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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시] 살아남기 외 9편 / 김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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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301회 작성일 20-12-21 17:51

본문

시를 쓰는 시간 보다

문화활동 프로그램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다

좋은 시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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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오래된 잎을 버립니다
삭정이를 떨굽니다
우듬지 속 물관을 비웁니다
북서풍 불면 고개를 수그립니다
얼음꽃 피면 몸을 웅크립니다


대청봉 꼭대기
겨울나무가 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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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룡폭포



흐르다
잠시 멈추었다
다시 흘러


그렇게
아득하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


바닥 깊이
가라앉았다가
뒤틀고
솟구치기를
수·천·년


아직도
날아오르지 못한
미르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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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의 별책 부록



불혹의 나이까지
우리 집의 중심은 나였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지구가 23.5도 더 기울더니
시나브로 나는
아이들의 부록이 되었다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던 곳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나이가 되어
집안에 새로운 식구 하나 들였다


꼬맹이 들어온 지
백일
나는 이제
강아지의 별책 부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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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바위



봄눈 맞으며 오른
설악산 오솔길 끝


어스름 저녁


내 손바닥 위에
오도카니 올라앉은


눈 덮인
지구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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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꼬맹이 들어온 지
백일
나는 이제
강아지의 별책부록이 되었다*


갈뫼 회원 시합평란에 올린
자작시 한 편


아니요. 아니요.
당당하고 진솔한
한 권의 양장본입니다.*


댓글로 달린
한 마디로


별책 부록이
양장본이 되는


따뜻한 말의 세상


*자작시 「강아지의 별책 부록」 중 일부
*댓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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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웃음



10년 후에나
다시 볼 수 있다는
부분 일식으로
세상이 어둡던 날


정신지체 3급 박 씨가
폐지를 나르던 리어카에
아내를 태우고 언덕길을 오른다


땀을 뻘뻘 흘리던 박 씨
아내 얼굴에 핀 웃음꽃 보며
환하게 따라 웃는다


어둡던 세상이 온통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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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먹는 밥



마음에 점 하나 찍는다는
점심(點心)을 먹기 위해
밥상을 차리다


칠십육억 명 지구촌에서
혼자라는 단어가 시리다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고파서


혼자 먹는 밥이
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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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보기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아야 한다*


파도를 보지 말고
바닷속 흐르는 물길을 보아야 한다


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지 말고
불어오는 바람을 보아야 한다


멀리 보지 말고
그대 바로 옆을 보라


오래된 세상이
거기 있다


*고사성어 견월망지(見月忘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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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동 이야기·1



총소리가 멈추자


청호동 모래톱 위
함경도가 주저앉았다


타고 왔던 창이배﹡로
여름엔 오징어바리
겨울엔 명태바리로
식구들 먹여 살리다


흩어졌던 일가친척
살기 어려운 이웃들
불러 모아
고향 이름 딴


신포, 정평, 흥원, 신창 마을
앵고치, 짜고치 마을을 만들었다


임자 없는 공유 수면
흔들리는 모래톱 위
아바이 마을이라는
작은 나라 하나
뿌리 내렸다


* 창이배(1950년대)는 큰 돛과 작은 돛을 앞뒤로 배치한 범선이다. 동력선이 본격화하기 전까지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주로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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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동 이야기·2



청호동


머무를 곳이 아니라
고향 가는 길목
잠시 숨 고르던


식구들 비바람 피하기 위해
판자와 철판으로 얼기설기
방 한 칸에 정지﹡ 하나뿐인
하꼬방을 지으며
변소조차 집 곁에 두지 않았다


눈은 원산 앞바다에 걸어 두고
귀는 청진 포구에 열어 두고
고된 뱃일 끝나고
막걸리 한 잔에
가자미식해 씹으며


날마다 뱃길 열리기를 기다리며
삭힌 젓갈만큼
싸한 시간들이 흘러갔다


*정지 : 부엌의 방언
*하꼬방 : 판자로 임시로 만든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