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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수필] 창간호 표지 이야기 / 강호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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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478회 작성일 20-12-1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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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 표지 이야기



1969년 초 겨울이었을 게다. 작고한 이성선, 최명길 시인과 필자를 포함한 세 사람이 지금은 속초의 이면 도로가 된 철둑길을 따라 초저녁 밤길을 걷고 있었다. 밤길이 별로 어둡지 않았던 것은 짙은 청색 하늘에 달이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멀리 바라다보이는 연근해 동해바다에는 오징어잡이 배들이 아야진, 거진, 대진에서부터 남으로는 주문진까지 대낮처럼 불야성 같은 불을 밝히고 조업하는 것이 보였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농촌지도소에서 일하는 이성선 시인의 매형댁이었다. 당시 이 시인은 고성 쪽의 동광농고에, 최명길 시인은 영랑초등학교에, 필자는 속초기상대에 재직하고 있었다. 이 시인이 댓돌로 올라가 작은 방문을 열었고 인기척을 느낀 이 시인의 누나가 안방 문을 열고 내다보고는 동생임을 확인하고 바로 문을 닫았다. 우리는 곧장 이 시인이 거주하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 한쪽에는 얼마 전 수확한 벼 가마니가 천정 높이로 쌓여 있었다.
철둑길을 걸어오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날의 화제는 『갈뫼』 창간호를 어떤 방법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회의 때는 등사지에 손 글로 써서 등사판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내 어렵더라도 인쇄를 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문제는 인쇄소였는데 서울이나 춘천에서 인쇄할 생각은 비용 때문에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다행히 속초에 인쇄소가 한 곳 있었다. 속초시청 앞에서 길을 건너 중앙동 쪽으로 200여 미터쯤 거리에 있는 문화인쇄소가 그것이었다. 인쇄소라 하기에는 설비가 턱없이 부족하고 낙후했다. 가내수공업처럼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한 페이지씩, 활자를 조판해서 찍어내는 활판인쇄 시설 두 조와 석판인쇄기 한 조가 전부였다. 학교나 공공기관의 그때그때 필요한 양식 같은 것을 주문받아 납품하고 있었다. 인쇄소를 운영하는 사장님은 속초의 대부분 시민처럼 1.4후퇴 때 북쪽에서 피난 온 분이었다.
더는 다른 방법이 없어 우리는 그냥 부딪혀 보기로 하고 인쇄소로 찾아갔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 좋은 사장님은 모자라는 활자와 마모된 활자를 서울에서 새로 주문을 내서 책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인쇄 문제는 일단 해결을 보았다. 이후부터 동인들의 원고 수집이 시작되었다. 원고가 모이자 이어 편집에 들어갔는데 이때 다시 문제가 된 것이 동인지의 표지였다. 표지는 어떻게 해서든 컬러로 하고 싶은 욕심이었지만 속초에는 그런 인쇄설비가 없었고 서울로 보내서 표지를 인쇄해 오기에는 비용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날 저녁, 이 시인의 매형 집에서 의논된 것이 바로 동인지의 표지 편집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었다. 동인지의 명칭은 일찍이 박명자 시인이 제안한 <갈뫼>로 정해졌고 내용 편집도 대충 마무리가 된 셈이었다. 동인지의 제자(題字)는 이 시인이 도안해 놓았으나 표지화는 달리 뾰족한 방안이 없었다. 세 사람이 생각하다가 착안한 것이 인쇄소에 있는 석판인쇄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석판인쇄는 인쇄물에 색깔을 넣을 수는 있지만 빨강이면 빨강, 파랑이면 파랑으로 단색으로만이 가능했다.
그때 우리 손에, 지금은 폐간이 되어 발행되고 있지 않지만 당시에 꽤 유명했던 미국 잡지 <라이프>라는 잡지가 있었다. 기사보다는 주로 유명 화가의 그림 소개와 함께 옷과 보석 등 명품을 소개하는 잡지였다. 몇 월호였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잡지에 실린 기하학적인 구도의 추상화가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그 그림의 일부를 편집해서 표지화로 사용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결정하게 된 이유는 그림의 이미지나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순전히, 그 그림의 노랑과 초록의 경계가 선명하게 구분되어 있어서 석판인쇄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결정된 것이 『갈뫼』 창간호의 표지화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표지화의 인쇄가 조악해서 씁쓸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최상의 방법이었다. 이후에도 표지화의 석판인쇄는 몇 차례 더 계속되었다.
이 밖에도 동인지의 출판과정의 어려움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회원들이 인쇄소에 교대로 나가서 살다시피 하며 교정과 맞춤법 등을 고쳤던 일은 극히 작은 예에 불과하다. 그 동인지가 이제 50호를 출판하는 국내 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지금까지 동인지를 꾸준히 발간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지역사회 문화발전을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한 동인들의 노력의 결과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뿐만 아니다. 설악문우회는 이 동인지 창간호 발행을 계기로 명실공히 속초와 강원도의 문화를 선도해 왔고 중앙문단에 기라성 같은 많은 문인들을 배출해 냈다. 이제, 동인지 50호 출판은 강원도의 자랑이자 속초의 자부심과 긍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새삼 감개무량하다.


* 현재 사용하고 있는 동인지 제자(題字)는 후일 시조 시인인 초정 김상옥 님이 보내 준 것으로 대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