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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시] 기형의 봄 외 9편 / 최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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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172회 작성일 20-12-18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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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그막에 국어국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4학년이 되었고

이제 졸업을 한 학기 남겨 두었다.


전공만 하면 쉬울 것 같았던 시론...

하지만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물 위에 마음을 얹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시가 점점 읽히지 않는 시대에

시를 공부하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생각해 보며

삭막한 삶을 견디게 하는 예술의 힘,

그 힘을 시작노트로 대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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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의 봄



봄이 채 길을 내기도 전
매화가 달려오고 동백이 왔습니다
뒤이어 뛰어온 모란과 명자
넘어진다,
봄이 손사래를 쳐 보지만
그저 앞만 보고 달려옵니다
코로나가 창궐하는 사람의 세상
위로가 되겠다며 꽃들이 옵니다
밭둑에서 허리를 꼰 채
지켜보던 도화가
눈인사로 반겨 주는 애틋한 봄입니다
먼 산엔 아직 눈이 하얀데
앞 다투어 달려온 색색의 희망들
하늘도 목마를까 실비를 보내는
둥근 봄입니다
사람은 없고 꽃들만 환한
꽃들이 세상을 끌고 가는 기형의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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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집성촌



물가를 다녀오면 몸이 무겁다


흙으로 빚었으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사철 비를 맞는 장독보다 내가 먼저
부서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장독에 금이 가면 철사로 동여매고
소금 독으로 쓰던 어머니
여기저기 틈이 생긴 나도
정신의 올로 몸을 묶고 기다리면
무겁고 습한 것들이 빠져나갈까


온종일 달구어진 항아리에
가만히 기대앉는다
몸이 따뜻해지면서 지난밤 쌓였던
불면의 간수가 빠져나가는지
스르르 눈이 감긴다


흙으로 빚은 항아리 한 채와
사람 한 채가 빚는 고요 곁
흙 속에 발 묻은 맨드라미 한 채가
까치 쫓는 모습을 본 것도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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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가 있는 집



맨살로 지낸 스무 해
드디어 벽돌담이 옷을 입었다
갓난아이 배내옷 입듯 처음 색을 입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병은 외로움이라며
입담만큼 솜씨 좋은 그림쟁이 남자는 
색색의 꽃들을 담 가득 심었다는데
꽃에 앉은 나비들 
삐걱거리는 문소리에 날아갈까 봐
대문도 활짝 열어 둔다며
저것 봐, 저것 봐
지나가는 바람도 꽃이 고우니
한 번씩 슬쩍 앉았다 간다고
빈 볼 가득 詩를 오물거리는 꽃집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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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



여기는 생의
마지막 병목구간


드디어 빛이 보이고
세상 모두 꽃길이라
생각될 즈음


누군가 내 생을
손바닥에 놓은 채
거꾸로 뒤집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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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



매미와 귀뚜라미가 
함께 울고
냉방기 난방기가 
같이 도는 구월


젊은 축에도 
늙은 축에도 
끼지 못하는 나처럼
여름도 가을도 아닌
깍두기 계절


하지만 다시 보면 
초록 벼잎 속에서 
모락모락 밥 냄새 
피워내는 구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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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몸이 끓어야
자꾸 몸이 끓어야


파랑처럼 피워 내는
거친 물꽃과
냄비 밖으로 흘러넘치는
물큰한 소리


다가가 빼꼼히 뚜껑을 연다


세상 밖에다 눈을 버린 
물고기 한 마리


맥없이 무너진 
천불천탑 끌어 안고 
붉어진 제 몸을 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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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다 



응급실 한 편에서 통증 주사를 맞고
마취가 풀리기를 기다린다
밀려오던 잠에서 벗어나는 순간
두 손을 꼬옥 잡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응급실 문을 나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이 보인다
마치 회혼례를 마치고 퇴장하는 행진의 거룩 같다
우기도 있고 건기도 있었겠지만
저렇듯 아름다운 뒷모습을 가졌다는 건
단단한 믿음과 소망 아니었을까
아픔은 고이는 게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는 것
미리 절망 쪽을 기웃거리지 말자
노부부의 굽은 등 같은 겨울 오후 다섯 시
젖은 허리가 먼저 일어나
집 향해 가지런히 신발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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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새



푸른 하늘에 하얀 새 한 마리


바람이 불 때마다 깃털이 빠진다


기형의 날개를 가진 저 새는


파지로 버려진 미완의 내 시다


썼다가 지웠다가 주제도 잃은 채


허공을 떠도는 내 시의 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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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암에서



한 계단에 소망을
또 한 계단에 기원을 담아
무겁게 짊어지고 올라간 정상


맞아 주는 건 바람 소리뿐
아무것도 없었다


반기지도 내치지도 않는
바위산에 서서
세상 내려놓고 나를 꿇는다


텅 빈 마음에 차오르는 뜨거움


내 안이
적멸보궁인 줄 모르고
한 생을 헤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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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 무렵



입동 지나
히비스커스를 분에 담아 안으로 옮겼습니다


집 몸살이 났는지
하나둘 잎에 노랑물을 들이더니
제 발아래 모두 떨구고 맙니다


윤기 나는 잎들 위에
손바닥만 하게 써 붙이던 선홍빛 이력 대신
앙상한 뼈대 위에 걸어 놓은 병상일지


아파요
아파요, 나를 부르지만
해줄 게 없는 나는 물그릇을 들었다 놨다
마음만 동동 구릅니다


밖에는 스산하게 겨울비 내리고
일기예보보다 먼저 온 소한 추위


유리문을 때리는 바람 소리 들었는지
콩알만 한 꽃봉오리 힘겹게 달아 놓고 
괜찮아요
참을만해요
아픈 꽃나무가 내게 위로를 건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