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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시] 모래밭을 거닐다 외 9편 / 정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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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242회 작성일 20-12-1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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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을 함께한 정든 집과 헤어질 준비를 한다.

집 안 구석구석 켜켜이 내려앉은 시간 속에

머물러 있던 추억들을

버질 것과 가져갈 것으로 분류하는 일이 쉽지 않다.

추억은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에 더 깊이 깃든다더니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버리고 다시 들이기를 반복하며 이별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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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밭을 거닐다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닮아 있는
바닷가에 모여 밭을 이룬 모래알


어느 산 어느 골에서 시작되었을까?
부서지고 흐르며 맺어진
수많은 인연


아침 햇살 천천히 내려앉는 모래 위를 거닐며
생각한다.


다른 듯 닮았고 닮은 듯 다른
스쳐 간 인연과 스쳐 갈 인연


그 많은 인연의 어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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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



입에서 짠 내가 난다


흐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출렁이던 눈물
시간의 그물에 걸려 소금이 되었다.


그물을 빠져나간 오래된 우울은
기억을 잃어가지만
그물에 걸려 쌓인 눈물은
소금이 되어 자란다.


역류하는 슬픔을
짠내라 말하지 마라


슬픔이 지워진 오래된 눈물이
소금꽃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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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갇히다



여덟 살 동갑내기 친구 둘을 꾀어
성당을 찾아간 건
우연히 들은 종소리가 좋아서였어
3층에 있는 종탑까지 올라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종을 치지 않는 거야
종을 치는 아저씨도 보이지 않고
딱 한 번 쳐보고 싶었지만 참고 기다렸지
성당이니까 장난치면 안 되잖아
그런데 왜 그랬는지 몰라
누군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침을 뱉기 시작했어
그게 왜 그리 재밌던지
누구 침이 빨리 떨어지나 내기를 했지
그때 벼락이 내리쳤어
- 누가 하느님의 성전에 침을 뱉어 누구야
우리는 고개를 저었지
- 성당에서 거짓말을 해, 천벌을 받을 것들
뒤도 안 돌아보고 뛰었지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는데
뎅, 뎅, 뎅…… 종소리가 따라오는 거야
그때 심장이 쿵 내려앉았어
되돌아가서 하느님께 빌어야 하는데
빌었어야 했는데
거짓말한 죄 가슴에 묻고 반백 년 넘게 살다가
노트르담의 꼽추 영화를 보는데

그때 그 종소리가 들리는 거야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그 무서운 얼굴이 종을 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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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



매서웠던 추위가 한풀 꺾인 날
한 달째 동거 중인 감기를 데리고
딸 같은 제자를 만났다.


살구색 원피스의 하늘거림이 눈부시다.
겨울바람도 비껴가는 젊음이
마냥 예뻐 보이는데
팔 년째 취업과 실직을 반복하고 있다는
서른의 삶이 휘청거린다.


결혼은 접어 두고
부모님의 노후를 위해
투잡을 구상 중이라는 제자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같이 먹는 따듯한 밥 한 끼


얇은 코트 자락 여며 주고 돌아서는 길
잠시 소강상태였던 바람이
쇳소리를 내며 기침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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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할머니가 무단횡단을 한다.
심하게 흔들리는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더딘 걸음을 떼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어디를 가시나
할머니의 불안한 하루를 응원하다
내가 걸어온 날들 위에 징검돌을 놓는다.


가야 할 길보다 더 많이 걸어온 길
그 많은 징검돌을 건너는 동안
안개 자욱한 굽이진 길에
수시로 켜지던 빨간 불,
신호 무시하고 달리고 싶었던
몇 번의 충동에 제동을 걸며
한발 한발 흔들리며 내디딘 시간이
할머니를 따라 무단횡단을 하고 있다.


걸어온 길의 모양은 서로 다르겠지만
길은 길이기에 오십보백보인 것을
할머니와 나의 길 위에 얼마나 더 놓일지 모를
징검돌의 안녕을 빌며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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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 숙이고 나무를 본다



히말라야시다가 사라졌다
 
눈이 내리면 은빛 트리가 되어
캐럴을 들려주고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막이 되어 주던 나무


아파트와 함께한 삼십 년,
점점 불어나는 몸이
노란 꽃가루를 쏟아내고
모여드는 새들은 배설물을 뿌려대는데
뿌리까지 주차장을 침범하자
불만의 목소리 점점 커졌다.


