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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시] 개 짖는 소리 2 외 9편 / 장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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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255회 작성일 20-12-21 17:05

본문

호기심을 잃지 않는 한

당신은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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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짖는 소리 2



가난한 산동네 푸른 밤을 찢는
개 짖는 소리 엄청 크다
이 세상 제가 왕이라도 되는 듯이


목소리를 잃어버린 나
어머니 배 속에서 나올 때 이후
저렇게 목청 터지도록
소리 질러 보았는가
결재판 들고 죄지은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개는 하루를 살아도
개답게 살아야겠다고
쩌렁쩌렁 온 동네를 지배한다


나는 소주 몇 홉의 기운을 받아
돈 몇 푼 주고 소리 질러 보아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헛간 같은 세상 속으로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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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바란다



네게 바란다 라고 쓰려다
내게 바란다 라고 써본다
그러고 보니
내게 바라는 것이 많아
한 가지만 써 본다
책을 본다고 또는 시를 쓴다고
밤을 하얗게 지새우지 말 것
쩐의 전쟁시대에
아무런 무기도 되지 않는
철 지난 시를 쓴다는 것은
자학이자 자멸
그러나 알면서도 못 고치는
몽유병처럼 달라붙는 시의 그림자
아침에 깨어 보니
눈송이 왕관처럼 뭉쳐져 있는
삶의 파지들
이제 내게 바라는 것을
네게도 간곡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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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면접시험 전 피부과에 들러
함몰된 모호한 상처들을 다듬어
모든 과거의 흔적들을 지었다
사진 찍는 날
시키는 대로 살며시 미소 지으며
적당히 나를 감추었다
이 사진으로 면접을 통과했고
갓 발매된 기념우표처럼
모든 문서에 끈끈하게 달라붙어서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회전문을 돌렸다
나의 구두는 너무 번쩍거려
멀리까지 빛이 반사되었다
풀여치 같던 시골뜨기 행색을 버리자
목덜미에서는 그윽한 향수 냄새가 났다
나는 도시 어디에서나 우아한 피사체가 되어 주는
정원수가 되었다


그런데 넥타이는 목을 조여오고
두 눈은 잠자리눈처럼 빙글빙글 돌아갔다
목울대에서는 풀여치 울음소리가
찌르르 찌르르 끊임없이 올라왔다
어디선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뒤돌아보면 시간이 정지한 듯
숨 쉴 때마다 흙내음이 코를 간지럽히고

아기를 업은 듯 옥수숫대가
어머니처럼 손짓하는 곳
제멋대로 자란 나무들 사이로
산들바람이 책갈피를 넘겨 주는
그곳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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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의 노래



허공에 벽을 만들려고 도면을 펼친다
얽히고설킨 거미줄처럼 복잡한 선분들이지만
그는 매의 눈처럼 자세히 살펴본다


목수의 생명이란
곧게 자란 대나무처럼 수직잡기지만
기초를 받치는 울퉁불퉁한 수평잡기도 있다
바다가 파도에 출렁거리면서도
언제나 수평선을 보여 주듯이
그러려면 언제나 가슴에 중심을 품어야 한다
흔들리다가도 제자리에 돌아오는 저울추처럼


그는 익숙한 촉감으로 나무를 살핀다
눈을 찡그려 휘어지진 않았는지 표면은 자연스러운지
이윽고 대패로 밀어낸 껍질들이
꽃잎처럼 가지런히 흘러내리는 것은
그가 터득한 기술이다
먹줄을 튕겨 자벌레 기어가듯 표시를 한다
망치로 박아올린 까치집 같은 나무들의 조립
나무에게도 성깔이 있다
아기 대하듯 부드럽게 다루어야 한다
한 번의 못 박기에도 힘의 배합이 교묘히 들어 있다
못과 나무는 암수처럼 서로 잘 당겨진다
벽들과 문틈에도 밀고 당기는 힘이 있어

세상살이도 적절한 긴장이 필요했다
완전한 양보도 절대적 승리도 없는
삶이 지혜롭다고 믿었다
틈새에는 끌로 딱따구리처럼 둥글게 홈을 판다
둥근 것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나무를 켠다
나무 향기가 폐부로 깊숙이 파고든다
옹이가 박힌 나무는 사춘기처럼 튀어 나가기도 한다
세상 풍파에 시달린 목수도 가슴에 옹이투성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한 그루의 나무가 되었다
그에게 다시 동그란 나이테가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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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터미널



고향을 떠나온 오징어들이
빨랫줄에 덕지덕지 걸려 있는
허름한 여관들 앞에 터미널이 있다
어젯밤 꿈에서 고래를 잡았다고
복권을 사러 오고
여관에서 나온 부스스한 얼굴들
애정운이 좋다는 오늘의 운세에
금방 환한 표정이 된다


