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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수필] 김치에 대한 소고 / 노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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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287회 작성일 20-12-1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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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중부지역 장마일 수는 54일!

그동안의 기록을 갈아치웠습니다.

여름의 끝자락 기록적인 태풍으로

모두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또한 <코로나 19>라는 자연의 재앙 속에서

우리의 일상은 고통과 함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을 기록합니다.

여러 일들이 많았던 2020년,

『갈뫼』 제50호가 모두의 지친 마음을 달래 주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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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에 대한 소고



90년대 초, 근무지 가까운 곳에 메밀국수 집이 있었다. 시원한 국물과 함께 알맞게 익은 동치미 맛에 푹 빠져 자주 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부터 수육과 함께 나오는 백김치를 메뉴에 따로 올려 오천 원을 받고 파는 것이다.
“아니, 김치를 돈을 받고 팔다니!”
그때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손님은 많아지고 김치를 수육보다 더 많이 찾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서운함을 누른 적이 있다.
그 후, 금강산 여행이 중단되던 해 금강산으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공연을 보면서 저녁을 먹는 만찬장에서 김치를 더 주문하면 돈을 요구했던 기억이 있다. 김치 인심이 박하다며 모두들 한소리씩 했지만 북한과 우리의 문화 차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했던 적도 있다. 수 년 전 일이긴 하지만 김칫값을 따로 치르면서 들던 생각이 요즘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왜냐하면 지금도 시골 김장 풍경은 서로 품앗이를 하고, 수고했다고 나누고, 맛보라고 나누는 정으로 마무리가 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신문 칼럼을 쓰는 한 셰프의 김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규모가 크지 않는 양식당을 운영하는데, 한식 메뉴를 추가하면서 김치가격을 따로 정해 팔았다고 한다. 양식당의 경우 피클이 김치를 대신하고 있는데 김치를 따로 요구하는 경우, 그 돈을 받아서 김치의 질을 높인다는 취지였지만 손님들의 반응은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그 셰프는 나름의 철학으로 새로운 도전을 한 것이다.
사실 김치를 담그다 보면 주재료보다 양념 가격이 만만치 않아 김치 한 보시기에 들어가는 재료의 값을 따지기 참 어려운 일이다. 물론 음식값에 김칫값이 포함되어 있겠지만 요즘은 별미 김치도 많아, 김치를 담그는데 드는 재료비뿐만 아니라 노력과 시간, 그리고 좋은 손맛이 더해져야 하니 그를 탓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나는 20대 초반에 직장 생활을 하면서 경제 독립을 하였다. 출퇴근이 불편한 관계로 주거 독립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혼자다 보니 끼니를 간단히 해결하곤 하였다. 김치 맛을 잘 몰랐기 때문에 누가 주면 얻어먹거나 다른 밑반찬으로 대신해도 불편한 것을 몰랐다. 그러다 김치 독립을 하게 된 것은 결혼을 하면서부터였다.
지금은 인터넷을 열면 온갖 김치는 물론 김치 담그는 동영상까지 나오니 얼마나 편한 세상인가. 김치를 담아 보겠다는 어설픈 실험정신으로 쓰거나, 짜거나 아니면 싱거워 색이 변하던 나의 김치들. 친정이나 시댁에서 김치를 받아서 먹는 친구들이 부러운 때가 많았다. 나는 해 줄 어른들이 안 계셨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이웃에 고마운 어른이 계셨는데 아무것도 모르던 나를 위해, 배추 절이는 일부터 김치 담그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후 형님댁과 함께 우리 먹을 양을 조금씩 해서 뒤뜰에 묻어 놓고 겨울을 나곤 했다. 지금이야 김치냉장고가 있어 편리해지긴 했지만 힘든 만큼 땅에 묻었던 김장 김치의 맛은 그 어떤 김치와도 비교할 수 없이 깊은 맛이 있었다.


김치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엄마의 김치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어리다는 핑계로 도와드릴 생각도 안 했던 때. 하지만 시원한 물을 바꿔가면서 담가 두었던 계절 김치, 뒤뜰에 묻어 두었던 김장 김치, 겨우내 먹던 동치미가 새삼 그립다. 김치의 종류도 많아 김장 김치 사이에 넣었던 오징어와 명태 김치, 밥 식해, 월동추 김치, 양배추 김치, 오이 김치 등 텃밭에서 나온 재료들을 이용해 밥상에 올렸던 무공해 음식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김치는 지금까지도 담가 먹는 우리집 1호 명태 김치다.
그러나 내 건강이 나빠지면서 김치 담그는 일이 힘들어졌다. 덕분에 매년 우리 집에는 김장 축제가 벌어진다. 원거리에 있는 언니, 동생, 조카들까지 모두 모여 김장을 담그는데 힘든 내색 없이 마음을 보태고 그동안 밀린 가족사와 민감한 정치 이야기에 열변을 토하면서 사흘 동안 동거 아닌 동거를 한다. 해마다 같은 사람들이 모여 김장을 하지만 김치 맛은 해마다 다르다. 지역마다 손에 익은 김치 요리법이 달라서이기도 하겠지만 직접 농사를 지어 담그는 김장이라 재료의 크기는 물론 수확 품질에 따라 맛도 달라지는 듯하다. 하지만 메모해둔 양념의 양은 크게 소용이 없고 손맛과 입맛으로 어우러지는 우리 집 김치, 서로라는 울타리 안에서 추억 쌓기를 하는 우리 집 김장 김치는 정이 덤으로 더해져서 해마다 최고의 김치가 된다.


다행히 우리는 집과 가까운 곳에 시골집 텃밭이 있는데 이곳이 남편의 두 번째 직장이다. 나와는 달리 아침형이라 출근 전이나 휴무일은 이곳에서 거의 살다시피 한다. 여름 채소들을 심고 여름걷이가 끝나면 배추와 무, 쪽파를 심는다. 9월 중순 월동추를 파종해 두면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이른 봄을 알리는 초록빛 세상을 만든다. 봄이면 쪽파와 월동추로 김치를 담고, 초여름이 되면 오이와 열무로 김치를 담근다. 말없이 인간을 위해 자라주는 채소들. 그렇게 봄 여름을 보내다 보면 겨울이 되는, 말없이 순환하며 수확을 건네는 자연이 나는 고맙다.


이곳은 지역 특성상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양간지풍이 분다. 봄의 큰바람과, 여름의 끝에 세 번이나 큰 태풍이 왔다. 강은 범람하고 나무가 꺾이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하지만 그 험한 비바람을 이겨내면서 살아남은 곡식들, 그 모습을 보면서 삶의 지혜도 많이 배운다. 황토물을 뒤집어쓴 채 황금빛으로 물드는 벌판과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의 모습. 어느 보석이 저렇게 아름다울까? 이렇게 자연이 주는 선물들을 가지고 김치를 담그니 김치의 맛에 빠지는지도 모른다. 김치 양념이 조금 부족해도 스스로 맛을 찾아가는 발효의 힘, 그리고 땅의 힘, 그 힘들이 바탕이 되어 이제 내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


요즘 TV 홈쇼핑을 보다 보면 온갖 김치들이 다 나온다. 장인들이 담가서인지 솜씨도 물론 좋다. 바쁘게 사는 세상이라 사회 환원 차원에서도 사 먹는 방법도 좋은 방법이 되겠지만 배추가 그 자리에서 김치가 되는 법은 없다. 정성 들여 담가 놓으면 스스로 어우러져 맛의 길을 찾아가는 김치처럼 우리도 서로 어우러지고 보듬으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의 숲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