히말라야시다의 운명을 묻는 여론에
눈 감고 귀 닫았던 며칠 뒤
아파트와 함께 늙어가던
열다섯 그루의 주민이
밑동만 남겨진 채 모두 베어졌다.


지저귀는 새소리 환청으로 살아 있는
사방이 휑한 아파트


고개 들고 올려다보던 나무를
허리 숙이고 내려다본다.

남겨진 밑동, 나이테 속을 맴도는
열다섯 그루의 주민과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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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는 울지 않았다



- 광부들은 탄광에 들어가기 전에 산소 농도를 측정하기 위해
카나리아를 먼저 들여보낸다. 산소가 부족하면 카나리아는
울음소리를 내어 신호를 보낸다고 한다.



메탄올이 얼마나 무서운 독극물인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야간 근무와 조금 높은 시급에 감사하며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스물아홉 살 진희 씨는 근무한 지 석 달 만에
메탄올 급성 중독으로 쓰러졌다.
병명은 뇌출혈과 뇌경색
그리고 시신경 손상으로 인한 실명


대기업에 핸드폰 부품을 납품하던 하청업체는
생산 단가 절약을 위해 독극물로 부품을 닦게 했다는데
한 명 두 명 쓰러지기 시작하고 시력을 잃어가자
영세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며
사회 구조적 문제로 책임을 돌리고


정부도 대기업도, 피해자들의 막막한 미래에 대해
함구(緘口)하고 있다.


쓰러진 지 2년 만에 다시 걸음마를 시작하며

귀로 보고 마음으로 말하는 법을 터득 중인 진희 씨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에 초점을 맞추고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며 침묵으로 말한다.
카나리아는 울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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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위들은 봄을 기다린다



검은색 패딩 어깨 위
고개 내민 하얀 깃털 하나
떼어 내니, 줄줄이 따라 나오는 털


흠집이 난 것도 아닌데
답답함을 참지 못한 깃털 하나가
원단을 뚫고 얼굴 내밀자
압축되어 있던 털들이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거위 털 패딩의 수요를
도축으로는 따라갈 수 없어
살아 울부짖는 거위의 가슴에서
뽑혀 나왔다는 털들
그들은 알고 있었다.


털의 부드러움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숨구멍이
유일한 탈출구임을


머리 내미는 깃털을 다독여 들여보낸다.
밖은 아직 춥다고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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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매화 나무는 자가격리 중



코로나19로
출입문 걸어 잠근
어린이집과 노인복지센터 사이에
청매화 나무 다섯 그루 나란히 서 있다.


자가격리 중인 3월
눈치를 보던 나무들
하나, 둘 가지마다 등불 켜고
봄맞이 준비를 한다.


인적 끊긴 골목을 오가는 건
수선스러운 봄바람과 길고양이 몇 마리


어린이와 노인들 사이에서
전염의 매개체가 되는 건 아닌지
까치발 하고 주위를 살피던 나무들
서둘러 등불 거둬들이고


특보 나르기에 지친 봄바람은
어린이집 뜰을 서성이며
빈 그네를 흔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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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5

- 부부



제 몸 치수도 모르는 어리숙한 발이

튼튼해 보이는 가죽만 믿고

선택한 구두


처음부터 조여 오는 발의 통증이

잘못된 선택임을 암시했지만

가죽은 길들이기 나름이라고

억지로 끼워 신고 길을 갔다.


먼 길 동행하는 동안

상처투성이가 된 발과 구두는

갈망하는 자유를 위해 기회를 엿보지만


뿌리 깊어 가는 굳은살 속에

길들여진 시간은

헤어질 수 없는 피예를 만들며

서로의 상처를 다독이고


낡고 색바랜 구두와

굳은살투성이가 된 발

티격태격 불협화음을 내며

오늘도 길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