파도에 떠밀려온 해초처럼 왔다가
등대다방 아가씨는 다시 어디로 떠나가는지
아가씨가 벗어 놓은 분내 나는 허물을 부여잡고
서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촌 총각들
버스 유리창에 노랑나비가 팔랑거린다
반쯤은 물고기가 된 구릿빛 수병들
부레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고 휘파람 분다
군모를 벗었다 썼다 마음이 바쁘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애인을 만나러 가는 중이다
서울 가면 늑대 같은 사내들 조심하라며
말린 생선들을 버스 옆구리에 넣어 주며
블라우스의 단추를 단단히 채워 주는 어머니
그래도 목련꽃처럼 방그런 미소를 짓는 여학생


봄바람이 포구에 살랑살랑 불어온다
터미널도 수줍어 복사꽃 얼굴로 달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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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의 발들



식당에 다니는 어머니는
가문비나무 잎맥처럼 갈라진 발에
늘 찜질을 하거나 물파스를 바른다
작은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는 누나는
꼭 하이힐을 신고 출근한다
그래야 승진할 수 있다고 믿는데
발에 통증이 심한 날에는
안개가 끼거나 진눈깨비가 내렸다
공원 의자에 앉아 한숨만 쉬는 사람들
발은 편하지만 속은 숯검뎅이다
가끔 두발을 개구리같이 허공으로 올려
침묵으로 시위하곤 한다
지하철역 노숙자의 새까만 두발이
종이상자 밖으로 나와 있다
그들은 삶의 패배자인가
고뇌에 찬 철학자의 표정을 짓곤 한다
상갓집에 모인 발들
손과 발을 조아려 예의를 갖춘다
제각각 다른 신발을 끌고 왔지만
이곳에선 발들끼리 호흡을 맞추는 것이다


삶의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
벌거숭이 발들이 어떻게 시린 겨울을 날런지
그들에게선 칙칙한 냄새가 일상적이지만
깊숙이 숨을 고르면 냄새도 맡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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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2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아니 사람이라면
늘 사랑에 빠져 있어야 한다


카사노바 그런 거 말고
이를테면 쑥부쟁이 구절초 같은
들꽃이라던가


밤하늘에 외톨이로 떠 있는
별이라던가


하물며 사람과의 사랑이란
오죽하겠는가


작은 손바닥을 펴 보이는 아기라든가
한 발짝 떼기도 어려운 할머니라든가


하물며 그대와의 사랑은
오죽하겠는가


사랑은 혈관 속의 피돌기와 같아서
잠시도 멈출 수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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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3



방안에 식물을 키우다 보면
식물의 표정을 읽게 된다
이파리를 축 늘어뜨리면
창문을 열어 달라는 이야기고
누런 잎이 생기면
물을 달라는 이야기다
그러다 보면 밖에서 방을 들어설 때
식물들이 힘껏 향기를 내뿜어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 말들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가슴에 누런 흙을 간직해야 된다
그럼 식물이 잠자는 것도 알게 되고
당신이 피곤에 지쳐 잠이 들 때에
식물은 가슴을 활짝 열고
깊은숨을 내쉬어
당신을 편하게 잠들게 할 것이다
이윽고 식물이 꽃을 피우면
식물과 당신은 서로 사랑에 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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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상



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에
소녀가 봄옷 차림 그대로
추운 줄도 모르는지 단정히 앉아 있다


지나가던 사람이
끌끌 혀를 차며
자기 목도리를 걸어 주었다


그 소녀에게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분명 주름이 쭈꿀쭈꿀 해야 할
노인이 소녀가 되어 앉아 있었다


아직 사랑이 뭔지 모를 나이
솜털 같은 콧수염의 아이들과
한참 뛰놀다 어스름 저녁에 귀가해서
아버지에게 야단맞을 것 같은 나이


진군나팔 소리를 따라
그 어린 버선발로
만주 지나 남경 지나 버마까지
번득이는 눈빛에 질려
끌려다녀야 했다


임시로 만든 간이천막에

일본군 아저씨들이 셀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 작은 입으로 어머니를 불러 보았다


그 누가 더렵혀진 몸이라 하겠는가
조국에 돌아오자
그대로 굳어 순결한 소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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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쌀뜨물 흐르듯 바닥까지 내려와
무가지에 실린 오늘의 운세를 보다니요
아직은 맨홀에 떨어지진 않았습니다


당신은 수많은 별자리 중에 하나
신화를 끄집어내어 행운을 빌며
점성술사처럼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당신은 드디어 주머니를 톡톡 털어
새점까지 보게 되었네요
새가 물어다 주는 점이 좋지 않다고
새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새에게 영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달을 보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나요
어머니는 복을 내리는 선녀보살이 아닙니다
어떻게 당신의 꿈을 해몽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 별에 나올 때부터 산발머리 같은 바람이
악운을 몰고 오네요
접시를 놓쳐 깨뜨리거나 면도하다 베이거나
사소한 시작이지요
그렇다고 돌멩이를 걷어차듯
이 별의 운명을 송두리째 거부해선 안 됩니다

어느 서식지나 늪은 입을 벌리고 있지요


그러니까 오늘의 운세를 믿지 말고
습관이 된 아침을 털고 일어나세요
운명은 한발 앞선 그림자가 아닙니다
당신의 운명은 아직 결빙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크레바스를 건너냐 마느냐는 여전히 당신 몫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