래가 <솔베이지의 노래>이다.
내가 맨 처음 이 노래를 접하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음악 시간이다. 예순이 넘은 음악 선생님께서 피아노를 치시며 이 노래를 가르쳐 주실 때 사춘기 소녀의 가슴에 전율이 일었다. 그때 이후 나는 페르퀸트 모음곡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단체로 관람한 <송 오브 노르웨이(Song of Norway)>뮤지컬영화다. 페르퀸트 모음곡을 작곡한 노르웨이 출신 그리그의 일생을 영화로 제작했다. 50년 전 영화라서 그런지 스토리보다는 그리그의 음악을 배경으로 한 노르웨이의 수채화 같은 호수와 밀림이 기억에 남아 아직 동영상처럼 가슴에 흐르고 있다. 울창하던 침엽수와 얼어 있던 빙하가 폭포로 녹아내리던 풍경은 잊을 수가 없다. 영화에서 그리그의 수많은 음악이 삽입이 되었지만 페르퀸트 모음곡 중 <솔베이지 노래>는 정말 환상적이었으며 캄캄한 영화관에서 음악과 영상에 푸욱 빠져들게 했다. 설악산과 영랑 호수가 단풍빛으로 물들어가는 가을 아침에 듣는 시셀 슈사바의 <솔베이지 노래>가 사춘기 때 들었던 것보다 이만치 세월이 흘러 희로애락을 경험한 후 감상을 하니 가사와 곡이 더 절절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1977년도에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관람한 연극 <페르퀸트> 또한 잊을 수가 없다. 입체적인 시설을 갖춘 국립극장 원탁 무대에 갖가지 조명을 비추며 노르웨이의 아름다운 풍광을 재현하였다. 연극의 줄거리는 입센의 원작에 충실한 내용으로 연극인 이호재가 남자 주인공 페르퀸트 역을 맡았다. 페르퀸트가 집을 떠나 배를 타고 세계를 유랑하며 방랑 생활을 할 때 물레를 자으며 백발이 될 때까지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솔베이지의 얘기이다. 극 속 주인공들이 페르퀸트와 솔베이지 대역에 몰입하여 열연을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그 무렵 결혼은 안 했지만 남자는 사랑보다는 세상을 손에 넣으려 꿈꾸고 여자는 한 남자의 사랑이 인생 전부이고 우주임을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통나무집 아내 곁으로 돌아온 페르퀸트는 솔베이지의 무릎을 베고 <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으며 편안히 죽음을 맞이한다. “당신은 너무 피곤해 보이는군요. 이제 푹 쉬세요.” 지금껏 그래왔듯이 하며 그녀는 노래를 불러 준다. 주인공 이호재 연극인은 50년 연극 생활에서 다시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페르퀸트라고 했듯이 실제 인물과 극 속의 인물이 일치된 느낌이었다.
일전에 중앙일보 유권하 기자가 쓴 실화 소설 『레나테』를 읽었다. 2007년에 한국을 방문했던 독일 여인 레나테 홍에 관한 얘기가 토픽 뉴스로 보도된 적이 있다. 1955년 그 당시 여대생이었던 그녀는 북한 유학생 홍옥근을 사랑하게 되고 둘은 학교를 마친 후 결혼하였다. 그 후 일 년 살다가 1961년 남편이 북한으로 소환되었으며 한 살 된 아들과 배 속에 애기가 있었다. 독일을 떠난 후 남편의 편지도 끊어졌으며 아들 둘을 키우며 ‘내가 살아 있는 건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하며 47년 동안 남편과의 재회를 꿈꾸며 그녀는 살아왔다. 그러다가 2007년 한국 방문 시에 금강산 구룡폭포에 올라 남편이 있는 곳이 20km도 안 되는 북쪽 함흥임을 알고 그쪽을 바라보며 울었다고 한다. 한국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던 2008년에 독일 정부와 유엔의 협조로 성인이 된 두 아들과 함께 그녀는 평양에 가서 꿈에도 그리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47년 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일흔이 된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한 남자만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며 기다려온 세월이다.
레나테 홍은 유학생 홍옥근과 결혼하여 일 년만 살다가 운명적으로 헤어진 남편 페르퀸트를 47년이 지나서야 백발의 노인 솔베이지가 되어 만난 것이다. 평생을 기다림으로 살아온 레나테 홍의 삶이 입센의 희곡 「페르퀸트」의 여주인공 솔베이지와 닮았다. 다만 공산 체제와 이념의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은 독일과 북한에서 긴 세월을 이산가족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십여 년 전 뉴스로도 봤지만 이들 상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도와주었던 유권하 기자가 쓴 실화 소설 『레나테』를 읽은 후 가슴이 먹먹해 왔다. 레나테 홍은 공산체재 하에 정치적인 이념으로 굳게 잠긴 문빗장을 사랑이라는 이름의 열쇠로 열었다. 평생 한 남자만을 위해 47년을 기다려온 순애보적인 사랑이 단지 일주일 만남으로 끝난다. 평양 공항에서 두 부부와 아들이 눈물로 헤어지는 장면을 읽다가 나는 그만 책을 덮고 눈을 감은 채 저린 가슴을 진정시켰다. 2015년 우리나라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시에도 결혼 일 년 만에 남과 북으로 헤어졌던 부부가 65년 만에 극적으로 상봉하는 가슴 아픈 사연도 있지 않았는가.
사춘기 시절 음악 시간에 이 노래를 처음 접한 후 영화 와 연극을 관람하고 실화 소설 『레나테』를 읽은 후 <솔베이지의 노래>가 꾸준히 내 몸속에서 피돌기를 하고 있다. 시셀 슈사바의 비단결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반복해서 듣고 있노라면 침엽수 우거진 북극 노르웨이 청남 빛 호수가 내 눈 앞에 펼쳐진다. 그러다가 단풍으로 물든 속초의 가을 아침을 그녀가 서서히 들어 올리고 있다.
<솔베이지의 노래> 그 눈부신 기다림에 젖어 있노라면 문득 미당 서정주 시인의 픽션 산문시 중 「신부(新婦)」가 생각이 났다. 결혼 첫날 밤 아내를 버리고 떠난 신랑 페르퀸트를 기다리다가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린 신부 솔베이지의 가슴 시린 이야기다. 결국 삶에 있어 화두(話頭)는 기다림이 아닌가 싶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 시인의 시 「신부(新婦)」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