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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2020년 [시] 미안하다. 벚나무야 외 9편 / 권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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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243회 작성일 20-12-2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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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 호숫가 벚나무들이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거리를 두고 있다. 인간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 작년에는 산불로 금년에는 코로나19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양양 오산리 선사 유적지엘 갔다. 머리 풀어 헤친 원시인이 나를 보고 씨익 웃는다. 전생에 함께 했던 살붙이 같다. 친정집 찬장 속 이빨 빠진 막사발을 누가 이곳에 갖다 놓았는지, 빗살무늬 그윽한 체취에 부쩍 情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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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벚나무야



속초 영랑 호숫가 벚나무들이
마스크를 한 채
거리 간격 줄로 서 있다
꽃구경 나온 사람들 기침에
꽃 얼굴 닿을까 봐 고개 젓는다


지난해는 산불 때문에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황토 붕대로 다리 감은 채
겨우내 물 끌어올려, 금년 4월
만개한 벚꽃을 피워 냈는데


형체도 모양도 없는
코로나19라는 요괴가
선전포고도 없이 침투했다
봄을 활짝 피운 벚나무들이
꽃 그늘 아래 서 있는 사람들한테
사회적 거리 둬야 한다며
움츠리며 소스라친다


‘미안하다. 벚나무야’


인간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
해마다
혹독한 봄을 치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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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시를 쓴다
하고 싶은 얘기를 다 쓰니 산만하다
언어를 가지 치고 연 나누기를 하니
산뜻하다


몇 달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말하기보다 경청에 익숙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 무성히 자라는
배려의 여백, 사회적 거리 두기
환한 그리움만 키운다


저만치 서서 간격을 지켜 주는 나무들과
수억 년 서로
거리 두기 하고 있는 하늘과 땅


그 모두 아름다운 여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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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동이 수상하다



물살처럼 밀려드는 외지인들
전단지 속 청호동만 보고 간다


함지 가득 오징어 배를 따던 아마이들 
바다에 그물 던져 놓고 
갯배 쇠갈고리 당기던 아바이들
모두 어디로 갔는지
모래사장에 부리 맞댄 갈매기들이 
함경도 고향 소식 전하면 살아나는 얼굴들


청호동이 수상하다


반세기 동안 해당화는 피고 지는데, 사람들은
청호동 곪아 있는 속살은 보지 않고
모래톱에 패대기치던 파도의 속울음도 듣지 않고
뼛속까지 스민 생선 비린내도 맡지 않고
갯배 선착장에서 커피만 홀짝거리며
바람에 흔들리는 섬, 청호동을
스마트폰 속으로 밀어 넣기에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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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리 선사 유적지*에서
― 빗살무늬 토기



머리 풀어 헤친 원시인들이
번뜩이는 눈으로
나를 보고 씨익 웃는다


움막 옆 돌의자에 앉아
골똘히 흙을 반죽하다가
파도 당겨 곡선을, 산을 주물러 세모를
물고기 뼈를 발라 빗살무늬를
문신처럼 정교히 토기에 그려 넣고 있다


원시인이 던진 창이 빗살 되어
허공에 금을 긋고 지나간다
진열대 위 빛바랜 토기들
불에 구워지던 씨줄과 날줄
뒤틀리던 비명이 기하학무늬로
수평선처럼 선명하다


벌판 가득 억새들이
오산리 유적지를 흔드는데
후드드 선사시대 소나기가 빗금 그으며
금이 간 빗살무늬 토기에
종일 제 몸을 때리고 있다.


