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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시] 강 입을 열다 외 9편 / 송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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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223회 작성일 20-12-1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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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길에 들어선지 스물두 해

시다운 시의 집 한 채 짓지 못하고

시인의 이름만 걸치고 있다

쉰 살의 『갈뫼』에 글을 올린다

참.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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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입을 열다



세상에 섞이기 싫어
참고 달래어 겨우 가라앉힌


한바탕 폭우가 지나간 뒤
강폭을 넓히며 무섭게 달려오는
흙탕물의 질주는
평온하게 유지되는 강바닥을
모조리 뒤집어 버렸다


누군가 세상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던 울분과
가면 없는 세상을 꿈꾸는
원성의 촉들이 속내를 건드렸나 보다


저 강물은
또 얼마나 많은 말들을 흘려보내야
제 물빛
제소리를 찾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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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의 바다



새벽 바다를 벌겋게 물들이며
쏟아낸 햇덩이는 장엄하였다


강산이 일곱 번의 몸을 바꾸며
지나온 일흔의 날이
어디 봄날만 있었을까


비바람 몰아치는 사나운 날도
방파제를 때리는 세상의 파도도
온몸으로 견딘 아픔의 날이었다


풍파와 격랑을 겪어온 나의 바다
지나온 날들은 모두가 꿈이었음을
옛이야기 하듯 잔잔한 물결들이
햇살로 번져가는 일흔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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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초록이 깃을 내렸다


세상에 스미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푸름은
사선과 곡선 그 세상의 잣대를
가늠하지 못해
무작정 뛰어들다
추락이 빚어낸
자음과 모음의 어설픈 문맥들


반백을 건너온 침침한 갈피마다
빛바랜 가을만 노을로 남아 있었네
하여
남겨진 여백에
유서 같은 부록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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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월 코스모스



꽃들은
제모습을 바꾸기 싫어
그냥 지고 만다는데


지난여름
낮 달맞이꽃
놀다간 자리
철 지난 코스모스


무슨 연 그리 깊어
떠나지 못하고
앙상하게 매달린 너


꽃으로 돌아가기는
너무 늦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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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암



밀물과 썰물
바다와 육지
파랑으로도 닿지 못해
때때로 몸을 바꾸는


분홍, 빨강 색색의 연등이
누군가의 소원을 달고 염불을 외는
도량 앞 작은 연못엔
만월 된 동전들이 기도를 한다


스님의 기척은 들리지 않고
음계를 맞춘 파도 소리가 탑돌이를 하는
절이 섬이고 섬이 절인
간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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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꽃



저녁 무렵
아파트 화단에 피어 있는
분꽃에선 어머니 냄새가 난다


애야
분꽃 피었다
저녁밥 안쳐라 하시던


유독
어머니가 보고 싶은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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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면



아파트 방음벽 양지바른 담에다
추운 듯 서로 몸을 기댄
복슬복슬 강아지풀들


어릴 적
대청마루 아래 옹기종기
누워 있던 누렁이 새끼들
동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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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둣빛 봄에



서랍을 정리하다
오래전 추억 묻어 있는
빛바랜 사진 한 장


언제 어디서였는지
잔디밭에 앉아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기억조차 희미한 얼굴들이
반세기의 강을 건너게 한다


오직
싱그러움 하나로 꿈을 펼치던
그날의 웃음소리 쏟아지는데
그녀들은 지금 어디에서
연둣빛 이 봄을 보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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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게젓을 담그며


긴 날을 숙성시킨
지인이 보내온 택배 속엔
동호리 앞바다가 통째로 딸려 왔다
손질할 줄 모르는 나를 배려해
한입으로 먹게끔 소분 해 보내 준
그의 손끝에선 언제나 미역 냄새가 난다


바다 밑을 제집처럼 누비며
해삼이며 전복을 따는
전생이 용왕의 딸이었노라
자부하는 그녀


멍게의 상큼한 향에
파도 자락 갈매기 소리 버무려
젓갈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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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월



봄여름 가을
스쳐 오는 동안
잎을 떨군 나무들
직립의 자세로 사열을 하는
추수 끝난 빈 들녘엔
쓸쓸함만 가득한데


파도를 앞세운 십일월
겨울 돌아왔으니
추워져야 한다고
방파제만 때리는데


내려놓는다 가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