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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시] 금계국 외 9편 / 조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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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12회 작성일 20-12-18 16:15

본문

뒤를 돌아보면 후회가 따라왔다

그래도 한 번쯤

내 삶의 중간결산서를 작성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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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국



모롱이에 홀로 갸웃거리던
네 눈빛은 뜨거웠다


낯선 바람이 두려워 휘청거리던
나긋나긋하던 뒤태
밤새 뒤척인 궁금증에게
이사 왔노라 살포시 웃었다


비워둔 마음 한자리에
기다림이 타는 듯
계절은 오고 가고


너의 진실된 고백
교태로운 입술에 실려
무수한 꽃잎이 되어 흩어지면


질긴 생명 잡초마저 쓰러진
지독한 욕심쟁이
순수의 영토는
노오란 아집으로 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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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장



너희들을 위한 아담한 집을 지었단다
머무를 곳이 없어
앵앵거리는 방황의 공간을 접겠니?


층간 소음도 염려 없고
사람들의 투정도
짜증스러운 불만도 존재하지 않는
성역은 이곳이란다


나름 주어진 시간
허황된 비행이 부르는
불시착의 종말은 찰싹!


밤이 이슥해지면
거구의 체격들
보금자리 차지하려
졸리운 눈을 비비고 있단다


새벽이 훤히 눈을 떠도
밖으로 나도는
모기들의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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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 든 청호동



밤새워 파도가
불 꺼진 처마 밑을 서성이며
거칠게 청호동을 깨운다


겨울을 수북이 담아
기다리던 명태와 오징어가
밤을 낮 삼아
슬레이트 지붕 아래 빨랫줄을 안고
꾸덕꾸덕 몸 말리던
비린 향수여!


아마이들 넋두리 풀던 동네 미장원
드문드문 문을 열고
도시바람이 분 바다에도
삼치를 따라
은빛 지느러미 너울거리는
갈치가 이사를 온 저녁


고향 그리워
울산바위 옆모습 바라보며
한숨짓던 어머님
속마음 깊이 푼 푸른 심장으로
날이 밝도록
울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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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썹거상술



유행으로 번지는 나잇살 제거
적당한 시기라는 핑계를
수술대 위에 올렸다


굴곡진 삶
패이고 흘러
깊어진 눈가 주름


비워 본다고
덜어 낸다고
세월의 흔적 가벼울 리 없지만
행여 얼마쯤이라도 되돌아가
봄날로 살아진다면


못 볼 것 보지 말고
앞만 보라고 흐려진 시야
슬픈 희망을 품는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거울에 투영된 여인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너의 진실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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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비 오는 날의 풍경



오월의 신록이 바쁜 나절
비상등을 켠 자동차들
은행 문턱에서 긴 한숨을 뿜어대고 있다


참혹한 역병을 씻어 내릴 듯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거리
철없는 장미
붉은빛으로 피어
잠시 쉬어 가잔다


어디로 가야 하나
무작정 빗속을 내딛는
사람, 사람들


찢어질 듯 휘날리는 우산 속
흔들리는 일상을 부여잡고
젖어 드는 발부리 한가득
무거운 마음


종종거리며 드나드는
긴 줄
‘긴급재난기금 지원신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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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짓다



TV 뉴스의 한 장면이다
병든 젊은 아버지와 10살 난 아들
사흘을 굶다
동네 편의점에서 현대판 장발장이 되었다


매정한 CCTV의 따가운 눈총
경찰서에 신고를 하자
흐느끼며 선처를 호소한다


담당 경찰관이 차려 준
밥상이 정으로 따뜻해질 때
창문 너머로 지켜보던 의인
돈이 든 봉투를 건네고
마치 자신이 죄인인 양
한사코 뿌리치며 달아난다


대형마트에 근무하는 나는
유통기한이라는 올가미로 묶여
음식물 쓰레기통
배 속을 채우는 날들이 많아
날마다
죄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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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버리다



우리
단풍이 깊기 전
세월을 버리러 가자
오늘은 비선대로
내일은 송지호로


비켜 지나가는 오늘을
서둘러 잡아 놓고
웃고 떠들어
젖어 드는 스산함을
억지로 잠재워 보자


부는 가을바람이
시원스레 달고
황금빛 들녘이
눈시울 적셔도
호젓한 둘레길
떠들썩하도록 놀아 보자


눈치껏
이해를 용서 못 하던
세월 잊은
철없는 여인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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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증명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저 그저
세월이 되어 흐르다가
생채기 아물어
굳을 나이 될 즈음
인생증명서를 발급하기로 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물렁한 삶에게
인생 낙관을 찍으며


딱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똑 부러져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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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피하려고만 하지 마라
험한 세상으로 오는 두려움


칼날같이 호기로운
용기를 지니지 못한 채


꺾이지 않는 것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 말하지 마라


한 번쯤 대쪽으로 쓰러져도
푸른 절개로 다시 설 것을


너는 아직도 바람을 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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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을 타다



과제의 점들로 이어진 삶
한 줄기 선을 긋는다


마음먹은 대로
올곧진 않지만
수수깡 잣대
하나 세워 놓고


때로는 허술하게
때로는 서투르게
때로는 완벽한 척


한없이 구부러진 곡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