* 오산리 선사 유적지(사적 394호) :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신석기 시대인들이 살았던 선사 주거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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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 일주문 앞에서



문은 열려 있는데 들어가지 못한다
천은사* 바람이 문빗장 잠그며
내려가라고 한다


절이 바로 저기라는 말만 듣고
어둠을 등에 지고
울울 창창 금강송을 거느리며
숨차게 오른 가파른 길
물소리, 새소리 색색 야생화들이
빛이 되어 길을 터주는데
절은 끝내 보이질 않고, 길 다하는 곳에
쩌렁쩌렁 이승휴* 기침 소리만
두타산을 흔든다


맑아져야 하느니라
티끌 하나 없이 나(我)를 버려야 하느니라
허공 끝에서 들리는 환청


일주문 앞
천은사 부처님이 내 등을 떠미신다.


*천은사: 강원도 삼척에 있는 사찰
* 이승휴: 고려 시대의 학자ㆍ문인,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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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빗



가자미를 구워서 먹는다
등속에 박혀 있는 빳빳한 뼈들
결 고운 참빗이다


할머니 임종 전날 머리 빗겨 드리고
찾아도 보이지 않던 참빗이 여기까지 왔다
저승길 가는 길에 레테 강*을 건너시다
물속에 빠뜨렸나보다


그 빗이 먼바다로 흘러 흘러 떠돌다가
가자미 등뼈가 되어
손녀 밥상 위에 올라왔다


그리운 참빗,
뼈만 남은 할머니 손을 어루만진다.


* 레테 강 : 그리스ㆍ로마 신화로 망자가 저승길을 가면서 건너야 하는 다섯 개 강물 중의 하나인 망각의 강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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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다리



무섬 외나무다리 건너 외갓집엘 갔다
다리 위에 올라서면 낙동강 상류
물바늘이 나를 유혹했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조약돌과 모래가 물살에 끌려가고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마다
세찬 물살이 나를 잡아당겼다


어른이 되어 사람과 사람 사이
다리를 건널 때가 있다
어릴 적 무섬다리 아래서 보았던
물살이 내 머리채를 잡아끈다
저만치 검게 회오리치는 여울물들


가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걸쳐진
다리 위에 설 때면
휘청, 중심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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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증



눈앞에 미세한 벌레가
비문(飛蚊)으로
떠다니는가 싶더니


ㄹㄹㄹㄹ
ㅋㅋㅋㅋ, ㅆㅆㅆ


아침 한나절
안경에 딱 붙어 꼼짝 않는다
닦으려고 하면 금세 사라지고
안경을 쓰면 또 달라붙어
나를 조롱하고 있는
비문(非文)들


절절한 문장도 못 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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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빛에 홀린 날들



하늘과 바다 빛을 버무려
인견 스카프에 물들이다


물들인 스카프를 탁탁 털어
햇살 아래 널자
산과 마을이 청남 빛으로 출렁인다


내 사춘기는 저수지 둑방에 피어난
쪽빛 붓꽃에 발목 걸려
어지럼증을 앓았고


스무 살에는
광화문 누각에 걸려 있던 낮달과
청남 빛 하늘을 목에 감고
혼자서 도시 거리를 쏘다녔다


바다 마을에 살 섞고 사는
중년이 된 지금
내 스카프에는 전설처럼
청남빛 하늘이, 쪽빛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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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외경畏敬



폭우로 축사가 잠기고
소들이 탈출을 시도한다


축사 지붕 위로 피신하기도 하고
흙탕물에 얼굴 내놓은 채
떠내려가는 소들


산사태로 집이 무너지자
비상 경보음 소리에
누 떼처럼 달려서
오백 미터 사성암*까지 오른
열다섯 마리 우공(牛公)들
갈림길도 놓치지 않고
소방울 흔들며 깎아지른 암자까지
거품 물고 달려왔다
끔벅이는 눈으로 부처님 앞에 참배하며
화엄(華嚴)에 든다


섬진강 물살 따라
남해 무인도까지 떠내려갔던 소들도
기진맥진 죽음을 헤쳐
먼 축사로 다시 돌아왔다


사방, 천수경 소리 가득하다.


* 사성암 : 구례 지리산 자락 오산 정상 부근 해발 531미터에 있는 암자