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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시] 수목 설경 외 10편 / 김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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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217회 작성일 20-12-2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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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있는 일과 회복 불가능한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내 능력 밖의 일 사이에서 자주 혼란스럽다.

가끔 기도가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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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 설경



먹 붓 몇 점 흐르다 멈춘
하얀 수묵화
설악(雪嶽)이라 이름한 이유를 알겠다


저 아뜩한 겹겹의 설경이 되려고
누구는 엊그제 산행을 나선다 했지


심장에서 돌기 시작한 서늘한 핏줄기
때 묻은 눈(目)을 눈(雪)으로 밝히며
공룡능선 갈피 어디쯤
나도 그곳에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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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한 계절의 노래



천천히 지나가는 풍장(風葬)
가을을 꼬박 새우고
겨울잠이 들었습니다


멀리 타클라마칸 모래바람이
팬플룻 음색을 고르는 동안
함박꽃 피려면 아직 멀었는데
산수유 향이 선잠을 깨웁니다


봄은 여름을 위하여
여름은 가을을 위하여 순하게 지나갑니다
머리맡 북극곰 발자국 소리 여전하고
해안과 산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는
선한 바람이 길을 잃지 않기를


처연한 가을이 막을 내린 무대 뒤에서
겨울 졸음에 하얗게 눈이 감기고
어린 봄이 꿈속으로 파고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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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기행문



늦은 밤
담벼락을 껴안은 어깨는
달빛이 보았고
파도 소리로 묻은 고함은
바위가 들었다


산다는 것은 너 나 없이
버거운 일인지


큰 산맥 어깨에 눈물을 닦고
바람은 다시
사람들의 세상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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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문장



마른 눈물의 얼룩
그 문장을
끝까지 읽은 사람은 없다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낙타가
사막 한가운데서 늙어가는데
무엇에 기대어
나는 이 사막을 다 건너갈 수 있을까


눈물로 읽다 읽다
또 하나의 슬픈 문장이 된 사람들
바람은 그들을 모래라고 부른다


멀리서
또 누가 낙타를 타고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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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의 절벽



바람은 밀어내고
눈비는 허물어 냈다


아뜩한 절벽 아래
파도는 온종일
뛰어내리고 포기하라고


뿌리 서로 껴안은
도도한 생애
적시면 젖어가고
흔들면 흔들리며 간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참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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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바다가 있다고 했다



고단한 어깨 부딪치며 달리는
멈출 수 없는 내리막길
아직 바다는 멀었는지


심문하는 복병처럼
자주 만나는 절벽
그때마다 우리는
껴안은 채 눈을 감고 뛰어내렸다
아직 바다는 멀었는지


더 이상 내달리지 않아도
커다란 품에 안겨 흔들리는
평온한 나라
누가
그런 바다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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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서 말까지



천천히
잠시 멈춤
몇 번의 표지판을 지나 언덕에 서면
말이 시작점이 있다


내리막길
한 번 내어 보내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언어들


솟기 시작하는 긴장감으로
목울대가 젖고
줄을 서는 단어들과 문장


상대방의 마음은 늘 읽기가 어려워
진지하거나 단호하거나
줄이고 줄인 몇 마디면 충분하다


말까지 가는 먼 길
표지판 신호를 어떻게 지나왔는지


내리막길 다 끝나기도 전에
누구는 웃거나 울기도 하고
누구는 죽거나 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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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할머니



늙은 건 모두 약이라고
옆집 할머니 담 위로 넘겨 주신
오목오목 세로줄 선명한 호박
그러고 보니
지난번 주신 누우런 노각도
약이라고 하셨지


호박도 오이도
오래 익어 약이 되는데
나이만 늘어가는 나는
늙은 호박, 노각을 먹어도
약이 되지 못하는지


자꾸만 좋은 것을 나누어 주시는
옆집의 약 할머니
아직 철도 덜 든 나는
얼마나 더 익어야 약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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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고르기



표정 만들기는
순진하던 어릴 적 연기


화려한 경력 익숙한 기술
상황에 따라
경극처럼 재빠르게 장착되는
수많은 가면


혼자일 때도
잠들면서조차 잊지 않는
가면 고르기


거울 앞에 서면
늘 낯선 얼굴


너는
정말 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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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문안하다



광풍 팬데믹이 지나갈 때는
숙이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선이 사라진
점. 점. 점


마스크로 입을 막다
말문까지 닫아걸었다


오랜 침묵 끝에
슬며시
일흔을 앞둔 나에게 문안 인사를 한다
그동안 잘 있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그런데 왜 눈물이 날까
나는 슬픈 사람이었나 보다
인사가 너무 늦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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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호 마네킹


지나가는 차의 짐칸

'공사중' 간판과 함께

반쯤 접힌 수신호 마네킹이

노란 신호봉을 꽉 쥔 채 흔들거린다

세워다 놓고 전력만 넣어 주면

온종일 반복되는 단순 동작

오늘은 어느 공사장 길가에서 근무하는지


쉬지도 못하고

길가에서 고생하는 게 안돼 보여서

어떤 호호 할머니가

믹스커피를 타서 권해 보았지만

들은 체도 않고 신호봉만 흔들었다던

엄청 성실한 마네킹

그 사람 수·신·호


할머니 혀를 차시며 결국 돌아서다 물으셨다지

'대체 얼마나 받으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