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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시] 경자년이 왔다 외 9편 / 정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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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76회 작성일 20-12-18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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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년이 왔다



내 친구 동생 경자
착한 언니와 달리 어려서부터
소문난 꼴통이었다
성질은 또 얼마나 사나운지
쳐다만 봐도 시비 걸고
손끝만 닿아도 침 뱉고 할퀴고 해서
우리는 몰래 경자년이라고 불렀다
경자만 나타나면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남자아이들도 슬금슬금 경자를 피했다
글도 모르면서 욕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툭하면 지각 결석에다
아이들 돈이나 물건 훔치고
선생님들한테도 대들어
경자 엄마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학교에 불려 갔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버스 안내양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고
가발 공장에서 일한다는 소문도 있었고
어느 항구 술집에서 보았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한 번도 경자를 만난 적이 없었는데
드디어 올해 경자년이 왔다
코로나를 몰고


당분간
집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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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g



내 영혼의 무게는 담배 한 갑 정도
손끝에서 사라지는
연기보다 가벼운 부재


텅 빈 머리와
요란한 육체 어디쯤
상심한 영혼 꽁초 되어 있는지
날마다 나를 뒤적거려 본다
21g
그 깃털만 한 무게가
불량한 나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으니
무릎 꿇어 받들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멎으면
동시에 내 몸을 빠져나갈
담배 한 갑 같은 무게에 얹혀
내가 나인지도 모르면서
또 하루에 불을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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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위하여



드디어 입도 옷 한 벌 입는군요
마치 브래지어를 하듯
치명적인 소문을 가립니다
그동안 너무 많은 말들이
이 구멍에서 나왔으니
속옷 같은 옷 한 벌 입히고서야
입은 잠잠해집니다
함부로 그 옷을 벗었다간
죽음으로 갈 수도 있는 통로가 되어 버린 구멍
농담조차 발설할 수 없는 흉문들을
묵직하게 견뎌야 하는 코로나 시대
유행처럼 번진 입의 옷
손바닥만 한 입의 옷에 운명을 걸게 될 줄
아무도 몰랐으니
어차피 막은 입 속


푸른 나무나 한 그루 키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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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 바람꽃



너는
덧없는 사랑에
한 생을 탕진한
내 눈물 한 송이다


눈부신 후회
잠깐 꽃으로 피어나
온몸으로
눈 덮인 설산 달래는
봄 눈썹 아래 매달린 눈물
죄 지듯
또다시 누군가에게
마음 빼앗길 것 같아
서둘러 스러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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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파리는 하나의 걸작이다


에펠탑과 개선문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몽마르트 언덕 등등
파리의 뒷골목 거리의 여자조차 예술이 되는
바게트만큼 콧대 높은 도시 파리
그 자부심의 이름을 너무도 가볍게
사뿐!
업고 날아다니는 파리라는 놈
파리지엥 파리지엥하며
오늘도 내 밥그릇 위를 날아다니다
파리의 자존심을 더럽힌 죄 아는지
최대한 예의 바르게
두 발 먼저 싹싹 빈다


내게 한 번도 잡히지 않는
파리야말로 잽싼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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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그대 너무 늦었다
나는 이미 돌아섰고
그대를 향해 쓰고 지우고 또 썼던 그리움들이
낱낱이 흩어져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때
잘못 온 편지처럼 그대 문득 날아들었다
긴 기다림으로 꺾인 목에
송이송이 그대 피어나지만
내 그리움 한낱 햇살에 녹는 잔설보다
덧없으니
그대, 부디 내 안부는 묻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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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은



기찻길 옆
오두막살이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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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식사의 최후



집이 없어 거리에 나 앉아 본 사람은 안다
배 속의 아이와 품 안의 아이와
아장아장 걷는 첫아이 손을 잡고
생은 장막처럼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몸 부비고
이 악물며 살아내야 할 때
폭풍우 속에서라도 처절하게 강해진다


사람들이
박쥐의 터전을 깡그리 없애 버리고
박쥐 수프를 먹으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때
그들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왕관을 선물하며
어둠 속에서 이를 갈았던 것이다
집 빼앗긴 자의 울분을 피똥으로 싸며
온몸으로 복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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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의 별



먼 데서


소리 없이 내려앉은 별들이
설악의 품에 안겼네
누군가의 추억이었고
누군가의 그리움이었던
그 별들이 지상에 내려와
하얗게 꽃으로 피어
설악을 밝혀 주고 있네
그대에게 위안의 눈물로
잠시 발길 머물게 하는 별꽃
잊을 수 없는 추억, 고귀한 사랑


솜다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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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에는 공룡이 산다



애초에 부처였던 그를
사람들이 공룡이라 이름 지으니
그는 스스로 공룡이 되었다


사람들은 모른다
자신의 등허리를 타고 넘는 사람들을
모두 부처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마음을 다스리게 하고
욕심을 버리게 하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부처의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것을
손톱만 한 야생화 한 송이에도
위안을 얻으며
모였다 흩어지는 운무처럼
덧 없는 삶을
다시 한 번 추스르게 하는 다짐이
이 장엄한 공룡이 뿜어내는 힘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공룡의 등을 다 오르고 나면
사람들은 반드시 뒤돌아보게 된다
내가 벗어 놓은 내가 그 자리에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